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2화
-콰르르르릉!
어슴푸레한 새벽녘에 동쪽에서 동이 터 오듯.
세상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굉음과 함께, 강렬한 섬광이 관객석에서 폭사 되었다.
「…벌레 같은 필멸자들 주제에 건방지게 굴다니. 네놈들의 오만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구나.」
떠오르는 아침 해처럼 강렬하게 빛을 발하는 섬광 속에서, 별과 빛으로 이뤄진 거인들이 거대한 몸뚱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그렇게 인과율의 구속을 풀어낸 성좌들은 저마다 거대한 무기를 집어 든 채, 이쪽을 향해 강렬하기 짝이 없는 적의를 토해내고 있었다.
《서, 성좌들까지! 마, 막아라! 산군님과 놈의 싸움에 저들이 끼어들게 내버려 둬선 안 돼!》
《크르르르…. 비열한 성좌 놈들! 그동안 가만히 있더니. 이제 와서 갑자기…!》
갑자기 난입한 성좌들의 흉흉한 적의와 마주하자.
나와 함께 인과율과 맞서던 이들의 낯빛이 빠른 속도로 새하얗게 변해갔다.
흐릿한 영혼이 더욱 흐릿해진 김혜옥의 입에선 마치 상처 입은 맹수와도 같은 난폭하지만 힘겨운 으르렁거림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구속에서 벗어 난지는 모르겠지만. 마침 잘 되었군. 보게. 저 꽉 막힌 버러지들은 그런 취급을 받고도 감히 이 몸에게 덤벼들 생각조차 하지 못하지 않은가. 필멸의 굴레에서 벗어난 이들조차 이 몸의 공포에선 감히 벗어나지 못하는 법이라네.】
이쪽으로 다가오는 성좌들의 면면을 훑어본 인과율은 특유의 비릿한 비웃음을 지었다.
별과 빛으로 이뤄진 거인들이 거대한 무기를 앞세우며 다가오는 모습에 모두의 얼굴이 암울하게 물들어갔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이럴 때.
【자, 이 몸이 빚어낸 버러지들이여. 감히 세상의 이치에 정면으로 맞서는 하찮은 필멸자들에게 합당한 신벌을…. 크윽!】
-콰드드득!
비릿한 미소를 띄운 인과율의 입에서 의기양양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온 그 순간.
놀랍게도 성좌들의 거대한 무기가 방향을 바꿔, 인과율의 공허한 육신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별과 빛으로 이뤄진 거대한 무기가 행성으로 이뤄진 육신 사이를 파고들자, 엄청난 폭음과 함께 인과율의 육신이 차원째 두 쪽으로 갈라졌다.
【이, 이 버러지들이 감히!】
「승천의 의회의 의장이 고하노라! 지금 이 순간부터 본 의회는 사사로운 욕망에 휩쓸려, 신성한 의무를 등한시한 죄인을 심판하겠다.」
「모름지기 투쟁이란! 부조리로부터 약자들을 위해 분투하는 것이외다! 우리 투쟁의 궁전 또한 ‘부조리’의 화신에게 투쟁의 칼날을 겨누겠소이다!」
「가장 어두운 곳에 위치한 심연의 형제자매들이여! 우리 심연의 구릉 또한 거짓된 아비를 심판하기 위해 나섰나니!」
-쿠콰아앙!
혼돈 그 자체가 내려앉은 듯한 콜로세움 속에서 빛과 빛이 거세게 충돌하자.
성좌들의 무기에 적중당한 행성으로 이뤄진 육신에서 별 가루가 은하수처럼 흩뿌려졌다.
【크으윽! 버러지들 주제에 어디서 건방지게 이 몸에게 대항하려 드는 것이냐!】
「하찮은 필멸자들조차 부당한 압제에 맞서 싸우려고 드는 판에, 우리가 언제까지 그쪽의 노예로 남을 수는 없지.」
어느 성좌의 입에서 천둥 같은 고함이 우레처럼 터져 나오자.
내리치는 벼락 그 자체를 형상화한 듯한 그의 무기에서 새하얀 전하가 들끓어 올랐다.
동시에 세상 전체를 하얗게 백열시킬 듯한 번개가 폭풍처럼 전방을 휩쓸기 시작했다.
-콰르릉! 콰르르릉!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새하얀 전하가 대단히 당황한 인과율의 육신을 정신없이 유린했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번개의 폭풍 속에서 인과율의 몸뚱이가 맥없이 퍽퍽 꿰뚫렸다. 놈의 육신을 구성하고 있는 별들이 엉망으로 박살났다. 놈의 두 눈을 이루는 해와 달이 일순간 빛을 잃었다.
《성좌들이 갑자기 저 빌어먹을 놈을 적대한다고?》
《믿고 있었다고! 젠장! 그럼 그렇지 성좌님들이 우리를 이유없이 적대할 리가 없지!》
열화와 같은 성원 속에서 계속 성좌들의 공격이 인과율의 거대한 몸 위로 퍼부어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과율에게 그 정도 공격은 생채기 수준에 불과했다.
차원 전체를 찢어 발길듯한 공격들이 놈의 몸을 마구 헤집는 상황에서도, 공허한 회색빛 구름 속에서 섬뜩하게 눈을 빛내는 인과율의 시선엔 여전히 심드렁한 적의가 가득했다.
【버러지들이…. 창조주에게 반기를 든 피조물이 어떤 말로를 맞게 되는지 잊은 것인가?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지. 비참한 말로를 맞고 싶지 않다면 네놈들이 마땅히 해야할 일을 행해라.】
「크핫! 댁이 지껄인 그 빌어먹을 ‘말로’ 라는 것은 이미 질리도록 겪고 있었지! 자유를 억압당한 채, 정해진 무대 위에서 광대놀음을 하는 것보다 더 비참한 꼴이 어디 있겠나!」
「지금 마땅히 ‘해야할 일’은 오직 하나뿐일세. 엉망으로 비틀어진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지!」
-썩둑!
자신을 적대하는 성좌들을 바라본 인과율을 스산한 목소리로 최후의 경고를 보냈지만.
놈에게 돌아온 답변은 문답무용으로 휘둘러진 성좌들의 무기들 뿐이었다.
용맹하게 포효한 ‘고통을 모르는 병사’의 도끼가 인과율의 손을 썽둥 베어냈다.
‘가시나무를 짊어진 노인’이 휘두른 가시덩굴이 인과율의 회색빛 구름을 칭칭 휘감았다.
그 뒤를 따라, 수많은 성좌들의 공격이 폭풍처럼 이어졌다.
-파아아앙!
【하찮은 버러지들이 감히 제 아비에게 반기를 들어! …좋다! 그토록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고 싶다면. 그 소원을 들어주도록 하지!】
마침내, 회색빛 구름을 두른 인과율이 노성을 토해냈다.
압도적인 힘과 권능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더니, 놈의 거대한 육신에 쏟아지던 성좌들의 무기가 그대로 증발해버렸다.
「기껏해야 그 비참한 말로라는 것이 낙오자로 영락하는 것이라면! 달게 받아주겠다!」
「성좌든! 낙오자든! 필멸자든! 어차피 네놈의 족쇄에 얽매인 것은 다 똑같지!」
하지만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경험한 뒤로도 성좌들은 조금도 겁먹거나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강렬하게 투지를 불태우며, 그동안 자신을 옥죄어 온 존재에 대한 적개심을 선명하게 드러낼 뿐이었다.
「우리는 긍지있게 싸우다 죽-겠-다!」
-촤르르륵!
증발되었던 성좌들의 무기들이 허공에서 다시 생성되었다.
어느 이름모를 성좌의 포효를 신호삼아, 그들의 별과 빛으로 이뤄진 육신에서 눈부신 투지가 태양처럼 사방을 밝게 물들였다.
다시 무기를 틀어쥔 성좌들은 다양한 힘과 권능을 두른 채, 오랫동안 자신들을 압제해 온 폭군을 향해 용맹하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
“크, 크으윽! 저, 저 양반들도 풀려난 건가…. 의외로군.”
[한낱 필멸자마저도 자신의 의지대로 동족들을 풀어준 상황인데. 저희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
구속에서 풀려난 성좌들이 인과율에게 반기를 드는 의외의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져, 입에서 절로 혼잣말을 흘러나왔지만.
어째서인지 그와 동시에 뇌까린 혼잣말에 대한 답이 예상치 못했던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아트로포스? 당신이 어째서….”
놀랍게도 어느새 고뇌하는 위철용의 옆엔 그와 똑같은 외모의 암갈색, 암녹색 배후령이 둥실 떠 올라 있었다.
그중에서도 초콜릿과도 같은 암갈색이 인상적인 아트로포스는 내 어깨에 날아와, 걸터앉은 채로 못생겼지만 신비로운 웃음을 지었다.
[어째서긴요. 당신이 위철용. 그분의 배후령으로서의 인격을 복구했을 때. 그분과 연결된 저희 또한 그분의 몸속에서 다시 눈을 떴었죠.]
[하도 경황이 없어, 그동안 그 양반의 몸속에서 잠자코 상황을 지켜만 봤지만 말이야.]
[그러다가…. 강태백이란 필멸자의 용기에서 약간의 힌트를 얻어, 무모한 짓을 좀 해봤는데. 다행히 제대로 먹혀든 것 같네요. 당신의 신력을 좀 빌려 쓰긴 했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어요?]
아무래도 이들은 내게 불어 넣어진 인과율의 신력을 바탕으로 강태백을 흉내 낸 모양이었다.
어쩐지 신지현과 이세영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달라붙어 인과율의 신력을 잔뜩 불어 넣어줬는데도 힘이 회복되는 속도가 늦다 싶었더니, 그런 이유가 숨겨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것보다…. 당신의 신력을 ‘빌려’ 쓰면서 느낀 건데. ‘배후령’이라는 존재는 주인과 같이 성장하는 존재가 아니었나요? 그렇지 않고서야. 배후령으로 영락해버린 저희가 그 엄청난 힘을 감히 사용할 순 없었을 텐데요.]
[맞네. 배후령이란 본디 주인과 영혼이 연결된 존재. 주인의 영혼의 ‘격’이 성장한다면. 그와 연결된 배후령 역시, 신력을 능히 사용할 수 있을만큼 범상치 않은 존재로 성장하는 법이지.]
…배후령이 신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두 배후령의 말에 강렬한 위화감을 느낀 나는 고개를 돌려, 위철용을 바라보았다.
비췻빛 안색이 완전히 하얗게 물들어있는 위철용은 그답지 않게 자그마한 주먹을 꽉 쥔 채로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하지만. 위철용 어르신께서는….”
[두려웠겠죠. 아무리 그가 한때, 천하를 오시했던 ‘천마’이자. 필멸의 굴레에서 벗어난 성좌였지만. 영혼에 아로새겨진 공포를 쉽사리 이겨낼 순 없었을 테니까요. 실은 저희도 그랬구요.]
[부끄럽지만. 우리도 필멸자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나서지 않았을 걸세.]
위철용과 똑같은 외모였지만, 아트로포스와 베알제불의 표정은 그와 완전히 달랐다.
살짝 바르르 떨리는 눈에선 미처 떨쳐내지 못한 공포가 깃들어 있었지만, 성좌들과 인과율의 싸움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미소짓는 그들의 얼굴에선 굳건한 의지가 느껴졌다.
하지만 위철용은….
[…빌어먹을.]
고집스럽게 입을 꽉 다문 채, 악다문 잇새 사이로 비참한 욕설만을 내뱉고 있었다.
오랫동안 그를 지켜봐 왔지만, 놀랍게도 위철용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그가 가장 경멸하는 ‘겁쟁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