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0화
회색빛 공간을 꿰뚫은 눈부실 빛줄기 때문에 눈이 부셔, 제대로 눈을 뜰 순 없었지만.
내 앞을 막아선 거대한 등판은 틀림없이 김혜옥의 그것이었다.
눈 부신 빛에 휘감긴 그녀의 몸에서 반투명한 회색빛 외골격이 신기루처럼 일렁였다.
어마어마한 괴력을 품은 회색빛 신력이 김혜옥의 전신에서 아지랑이처럼 넘실거렸다.
《넵! 싸부님! 저예요! 싸부님의 하나밖에 없는 제자! 혜옥이! 감히 싸부님을 이렇게 만들다니! 각오해라 이 못생긴 지구본 대가리야!》
특유의 명랑한 말투로 자신의 등장을 알린 김혜옥은 그대로 주먹을 휘둘러, 내게 엄습해오던 인과율의 공격을 힘껏 쳐냈다.
회색빛 외골격에 둘러싸인 김혜옥의 주먹과 인과율의 별과 행성으로 이뤄진 주먹이 허공에서 맞부딪히더니, 회색빛 공간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굉음을 빚어냈다.
-쿠콰콰쾅!
어마어마한 힘과 힘의 충돌에, 한때 소리를 잃어버렸던 공간이 다시 소리를 되찾았다.
쩌렁쩌렁한 굉음 속에서 부서진 외골격과 별이 파편들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크으으윽! 이 하찮은 버러지가 도대체 어디서….】
놀랍게도 김혜옥의 공격은 인과율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입힌 듯했다.
부서진 주먹을 부여잡은 인과율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당황과 고통이 뒤섞인 표정이 떠올랐다.
예상치도 못한 불청객이 난입한 것에 경악한 모양인지, 놈은 조금 전까지 그렇게 자랑하던 『전지전능』조차 제대로 써먹지 못하는 눈치였다.
인과율이 김혜옥을 바라보며, 멍하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 찰나의 순간!
《그건 알 것 없고! 감히 우리 싸부님을 저 꼴로 만들어?! 뒈졌다고 복창해라! 지구본 대가리!》
-꽈드드드득!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접근한 김혜옥은 그대로 인과율의 몸을 힘껏 껴안았다.
인과율의 별과 행성으로 이뤄진 육신을 휘감은 양팔에서 회색빛 힘줄이 우두둑 튀어나왔다.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그녀의 회색빛 외골격에서 회색빛 신력이 폭발하듯 흘러나왔다.
신력과 괴력이 깃든 김혜옥의 거대한 근육이 무서운 힘을 토해내며, 독 오른 아나콘다처럼 인과율의 육신을 꽈드득 옥죄었다.
【크, 크아아악! 마, 말도 안 돼! 어, 어떻게 불완전한 변종 파편 따위에게 이 정도의 힘이…!】
-빠지직! 빠지지직!
인과율을 꽉 껴안은 김혜옥의 눈에서 회색 안광이 치솟자.
인과율의 별과 행성으로 된 육신이 거미줄과도 같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부스러진 별과 행성이 파편이 회색빛 구름 속으로 우수수 떨어져내렸다.
시종일관 여유를 잃지 않았던 인과율의 얼굴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경악과 고통이 서렸다.
김혜옥에게 꽈악 붙잡힌 놈은 불신 가득한 목소리로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홋-호! 사랑과 분노와 슬픔의 힘은 상식을 뛰어넘는다-앗!》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혜옥이가 저 정도의 힘을 가졌다고?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김혜옥이 그렇지 않아도 언제나 상식 밖의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몸에 깃든 파편의 영향 때문이었다.
아무리 내가 김혜옥의 몸에 깃든 파편을 각성시켜줬다고 해도, 그녀의 힘은 고작해야 성좌의 화신체 수준에 불과할 터였다.
때문에, 성좌 ‘따위’와는 격 자체가 다른 인과율에게 김혜옥의 공격이 유효타를 낼 리가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인과율을 너무도 간단하게 압도하고 있었다.
“도대체 또 혜옥이에게 무슨 일이…. 으헉?!”
그렇게 김혜옥의 예상치 못한 활약에 의아함을 느끼려던 찰나.
누군가가 내 몸을 확 잡아끄는 느낌이 들더니, 주변의 풍경이 갑자기 빠르게 지나갔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린 내 몸은 김혜옥과 인과율이 싸우는 곳으로부터 빠르게 멀어져갔다.
《잡았다! 확보 완료! 여러분! 이쪽입니다!》
이번에도 의외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웅웅 울렸다.
살짝 경박하지만 묘하게 따스한 기운이 서려 있는 목소리, 바로 서민혁의 목소리였다.
“…서 기사님?”
《어휴…. 어쩌다가 이렇게 다치셨대. 네! 접니다. 산군님! 오랜만에 뵙네요!》
서민혁 특유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계속해서 머릿속을 쿵쿵 울렸다.
곧이어 무언가 부드럽지만 강인한 것이 내 몸을 부축해 주는 듯한 기분에, 가물거리는 눈으로 나를 부축해 준 서민혁을 바라본 순간….
“서, 서 기사님?! 도, 도대체 그 몸은 어떻게 된 겁니까!”
가물거리는 시야 사이로 들어온 서민혁의 모습은 놀랍게도 『원혼 제령술』에 노출된 이들의 영혼과 너무도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의 반투명한 몸은 사막의 신기루처럼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위태롭게 일렁거리고 있었고.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선 모든 한과 미련을 완전히 떨쳐버린 듯, 영혼들 특유의 달관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유령이나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 된 서민혁은 대답 대신 푸근하게 웃더니니. 손가락을 들어, 새하얀 빛이 새어 나오는 틈새를 가리켰다.
“…!”
《서 기사님이 이쪽이랬죠?! 서둘러요! 지현 씨!》
《망할 인간…. 살아서든 죽어서든 꼭 손이 가게 만든다니까.》
인과율의 의지로 만들어진 공간에 쭉 그어진 새하얀 틈새를 넘어, 이세영과 신지현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서민혁과 비슷한 상태가 되어 이 회색빛 허무의 공간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그들의 영혼은 회색빛 허무의 공간 속에서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롭게 흔들렸지만….
그들은 누구하나 주저하지 않고 용맹하게 회색빛 허무의 공간 속을 헤엄쳐 오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다들 어떻게 된 겁니까.”
《어떻게 되긴. 보면 모르겠나? 모두들 자네를 돕기 위해. 자신들의 육신까지 포기하면서 도우러 와준 것일세.》
낯익은 이들이 낯선 모습이 되어, 내 쪽을 향해 다가오는 광경에 당황하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강태백 특유의 노회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려왔다.
“…길드장님? 마, 말도 안 돼. 길드장님께선 분명 먼젓번에….”
《그래. 허무하게 전사하고 나서. 저 고약하기 짝이 없는 놈의 꼭두각시 장난감 신세가 되었었지. 하지만 얄궂게도 놈의 비겁한 수작질 덕분에 이렇게 ‘기회’를 얻었지 뭔가.》
히죽 웃으며 모습을 드러낸 강태백은 어째서인지 다른 이들과는 살짝 다른 모습이었다.
인과율과 연결된 회색빛 나무뿌리들이 그의 몸을 칭칭 휘감고 있었다.
회색빛 나무뿌리들이 완전히 강태백의 몸을 뒤덮은 탓에, 먼젓번보다 상태는 영 좋지 않아 보였지만.
어째서인지 그의 표정만큼은 그 여느 때보다 더 밝아 보였다.
…뭐지? 이번에도 나를 도발하기 위한 인과율의 수작인가?
《그때 심하게 데여서 그런지, 표정이 영 좋지 못하군. 그런 표정 짓지 말게. 이번엔 확실히 내 스스로의 의지대로 자네 옆에 서 있는 상태이니 말이야. 보게. 놈도 당황하고 있잖나.》
지난번의 사건으로 인해, 강태백에게 조심스럽게 경계의 빛을 내비치자.
이해한다는 듯 한숨을 내쉰 그는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거대한 근육질 괴한과 대치 중인 인과율을 가리켰다.
과연, 강태백의 말대로 이쪽을 바라보는 인과율의 얼굴엔 당황의 감정이 듬뿍 묻어나오고 있었다.
【뭐, 뭐냐! 어떻게 하찮은 버러지 놈들이 나의 구속을…, 크아아악!】
《하찮기는! 과학실 표본처럼 생긴 네 얼굴이 더 이상하게 생겼어! 지구본 크러셔!》
-빠가각!
빈틈을 보인 대가로 인과율의 머리가 김혜옥의 주먹과 만나 산산이 조각났다.
회색빛 주먹이 경악에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는 행성과 별들을 와르르 무너뜨렸다.
머리가 부서진 채, 무력하게 비틀거리는 인과율의 모습은 내게 있어 지극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혜옥이가 저렇게 강했나?”
《아닐세. 그녀가 강하다기보단. 그녀를 포함해, 여기 모인 영혼들은 현재, 놈에게 있어 일종의 신체 일부나 다름이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상태이기 때문일세. 말하자면 놈이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상정 외’의 존재가 되어버렸다고나 할까?》
강태백은 특유의 늙은 너구리와도 같은 노회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도 보았듯, 놈은 관객석에 박제해둔 이들의 영혼과 자신의 영혼을 연결해. 전투의 충격을 떠넘기지 않았던가. 놈에게 흡수된 덕에 내가 놈의 내부에서 ‘약간의’ 장난을 칠 수 있었지 뭔가.》
…설마. 인과율이 다른 이들과 영혼을 연결한 걸 역으로 이용했다는 건가?
상상도 못 했던 짓을 태연히 저지르셨군. 이 양반.
아무래도 강태백은 인과율의 몸속에서 인과율과 영혼들의 연결을 살짝 바꿔버린 모양이었다.
영혼과의 연결이 엉망이 되어버린 탓에, 김혜옥과 다른 영혼들은 인과율의 신체 일부나 마찬가지인 상태가 되어. 놈의 힘을 마음껏 끌어다 쓸 수 있는 상황인 듯했다.
《그리고…. 덤으로 충격을 전달하는 구조 역시, 약간의 손을 봐 두었다네. 놈이 우리에게 자신의 충격을 전달하는 것까진 바꾸지 못했지만. 우리의 충격도 놈에게 그대로 돌려주도록 바꿔두었지…. 세상에 공짜가 어딨겠나.》
“…그렇다면. 혜옥이는.”
《자신의 고통을 참아가며, 놈과 싸워가는 중이란 말일세. 아니…. 정확하게는 ‘우리’의 고통이지만.》
인과율의 몸이 부서져 나갈 때마다, 김혜옥과 다른 영혼들의 표정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쉬지않고 회색빛 신력이 깃든 주먹을 휘둘렀다.
《싸부님을 괴롭힌! 모두를 괴롭힌! 지구본 대가리잇!》
-쿠콰아아앙!
마치 신화 속의 괴물과도 같은 김혜옥의 포효 소리와 함께, 공간 전체가 우르릉 흔들렸다.
곧이어 조각조각 부서진 별의 파편들이 인과율의 몸에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놈에게서 비롯된 별과 행성의 빛무리가 앵두꽃처럼 덧없이 흩날리며 회색빛 허무를 적셨다.
부서진 빛무리가 흩날릴 때마다, 내 앞에 모인 영혼들의 얼굴도 고통 속에 일그러졌다.
“아, 아니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무슨 소리세요? 허무하게 그 관객석인가 뭔가 하는 공간에서 죽치고 있는 것보다야. 이렇게라도 한몫 거드는 게 훨씬 나은데.》
어느새 다가와 내게 다정하게 팔짱을 낀 이세영은 히죽 웃으며, 주변의 영혼들을 가리켰다.
《봐요. 다들…. 으윽! 고통을 공유하고 있지만. 아무도 싫은 소리 따윌 주어 섬기지 않잖아요? 이번만큼은 저희에게 맡기세요.》
“당신들에게 맡기라뇨. 이 싸움의 결판은 제가 어떻게든 내야….”
《에헤이. 또 혼자 짊어지려고 그러신다. 물론, 놈의 힘을 훔쳐 쓸 뿐인 저희가 마무리를 지을 수는 없겠죠. 그 대신. 이 정도는 해드릴 수 있어요.》
-후오오옹.
이세영의 손이 내 가슴팍에 닿자, 그녀의 몸에서 회색빛 신력이 피어올라 내 몸을 치유하기 시작했다.
《혜옥 양이 놈의 눈길을 끄는 동안. 얼른 회복해서 놈과의 결전을 직접 마무리 지으시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