제305화
소리가 그 의미를 잃고 시간과 공간의 개념마저 부서져 버린 곳엔 고요한 정적만이 존재했다.
회색빛 신력을 머금은 인과율의 창날이 우주 전체를 빨아들이며, 나선형을 그렸다.
놈이 창을 휘두른 궤적마다, 부서진 별들의 파편이 섧게 흩날리며 은하수를 그렸다.
-번쩍!
맞붙은 회색빛 창날과 황금빛 창날에서 소리 없는 불꽃이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엉망으로 부서져 버린 세상이 절반은 금빛으로 절반은 잿빛으로 물들며, 태극을 그렸다.
【기생충 같은 버러지들이 이 몸의 힘을 훔쳐, 자네에게 나눠줬기 때문인가? 이번에는 제법 잘 버티는 것처럼 보이네만.】
황과 백이 태극이 세상을 가득 채운 세상에서, 인과율의 이죽거리는 비웃음이 들려왔다.
소리마저 그 자취를 감춰버린 세상이었지만, 놈의 능글맞은 목소리는 정적을 뚫고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웅웅 울렸다.
“단순히 잘 버티는 수준이 아닐걸? 애초에 그쪽이 비겁한 짓만 안 했어도. 그 잘난 방구석 외톨이의 자리는 내 것이었어!”
내 목소리가 인과율의 귓가에 제대로 때려 박힐지 의심스러웠지만.
나는 놈의 비웃음에 화답하듯 비릿하게 이죽거리며, 입꼬리를 고약하게 뒤틀었다.
그것과 동시에 나는 놈의 창날과 대치 중인 어둠달의 창날을 뒤틀린 입꼬리처럼 슬쩍 비틀었다.
-콰아아아앙!
그렇게 잠깐의 균형이 무너지자, 궤도가 틀어진 두 개의 창날이 엉뚱한 곳에 틀어박혔다.
‘바닥’이란 개념 그 자체를 무너뜨리며, 단단히 틀어박힌 두 개의 창날에서 서로 다른 신력이 폭주하듯 흘러나오자, 어마어마한 충격이 밀려들었다.
“흡!”
그 충격을 발판 삼아, 단숨에 거리를 좁힌 나는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신력을 충분히 머금은 오른손이 태양 그 자체가 되어버린 듯 강렬한 열과 광채를 흩뿌렸다.
-꽈광!
번쩍이는 태양 그 자체가 되어버린 오른 주먹이 시간과 공간을 통째로 왜곡하며, 인과율의 거대한 면상에 틀어박히자.
눈이 멀어버릴 듯한 섬광과 함께, 소리가 다시 그 의미를 되찾으며 폭음을 터뜨렸다.
꽁꽁 얼어붙은 채로 멈춰버렸던 시간이 뜨거운 열기에 녹아,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부서졌던 공간이 다시 수복되며, 인과율과 나를 거대한 콜로세움의 한복판으로 이동시켰다.
【…안타깝군! 조금 얕았지 뭔가!】
태양을 머금은 주먹에 가격당한 인과율의 머리가 흐릿하게 웃는다. 싶더니.
행성과 별들의 집합으로 이뤄진 놈의 거대한 육신이 그 구조를 바꾸기 시작했다.
주먹이 틀어박혔던 ‘머리’였던 곳이 뿌드득 뒤틀리며, 내 주먹을 붙잡은 손바닥이 되었다.
놈의 오른쪽 다리였던 부위가 주먹의 형태로 변이되더니, 대각선 아래에서부터 반격이 날아왔다.
-콰드득!
실로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의 위력을 지닌 반격이었다.
급히 왼손으로 놈의 공격을 받아치자마자, 나는 이글거리는 화안금정에 신력을 집중한 채로 인과율의 다음 동작을 확인했다.
【흐음!】
인과율은 자신의 공격이 막힌 것을 확인하자마자, 왼손을 길게 뻗어 창을 소환했다.
하늘에 부질없이 흩날리던 별들이 은하수를 그리며, 왼손에 집중되더니. 창의 형태가 되었다.
다시 소환된 창날이 우주의 섭리 그 자체를 머금고 내 목숨을 노렸다.
“…어딜!”
실로 거의 본능적으로 느껴질 만큼 재빠른 대처가 아닐 수 없었다.
인과율의 창날이 불길한 와류를 그리며, 내게 짓쳐 들자.
정지된 시간 속에서 막 풀려난 아트로포스는 암갈색 신력을 휘둘러, 창의 궤도를 왜곡시켰다.
궤도 자체가 왜곡되어, 괴이한 방향으로 빗나간 창날은 순식간에 관객석을 부수고 우주 저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썩둑!
그렇게 아트로포스의 난입으로 찰나의 위기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나는 손날에 신력을 집중해, 내 주먹을 꽈악 붙잡고 있는 손을 통째로 잘라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절단’이라는 개념이 응축된 공격에, 별들의 무리로 이뤄진 인과율의 손이 너무도 허망하게 공간째로 잘려나갔다.
“흐하하핫! 쉽게 재생하게 내버려 둘 순 없지! 공격을 늦추지 말게! 얼간이 성좌 나으리들도 어서 정신 챙기시고!”
-쿠르르륵!
인과율의 오른손이 잘려나감과 동시에, 암녹색 신력이 절단면을 단단히 휘감았다.
그러더니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베알제불이 자랑하는 부패와 타락의 권능이 강력하게 발현되어 놈의 재생을 늦췄다.
호탕하게 웃는 베알제불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린 인과율은 회색빛 신력을 집중하여, 재생을 방해하는 암녹색 신력을 떨쳐내려 했지만….
「시간과 공간이 왜곡되는 것에 미처 대비하지 못하다니. 이래서야 면목이 살지 않는군.」
「그렇게 여유롭게 지껄일 시간에 무기나 한 번 더 휘두르시는 게 어떻소?」
-콰앙! 콰앙!
암녹색 기포가 뽁뽁 피어오르는 절단면에 정신을 차린 성좌들의 공격이 집중되었다.
회색빛 신력이 구름 형태로 절단면에서 피어오를 때마다, 다양한 힘과 권능을 품은 성좌들의 일격이 그곳으로 날아들었다.
【…버러지들이 끝까지 귀찮게 구는군. 하찮기 짝이 없는 존재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그리도 기꺼운가?】
“기껍고말고! 누구와는 다르게 나는 인연을 소중히 여기거든! 혜옥아!”
《넵! 싸부님!》
내 부름과 눈짓을 받은 김혜옥이 빠른 속도로 내게 뛰어왔다.
삽시간에 내게 다가온 그녀는 내가 밟기 좋게끔, 깍지낀 양손을 앞으로 쑤욱 내밀었다.
-파아아앗!
영혼 상태로도 괴력을 발휘하는 김혜옥 덕분에, 나는 순식간에 까마득한 높이까지 솟구쳤다.
모든 것이 조그맣게 보일 만큼 솟구친 나는 황금빛 신력을 사방으로 퍼뜨리며, 하늘에 떠오른 태양 그 자체가 되었다.
【…허튼 짓을!】
태양 그 자체가 되어버린 나를 본 인과율은 성한 손을 허공에 뻗어, 회색빛 구름을 소환했다.
놈의 손에서 소환된 회색빛 구름이 우주 전체를 어둑하게 물들이며, 내 쪽을 향해 용오름처럼 위쪽으로 솟구쳤다.
마치 수억, 수조 마리의 상어들이 어둑한 심해에서부터 솟구치는 듯한 살기가 아래에서부터 섬뜩하게 나를 덮쳐왔다.
《산군님을 지원해! 어떻게든 막아!》
인과율이 뿜어낸 회색빛 구름의 흉포한 기세에 경악한 영혼들은 말 그대로 ‘어떻게든’ 막아내기 위해 솟구치는 회색빛 구름의 폭풍 속에 몸을 던졌다.
《헌터님! 남부 연합은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 영혼만 남은 상태지만. 나도 용호에게 진 빚을 갚겠어!》
암울하게 회오리치는 회색빛 구름 속에서 눈부신 광채가 터져 나왔다.
생전에 지녔던 특성 트리를 모조리 잃어버린 상태지만, 용맹하게 회색빛 구름과 맞서는 영혼들에게선 그들의 삶을 형상화한 별자리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양소혜와 남부 연합을 비롯한 수많은 헌터들이 그렇게 시간을 벌어준 덕에, 나는 준비했던 것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파스스스.
눈이 부실듯한 황금빛 광채 속에서 거대화된 금빛 외골격이 벚꽃처럼 부서져 내렸다.
그렇게 부서져 내린 채, 꽃잎처럼 하늘하늘 떨어져 내리던 외골격의 파편들은 회색빛 구름에 대항하듯 거대한 황금빛 구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쿠르르릉!
황금빛 구름 속에서 벚꽃처럼 흩날리는 외골격의 파편들이 각기 다른 권능을 머금었다.
파괴와 창조, 죽음과 생명, 시간과 공간의 권능 등 내가 품은 모든 낙오자들의 힘과 권능들이 흩날리는 외골격 파편 하나하나에 모조리 깃들었다.
수없이 많은 힘과 권능이 꽃잎처럼 흩날리는 황금빛 구름 속에서 나와 낙오자들 전체의 힘과 권능을 머금은 외골격이 거대한 용의 형상으로 빚어지기 시작했다.
-크르르릉!
압도적인 크기의 황금빛 용이 황금빛 구름 속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내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금빛 광채와 함께, 황금빛 벼락이 사방에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휘몰아치는 벼락과 천둥의 폭풍을 두른 황금빛 용은 회색빛 구름 속에 도사린 인과율을 노려보며,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하늘, 아니 우주 전체를 번쩍 금빛으로 물들인 놈은 그대로 아가리를 쩍 벌리며, 회색빛 구름에게 덤벼들었다.
-콰광! 콰과과과광!
수없이 많은 권능을 머금은 황금빛 용의 이빨이 회색빛 구름을 덥썩 물어뜯자.
수백, 수천, 수만 개의 벼락이 동시에 내리꽂히는 듯한 굉음이 연달아 터졌다.
굉음 속에서 콜로세움을 가득 채웠던 회색빛 구름이 삽시간에 황금빛 용의 아가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동안 내가 펼쳐왔던 광룡광림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강력한 파괴력이 인과율의 권능이 응축된 회색빛 구름을 순식간에 증발시킨 것이었다.
-콰직! 콰직! 콰지지직!
회색빛 구름을 통째로 집어삼킨 황금빛 용은 곧이어 허공에 훤히 드러난 인과율의 거대한 몸을 덮쳤다.
거대한 황금빛 용이 산산이 부서지며, 별과 행성으로 이뤄진 육신 전체를 처참하게 유린했다.
인과율의 몸을 구성하는 행성들의 표면에 시커먼 거미줄 모양의 잔금이 퍼져 나갔다.처연한 빛을 흩뿌리는 창백한 별들이 산산히 바스라지며, 은하수처럼 흩날렸다.
그동안 막후에서 모든 것을 조율해왔던 절대자의 비대한 육신이 모래알처럼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사르르륵.
《….》
인과율의 거대한 육신이 가루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하자, 장내에 정적이 찾아왔다.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무기를 꼬나쥔 영혼들도, 조용히 사태를 지켜보는 성좌들도.
숨을 죽인 채, 모래알처럼 부서져나가는 인과율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사르르륵! 사르르르르륵!
이상한 일이었다.
인과율의 육신은 완전히 분해되어 사라져버렸지만.
특유의 음험하면서도 불측한 기운은 여전히 콜로세움 전체에 끈적하게 남아있었다.
게다가, 어째선지 놈의 몸뚱이가 완전히 모래알이 되어 흩어진 뒤로도 계속해서 모래가 무너져내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뭔가 이상한데. 다들! 정신줄 꽉 붙들엇!」
이상을 감지한 어느 성좌의 입에서 경고음이 터져나온 그 순간!
-콰르르르륵!
콜로세움의 거대한 바닥이 갑자기 모래가 되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모래로 이루어진 끝없는 모래의 바다가 콜로세움을 집어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