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4화
“흐하하핫! 부패의 향취가 내 코를 간질인다! 타락의 기운이 내 혈관을 타고 암울하게 퍼져나간다! 영락의 세월 속에서 부패와 타락의 아버지가 다시 돌아왔나니!”
베알제불은 본디 ‘타락한 고성의 파리 군주’라는 이름의 ‘사악한’ 성좌였다.
그때 그 시절의 악명을 모두에게 증명하기라도 하듯, 광기가 가득한 폭소를 터뜨린 그는 암녹색으로 물든 두 손을 힘차게 교차했다.
-펄럭!
암녹색 신력이 깃든 두 손이 좌우로 교차 되자.
어느새 베알제불의 등 뒤에 생성된 거대한 곤충 형태의 날개가 그에 호응하듯, 불길하게 펄럭이며 시커먼 암녹색 분진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크으읏?!】
-푸스스스.
안개처럼 모든 것을 흐릿하게 물들인 암녹색 분진 속에서 만물이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했다.
인과율이 육신을 구성하고 있는 행성과 별들이 시커멓게 물들더니, 끔찍한 악취를 풍겼다.
놈이 태양계 전체를 뒤틀어 빚어낸 콜로세움의 회색빛 바닥에 시커먼 구멍이 숭숭 뚫렸다.
성좌 시절 지녔던 힘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지만, 지금의 바알제불이 펼쳐낸 부패의 권능은 먼젓번 ‘껍데기’만 남았던 시절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한 수준이었다.
「크윽! 이렇게나 지독한 부패의 권능이라니」
「파리군주…? 낙오자들에게 붙잡혀, 신성을 잃었다고 들었는데.」
부패의 권능이 사방을 암울하게 물들이며, 모든 것을 붕괴시키기 시작하자.
지독한 악취에 질겁한 성좌들이 그제야 베알제불의 존재를 눈치챘다.
한때 신성을 잃어버렸던 그가 너무도 정정한 모습으로 부활한 모습에, 성좌들의 별과 빛으로 이뤄진 얼굴이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부패…. 가장 하찮고 가장 더럽고 가장 추악한 권능을 부여받은 쓰레기가 죽지 못해 다시 나타났구나.】
순식간에 육신을 재생시킨 인과율은 태양과 달로 이뤄진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경멸에 찬 눈으로 광소를 터뜨리는 베알제불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처음으로 놈의 타오르는 시선을 마주한 베알제불의 얼굴에선 공포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입매를 비릿하게 뒤튼 그는 인과율을 조롱하듯, 암록색 신력을 놈에게 집중시켰다.
“그러신가? 가장 하찮기 짝이 없는 버러지들에게 인과율 나으리의 고귀한 육신이 유린당한다니! 그것만큼 우스운 광경도 흔치 않겠지!”
-왜애앵!
번들거리는 암록색 신력이 수없이 많은 파리떼의 형태가 되어 인과율에게 날아들었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파리떼를 바라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린 인과율이 회색빛 구름을 휘둘러 파리떼의 접근을 차단하려 들었지만….
“안타깝게도 육신을 되찾은 것은 그뿐만이 아니랍니다. 저 역시, 빚이 좀 있죠?”
【…뭐?!】
-꽈드드득!
얼음처럼 서늘한 목소리와 함께, 인과율의 몸을 뒤덮은 회색빛 구름이 암갈색으로 물들었다.
완전히 암갈색으로 물든 회색빛 구름은 파리들로부터 제 주인을 지키긴커녕, 오히려 인과율을 옥죄는 족쇄가 되어 행성과 별로 이뤄진 육신을 단단히 속박했다.
-왜애애앵!
인과율의 거대한 육신이 암갈색으로 물든 구름에 단단히 속박되자.
감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요란하게 날갯짓하는 파리떼가 행성과 별을 시커멓게 뒤덮기 시작했다.
섬뜩한 안광을 뿜어내던 해와 달이 파리떼에 뒤덮여, 일순간 빛을 잃었다.
「설마하니. 파리 군주 따위와 합을 맞추게 될 줄은 몰랐지만…. 뭣들하고 있나! 지금이 기회일세!」
-콰앙! 투콰앙!
베알제불의 활약으로 인과율의 거대한 몸이 파리떼에 완전히 뒤덮이자.
영락의 구렁텅이에서 돌아온 전직 성좌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성좌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 이름모를 성좌의 입에서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온 것과 동시에, 별과 빛으로 이뤄진 무기들이 인과율의 육신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성좌 나으리들만 활약하게 둘 순 없지!》
《육체는 잃어버렸지만. 다들 인간으로서의 긍지까지 잃지는 않았으리라 믿는다! 가자! 형제자매들이여!》
성좌들의 반격이 개시되자, 잠시 멈칫했던 영혼들도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
육신과 생전의 무력까지 잃어버린 그들이었지만, 그들은 인과율에게서 흡수한 약간의 힘을 촛불처럼 불태우며 용맹하게 돌격했다.
“…보십쇼. 그렇게 무시하셨던 ‘평범한’ 이들마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황에서도 자신의 긍지를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
“그동안 어르신께 평생 갚지 못할 신세를 입었기에. 감히 배은망덕하게 어르신을 더 비난할 순 없습니다만…. 우리의 인연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성좌들과 전 성좌들, 그리고 영혼만 남은 이들의 합공을 바라보던 나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혼잣말하듯 위철용에게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제발. 생긴 것처럼 행동하지 마십쇼. 얼굴이 못생겼지. 마음까지 못생긴 건 아니잖습니까.”
-투콰앙!
제멋대로 위철용에게 마지막 말을 남긴 나는 그대로 힘껏 땅을 박찼다.
황금빛으로 물들어 더는 ‘검은’ 심장이라 하기 힘든 검은 심장이 정신없이 맥동하더니.
내 몸속을 가득 채운 회색빛 신력을 황금빛으로 채색했다.
내 영혼에 알알이 틀어박힌 낙오자들의 별자리가 다시 황금빛으로 물들며, 내게 한과 업을 맡긴 이들의 힘과 권능을 불어넣었다.
반쯤 부서진 어둠달이 황금빛 신력을 휘감고 최후의 전투를 준비했다.
-콰지지직!
그렇게 황금빛으로 휘감긴 채, 인과율 앞에 뚝 떨어져 내린 나는 힘껏 어둠달을 내질렀다.
파천 복룡창의 신묘한 초식도, 창에 관련된 모든 지식도 잠시 잊어버린 채. 순수하게 놈을 박살 내겠다는 결의와 악의만을 두른 공격이 빛살처럼 인과율의 미간 사이로 파고들었다.
【…버러지들의 더러운 몸뚱이 뒤에 숨어, 이제야 힘을 회복했는가? 아무리 필멸의 굴레를 벗지 못했다지만. 이 몸의 자리를 이어받을 ‘계승자’라는 이름에 부끄러운 행동을 하는군.】
“인연을 맺은 이들의 힘을 빌리는 것이 뭐가 부끄럽다고. 그쪽과는 다르게 나는 친구가 제법 많거든.”
얼굴을 구성하는 행성들이 완전히 박살 난 인과율은 음울하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성좌들과 영혼들의 공격이 제법 놈에게 타격을 입힌 모양인지.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는 인과율의 재생속도는 눈에 띄게 느려진 상태였다.
“회복했는가? 그쪽으로 가세하도록 하겠네.”
“어느 정도 타격을 입혀두긴 했지만…. 모두의 힘을 합쳐도 저희로선 놈의 발을 묶는 정도가 전부겠죠. 그러니. 부디….”
내가 난입한 것을 본 베알제불과 아트로포스는 내 쪽으로 다가와 내 옆에 섰다.
일방적으로 몰아붙인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로서도 상당한 양의 신력을 소모한 모양인지.
신력의 힘을 빌려 일시적으로 빚어낸 두 명의 얼굴에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설용호가 합류하는군! 다들 공격을 멈추지 마….」
【언제까지 재롱을 부릴 생각이었지? 안타깝게도 너희들과 놀아주는 것은 여기까지다.】
-파스스스스.
내가 합류한 것을 본 성좌들은 더욱 더 인과율을 몰아세우려 했지만.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인과율은 단지 손을 휘두른 것만으로 그들의 공격을 모조리 무효화 시켰다.
【보게. 버러지들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야 버러지에 불과한 족속들일세. 불경한 소리를 지껄이는 놈들과 잠시 어울려줬더니. 이렇게나 기세등등하게 구는 꼴이 우습지 않나?】
“웃기지도 않은 허세는. 저들 앞에서 그따위 허세를 부리기 위해. 얼마 남지도 않은 추종자들을 모조리 희생하다니. 네놈도 어지간히 제정신이 아니야.”
얼핏 보기엔 가볍게 손을 휘둘러, 성좌들의 공격을 무위로 돌린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인과율은 그 한 번의 ‘허세’를 위해. 관객석에 박제된 마족들의 영혼들을 상당수 소모해버린 상태였다.
덕분에 박제된 이들로 가득했던 관객석은 이제 비어있는 것이 눈에 띌 만큼 황량해진 상태였다.
【…들켰나? 뭐, 실은 넘어갈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말일세. 이제 이 몸도 힘을 회복할 수 있는 ‘도구’가 별로 남아있지 않으니. 이재야 ‘공평해진’ 상황이라 봐야지.】
피식 웃은 인과율은 돌연, 번개처럼 은하수와 어둠으로 빚어낸 창날을 내리그었다.
-콰창!
“공평? 네놈에게 그따위 개념이 존재하긴 했던가?”
공평이라는 단어와 가장 거리가 먼 종자답게.
인과율이 기습하듯 노린 것은 다름아닌 성좌들과 영혼들이었다.
비열하게 번들거리는 놈의 시선이 슬그머니 그들에게 향한 것을 눈치챘기에, 나는 황금빛에 휩싸인 어둠달을 슬쩍 들어올려 인과율의 비겁한 기습을 막아냈다.
【이런. 방심을 틈 타. 귀찮은 버러지들을 조금이나마 치울 수 있나 기대했는데 말이야!】
“골방에 틀어박혀 혼자만의 세계에 갇힌 누구와는 다르게, 이쪽은 눈치라는 게 있어서!”
-쿠르르릉!
교차 되었던 어둠달과 인과율의 창날에서 천둥과 우레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회색빛 신력과 황금빛 신력이 거세게 맞붙으며 진홍빛 불꽃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신력과 신력이 마주친 충격으로 인해, 새하얗게 이글거리는 전하의 폭풍이 사방을 휩쓸었다.
-콰콰쾅!
새하얗게 백열된 두 창날이 폭음을 토해내자.
나와 인과율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뒤쪽을 향해 도약했다.
【시건방진 버러지들을 이끌고 얼마나 더 버티는지 보자고!】
비릿하게 비웃는 인과율의 거대한 창날이 시커멓게 물들더니, 우주를 품었다.
세상의 섭리, 원인과 결과, 시간과 공간 등 다양한 법칙들이 창날에 깃들었다.
“글쎄? 적어도 네놈을 쓰러뜨릴 때까지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인과율에게 질세라, 한껏 신력을 끌어올린 어둠달의 창날이 만물의 이치를 품었다.
직선과 곡선, 약함과 강함, 과거와 미래 등 다양한 법칙들이 황금빛 창날에 녹아들었다.
-번-쩍!
다시 한번 창날이 교차 되자. 세상이 일순간 백색 섬광에 완전히 물들었다.
백색으로 물든 공간 속에서 소리가 사라졌다. 시간이 멈췄다. 공간이 의미를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