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3화
[사실 저희의 영혼에 각인되어있는 공포는 보통이 아니에요. 당장 저희도 공포를 뛰어넘는 증오가 아니었다면, 그에 대한 공포를 이겨낼 수 없었을 테니까요.]
[…그리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네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닐세. 그녀의 말대로 우리도 한때는 그에 대한 공포가 영혼을 좀먹고 있었으니까.]
위철용이 보여준 실망스러운 모습에, 내 얼굴에 안타까움과 경멸의 표정이 퍼져나갔다.
내 표정을 본 아트로포스와 베알제불은 애써 변명 아닌 변명으로 그를 두둔하려 들었지만.
이미 내 머릿속엔 ‘실망’이라는 감정이 들불처럼 격렬하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실은 어르신이 ‘직접’ 놈과 맞설 수도 있었다는 말씀 아닙니까?”
[…맞네. 신력이란 힘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품고 있지. 배후령으로 영락한 상태지만, 자네의 몸이 품고 있는 신력의 힘을 이용하면. 육체를 재구성하는 것은 물론, 성좌 시절의 무력을 3분지 1 정도까지 재현해 낼 수 있었겠군.]
[하, 하지만 우리도 최근에 알게 된 거예요. 다, 당연히 어르신도….]
생각해보니 이상하긴 했다.
회귀 전 세상에서도 『배후령』 특성의 진정한 가치는 ‘성장’에 있었다.
처음에야 고작 특성 트리에 새겨진 움직임을 재현해, 스킬의 이해를 돕는 정도였지만.
주인과 같이 성장해, ‘구현화’의 단계까지 성장하게 되면. 배후령의 육신이 현실에 구현되어 일정 시간 동안 주인의 전투를 돕곤 했었다.
성장한 내 영혼의 ‘격’이, 그때 당시 배후령의 구현화가 가능했던 랭커들과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수준일 텐데도.
이상하게 위철용은 인과율과 마주한 이후, 계속해서 초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항상 제가 공포에 잡아먹힐 것을 걱정하시더니…. 아무래도 그동안 집요하리만큼 제게 물어오셨던 의심이, 실은 어르신 본인에 대한 의심이었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패배자들과 맞설 때부터, 위철용은 줄곧 내가 그들처럼 공포에 집어 삼켜질 것을 염려했지만.
이미 그 시점부터, 아니 애초에 튜토리얼 타워에서 인과율을 만났을 때부터 위철용은 이미 놈이 그의 영혼 속에 낙인처럼 새겨둔 공포에 잠식되어버린 상태였다.
갑갑한 배후령의 모습에서 벗어나.
천하를 오시하던 시절의 무용을 마음껏 뽐낼 기회가 수도 없이 있었음에도.
공포에 잠식된 위철용은 겁에 질린 새끼 거북이처럼, 내 뒤에 숨어있었던 것이었다.
“평소에 그렇게 잘난 듯 떠들던 가르침은 다 어디로 간 겁니까? 겁에 질린 자라 새끼처럼 껍질 속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 그 잘난 패도의 길이요. 협의 길이라는 놈입니까? 그것참 멋지네요. 언젠가 부서질 껍질 따위에 필사적으로 기대는 자라 새끼 같은 마음가짐이라니.”
머리와 가슴 속에 들불처럼 퍼져나간 실망의 감정은 자연스레 내 말투에서 위철용에 대한 공경을 거세해 나갔다.
한심하다는 듯 비아냥거리는 특유의 말투가 이번엔 내 입에서 싸늘하게 흘러나왔다.
대놓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투에도 불구하고, 위철용은 나와 시선조차 마주하지 못했다.
잔뜩 일그러진 그의 입가에선 무거운 침묵만이 묵직하게 깃들어 있었다.
[…우리야. 직접 마주하지 않았지만. 그는 시작의 탑에서 놈의 공포를 직접 체험하지 않았던가. 자네의 시선을 통해, 간접적으로]
완전히 소멸해버린 패배자들의 시신을 뒤로하고, 더욱 더 깊은 곳으로 향하려던 찰나.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위철용이 대뜸 내게 괴이쩍은 질문을 해왔다.
…인과율과 조우한 이래로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던 양반이 갑자기 이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그들 또한 네놈과 같은 길을 걸었던 이들이지 않았더냐. ‘그릇’이란 존재로서 낙오자들의 한과 업을 짊어졌던 이들. 필멸의 육신으로 새로운 희망과 질서를 품었던 이들…. 네놈 이전에 저렇게나 많은 이들이 공포와 절망에 잡아먹혔는데. 그들의 말로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게냐?]
위철용은 그답지 않게 살짝 흥분한 기색으로 장광설을 토해냈다.
나를 바라보며 잔뜩 찌푸린 그의 눈가에선 걱정이란 감정이 진득하게 묻어나왔다.
“그야 당연한 걸 왜 굳이 물어보십니까? 당연히…. 아무렇지도 않죠.”
[뭐…?]
내 입에서 의외의 대답이 흘러나왔기 때문일까?
뭐라 조언을 해 주려는 듯, 크게 숨을 들이마셨던 위철용의 입에서 헛바람이 흘러나왔다.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의문의 감정을 품고 기괴하게 찡그려졌다.
…이런 반응이라니. 도대체 이 어르신은 날 얼마나 나약해 빠진 얼간이로 인식한 거야?
여기까지 와서, 내가 저렇게 한심한 패배자 놈들의 말로 따위에게 동요할 리가 없잖아?
“도대체 절 어떻게 보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것이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게 당연하다고?]
“네, 당연하죠. 아무리 한때 저들이 저와 같은 길을 걸었다고 한들. 결국엔 공포와 절망에 먹혀, 한심한 선택을 한 얼간이들에 불과하잖습니까. 여기까진 비슷한 길을 걸어왔을지 모르지만. 그들과 저는 종착지 자체가 다를 텐데, 굳이 제가 그들을 신경 써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위철용의 의문에 여유롭게 히죽 웃으며, 자신 있게 답을 해줬지만.
어째선지 그는 더욱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심각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후우. 네놈이 그들처럼 공포와 절망 앞에 굴복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느냐? 먼젓번에 경험했듯. 그 ‘인과율’이라는 존재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힘을 가진 존재이니라.]
…허. 이 양반은 지금, 내가 그 얼간이들처럼 모두를 배신할 것을 걱정하고 있는 건가?
비로소 뒤늦게 위철용의 진의를 깨닫자, 불쾌한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회귀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누구보다 오랫동안 나를 옆에서 지켜봤던 이가 내뱉은 불신은 내게 참을 수 없는 불쾌함을 아낌없이 선사해주고 있었다.
“세상에…. 한때 세상을 오시했던 ‘천마’라는 양반의 안목이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됩니까?”
[…?]
“갑자기 뭔 이해하지 못했다는 눈빛을 보내십니까? 물었잖습니까. 잘나신 ‘천마’ 위철용 님의 안목이 고작 그것 밖에 안 되냐고요.”
[도대체 갑자기 그게 무슨….]
“제가 그렇게 나약한 인물로 보였다면, 도대체 왜 성좌의 자리까지 포기하며 제게 새로운 기회를 주신 겁니까? 놈들처럼 고작 그 정도로 포기할 얼간이를 위해 소멸마저 각오할 만큼. 성좌의 자리와. ‘천마’ 위철용이란 이름의 값어치가 가벼운 것이었습니까?”
위철용의 불신 어린 발언에 치밀어 올랐던 불쾌한 감정은 날카로운 독설이 되었다.
내게서 처음 보는, 엄혹하기 짝이 없는 반응에 위철용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당황의 기색이 서렸다.
“…가시죠. 이 한심한 겁쟁이 양반을 탓할 시간에 놈에게 한 번이라도 무기를 휘둘러야, 상황이 조금이라도 괜찮아질 것 같으니.”
-꽈지직! 꽈지지직!
위철용에 대한 서늘한 실망은 곧 용암처럼 거세게 이글거리는 분노가 되었다.
내 몸속에서 슬슬 날뛰기 시작한 인과율의 회색빛 신력이 내 분노에 감응해, 무시무시한 힘을 내 몸뚱이에 불어넣었다.
꺼져버렸던 황금빛 신력이 숫사자의 갈기처럼 내 몸에 은은하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으으음! 그래! 이 힘이야! 이미 패배하여 영락해버린 몸이 지껄이기엔 조금 주제넘을지 모르는 부탁이지만. 부디 내게 놈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지 않겠나?]
“얼마든지!”
[고맙네! 이번에도 자네의 힘을 조금 ‘빌려’ 씀세. 하지만 그 이상의 가치로 되갚아 줄 것이야!]
-파지지지직!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베알제불은 내 몸속에서 회색빛 신력을 잔뜩 끌어다 자신의 몸에 주입했다.
그의 암녹색 얼굴에서 광기 어린 미소가 피어나기 시작하더니, 배후령 상태로 영락해버린 몸이 회색빛 신력을 머금고 거대화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썩히고 뒤트는 힘이 영락해버린 육신에 다시 돌아왔다! 부패와 타락의 권능이 심연 속에서 다시 눈을 뜨는구나! 내가…. 파리의 군주가 다시 강림했도다!”
아무래도 성좌 시절보다는 격이 좀 떨어지는 모양인지.
육체를 재구성한 베알제불은 그의 심상세계에서 봤던 모습보다 훨씬 젊어진 모습이었다.
중년의 신사가 아닌, 젊은 전사의 모습이 된 베알제불은 암녹색 기운을 사방으로 퍼뜨리며, 광기 어린 포효를 토해냈다.
“품위 없기는. 다시 육신을 찾은 것이 그렇게까지 흥분할 일인가요?”
암갈색 아우라가 세상을 온통 어둡게 만든다. 싶더니.
일렁이는 암갈색 혼돈 속에서 젊은 여인의 모습을 한 아트로포스가 여유롭게 걸어 나왔다.
아무래도 상관은 없지만, 그녀 역시 베알제불의 요청을 자신에게도 적용해, 육신을 재구성한 모양이었다.
【이 버러지 같은 놈들! 감히 자신을 창조한 아비에게 이를 드러내!】
“아버지라…. 세상천지에 자식을 버러지라 비하하며 하찮게 여기는 아비가 어디에 있을까요?”
성좌들을 상대하며, 여전히 ‘아버지’니 ‘진정한 주인’ 같은 헛소리를 주억거리는 인과율을 바라본 아트로포스는 소름끼치게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