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9화
“비겁한 자식….”
애초부터 인과율과의 전투는 ‘공정’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인과율이 ‘관객’으로 삼겠다 떠들었던 이들은 모두 놈의 일용할 간식이요, 인질이며, 싸움의 충격을 대신 떠맡는 액막이 신세로 영락해버린 상태였다.
【자네가 낙오한 버러지들의 안배에 따라, 그들의 힘을 이용하는 것처럼. 이 몸 역시, 그동안 빚어낸 피조물들을 유용하기 그지없는 도구로써 이용하는 것뿐일세. 뭐가 문제인가?】
비릿하게 웃은 인과율은 다시 한번 관객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놈의 손이 관객석에 박제된 이들을 가리킬 때마다, 희끄무레한 영혼이 우수수 뽑혀 나왔다.
순간적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이 인과율의 여흥을 채우기 위해, 허무하게 희생되었다.
《으악! 으아아아악!》
인과율의 손짓에 따라 뽑혀 나온 영혼들은 구슬픈 귀곡성을 토해내며, 놈에게 흡수되었다.
영혼들이 놈의 몸뚱어리로 흡수되자, 인과율의 몸을 구성하고 있던 부서진 행성들이 삽시간에 수복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많은 영혼을 희생시킨 인과율의 몸에선 또다시 암울한 절망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그것보다…. 안타깝게도 일전의 일격에 상당한 힘을 소모하지 않았나? 이번엔 이쪽에서 답례할 차례인데. 과연 자네가 내 정성 어린 ‘답례’를 받아낼 수 있을지나 모르겠어.】
나를 바라보는 인과율의 안광이 초승달 모양으로 비웃듯 휘어졌다.
그동안 입었던 부상과 소모한 신력을 완전히 회복한 모양인지, 놈의 몸짓에선 여유가 절로 묻어나오고 있었다.
【어디 보세. 전투의 피로에 찌든 몸 구석구석엔 상처가 가득하고…. 후들거리는 손에선 이제 신력이 아주 미약하게 느껴지는군. 이래서야. 굳이 ‘승부’를 계속해야 할 가치가 있겠나?】
…빌어먹을 자식이.
기본적으로 인과율은 전투에서 입은 충격의 일부를 다른 이들에게 계속해서 떠넘기고 있었고,
거기에 희생자들의 영혼을 흡수하여, 전투에서 소모한 신력과 체력을 보충하고 있었지만.
놈이 지껄인 것처럼, 애석하게도 내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아니, 단적으로 말해서 솔직히 절망적이었다.
몸에는 그동안 헤쳐온 전투의 상처와 피로들이 그대로 남아있었고.
조금 전의 공격에 신력을 상당히 소모하여, 이젠 남은 신력도 얼마 없는 상태였다.
“글쎄…. 어떨까? 그쪽이야말로 괜찮겠어? 그 같잖은 비밀이 이제 모조리 까발려진 마당인데.”
하지만 아무리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한들, 여기까지와서 간단히 포기할 수는 없었다.
현재 보유 중인 신력은 조금 전과 같은 공격을 딱 한 번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남아있었지만.
지금은 인과율의 숨겨진 비밀을 알아낸 상황이었기에, 기회만 잘 노린다면 충분히 놈을 쓰러뜨려 봄 직한 양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시 한번 속으로 전의를 다진 나는 반쯤 부서진 어둠달을 꽈악 움켜쥐었다.
【허세가 심하군. 하긴, 이제 자네에게 남은 것이라곤 그 알량한 허세를 제외하고 또 뭐가 있겠나.】
동요하지마…. 동요하지마! 지금 노려야 할 것은 오직 놈의 다리와 나무가 연결된 뿌리!
충격을 한점에 집중시켜, 나무와의 연결을 끊어낸다면 충분히 놈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어!
-파직! 파지지직!
창대가 반으로 뚝 부러진 어둠달이 광포하게 울부짖는 황금빛 전하를 머금었다.
황금빛 전하 속에서 먼젓번처럼 상반된 기운들이 끝없이 충돌하더니, 어둠달의 창날에 어마어마한 파괴의 힘을 부여했다.
-빠지직!
이미 원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이, 신화시대의 힘을 품은 운룡보가 펼쳐지자.
내 몸은 순식간에 한줄기 벼락이 되어, 인과율이 서 있는 방향을 향해 쏘아졌다.
주변의 풍경이 엉망으로 왜곡되었다가, 다시 멀끔하게 돌아온 그 순간!
나는 젖먹던 힘을 다해, 어둠달을 힘껏 내질렀다.
-피슛!
파천 복룡창이 품은 모든 무리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찌르기’의 개념이 한 곳으로 응축된 일격이 어둠달의 몸을 빌려 펼쳐졌다.
시간과 공간,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한 점으로 꿰뚫리며, 어둠달의 궤적을 따라 우주 전체가 한순간 나선형으로 비틀렸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던가? 이제부턴 ‘이쪽에서’ 가겠다고 말일세.】
놀랍게도 우주 전체를 비틀며 쏘아진 일격은 너무도 허무하게 가로막혔다.
어둠달을 모방하여 허무로 빚어낸 회색빛 창날로 가볍게 내 공격을 막아낸 인과율은 음험하게 웃으며, 온몸에서 암회색 허무의 구름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영광으로 삼게, 억겁의 세월 동안 내 진정한 권능과 마주한 것은 자네가 처음이니까.】
암회색 허무의 구름이 사방을 뒤덮자, 세상에서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렇게 빛이 사라져버린 세계에서, 곧이어 ‘소리’라는 개념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시커먼 어둠과 질식할 것 같은 정적으로 가득 찬 침묵의 세계에서, 오직 인과율의 비웃음이 암울하게 울려 퍼졌다.
【호사가들은 흔히 신은 전지하고 전능하다고 떠들어대지…. 애석하게도 이 몸은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않지만 말이야.】
빛과 소리가 사라진 어둠 속에서, 인과율 특유의 기척이 느껴지자.
나는 반사적으로 기척이 느껴진 곳을 향해, 어둠달을 내질렀다.
-피슛!
벼락처럼 어둠을 꿰뚫은 어둠달의 창날에서 묘한 손맛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어째선지 폐부가 완전히 박살 나는 듯한 고통이 가슴에서 느껴졌다.
【…하지만 이 권능을 통해, 그러한 개념을 비슷하게 흉내 낼 수는 있다네. 그래서 이 몸은 이걸 재미 삼아 『전지전능』이라 부르고 있지 뭔가.】
“아아아악!”
-푸화하학!
분명히 허공의 어둠을 꿰뚫었던 어둠달의 창날이 어째선지 내 가슴팍을 꿰뚫어버렸다.
파괴의 기운이 남아있는 어둠달이 내부를 파괴하자, 분수처럼 피가 솟구쳤다.
모든 것이 아득해질 것 같은 고통이 머릿속을 허옇게 물들였다.
머릿속을 허옇게 물들인 고통을 꾹꾹 억누르며, 남아있는 신력을 사용해. 상처를 재생하려 했지만….
-화르르륵!
“크아아아악!”
황금빛 신력 속에 일렁거리던 치유와 재생의 권능이 어째선지 상처를 재생시키긴커녕, 오히려 상처를 활활 불태우며 끔찍한 고통을 내게 선사해주었다.
【스스로의 공격에 꿰뚫린 감각이 어떤가? 치유와 재생의 권능이 오히려 자신의 몸을 파괴하는 기분은 또 어떻고? 안타깝게도 이 허무의 공간 속에서 세상의 모든 이치는 이 몸의 뜻대로 움직인다네. 이것이 바로 『전능』.】
…이 공간의 모든 것이 놈의 뜻대로 움직인다고?
【그렇지. 자네의 생각대로 이곳에선 모든 것들이 이 몸의 의지에 복종한다네. 거기에 더해 자네의 생각을 포함한 모든 이치를 꿰뚫어 보는 것이 바로. 이 『전지』라는 권능일세.】
거 참 빌어먹게도 사기적인 능력이로군….
자신의 힘에 취해 멋대로 뇌까리는 인과율의 오만한 음성이 어둠과 고요를 뚫고 머릿속을 웅웅 울려왔다.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놈의 오만한 웃음에 이를 까득 깨물며, 신력을 다시 끌어올리려던 찰나.
【또다시 저항하려는가? 애석하게도 그건 안 될 것 같네만. 피곤할 텐데 좀 쉬는게 어떤가?】
-푸스스스.
섭리를 마음대로 간섭한다는 인과율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내 몸에 퍼진 신력은 놈의 의지에 따라, 허무하게 허공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거대화되어, 태양처럼 찬란한 황금빛을 내뿜었던 외골격이 서서히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전신에 충만했던 신화시대의 힘이 잿불처럼 아련하게 스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온몸에서 신력이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순간적으로 끝없는 무저갱에 한없이 빠져드는 것과도 같은 강렬한 피로가 엄습해왔다.
“이, 이렇게 허무하게 당할 수는 없어!”
-콰드득!
엄습해오는 피로 때문에 당장이라도 기절해버릴 것 같았지만.
나는 혀를 꽈악 깨물어, 온몸에 역병처럼 퍼진 피로를 내쫓았다.
비릿한 피 맛과 강렬한 고통 덕분에 조금이나마 머릿속이 개운해졌다.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한 손아귀로 부서진 어둠달을 억지로 틀어쥔 나는 마지막 힘을 모조리 쥐어짠다는 심정으로 남아있는 신력을 박박 긁어모았다.
-파스스스.
【마침 자네가 내 수집품들을 박살 내준 덕분에 갑자기 빈 자리가 많이 생겼지 뭔가. 괜히 힘 빼지 말고 푹 쉬게. 한숨 푹 자고 나면 여러 가지 의미에서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을 거야.】
하지만 내 최후의 발악도 허무하게 무위로 돌아갔다.
음험하게 웃는 인과율이 가볍게 손짓한 순간, 내 몸에 남아있던 모든 신력이 사라져 버렸다.
곧이어 놈을 향한 적개심과 투쟁심, 분노 등등 격렬한 감정들이 머릿속에서 배제되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편하게 쉬고 싶다는 휴식의 욕구가 머릿속을 완전히 지배하기 시작했다.
“크, 크윽! 누, 누가 순순히 당해줄 줄 알고오…!”
【이 공간에서 『전능』의 권능을 이 정도까지 버텨 내다니, 참으로 놀랍군. 하지만 말일세…. 실은 자네가 여기까지 저항하는 것도 『전지』로 진즉 예측한 바였다네.】
회색으로 가득 찬 암울한 공간 속에서 인과율은 나를 바라보며, 음험하게 웃었다.
【『전지』가 예측한 미래에 따르면, 자네를 완전히 굴복시키는데 약 백여 년 정도 걸린다는군. 기대되지 않는가? 그 백여 년의 세월이 얼마나 유쾌하고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을지 말이야!】
-뿌드드득! 뿌득!
인과율의 입가에 가학적인 미소가 깃들자.
팔다리를 포함한 온몸의 뼈가 있을 수 없는 방향으로 우지직 꺾였다.
피가 혈관을 타고 거꾸로 역류하더니, 심장이 멋대로 멎었다가 뛰는 것을 반복했다.
근육과 피부가 엉망으로 뒤틀렸다. 몸의 오감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끄아아아아악! 사, 살려줘어어어! 제발!”
제멋대로 벌려진 입에서 제멋대로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지금까지 두 번의 인생을 살면서도, 단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았던 비굴한 애원도 흘러나왔다.
물론 내 의지가 아니라, 『전능』의 권능으로 내 몸을 멋대로 조종한 인과율의 소행이었다.
【자네는 이런 목소리로 애원하는군. 지금이야 이 몸이 좀 ‘도와’줬지만. 백여 년 후엔 자네가 자발적으로 이 몸에게 자비를 구걸하겠지. 나는 기꺼이 자네의 애원을 거절할 테고】
“지, 지X은…. 누, 누가 너 따위에게 굴복을…. 카학!”
어떻게든 저항하며, 기회를 노리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인과율의 가학적인 만행으로 몸뚱이는 반쯤 걸레짝이 되어버린 상태였고.
쥐꼬리만큼 남았던 신력은 아예 바닥을 드러낸 채, 내 의지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고작 이따위 비겁하게 사기적인 능력 따위에 패배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고통 속에서도 의식을 다잡고,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호오. 이런 상황에서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는 건가? 애석하게도 자네가 이 『전지전능』이 발동된 공간에 들어와 있는 이상. 자네에게 희망은 없네. 『전지전능』이 발동된 공간은 안쪽에선 무슨 수를 써서도 벗어날 수 없거든. 섭리 자체가 이 몸의 의지에 따르는데, 어떻게 내게서 벗어나겠는가?】
히죽 웃으며 내 앞에 쪼그려 앉은 인과율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물론, 누군가 ‘바깥에서’ 침입해 온다면 자네를 이곳에서 탈출시킬 수 있겠지만…. 잘 알잖는가. 자네와 연을 맺은 모든 이들은 관객석에서 이 몸의 장난감이 되어있다는 사실을 말일세.】
…거 X끼 갑자기 말 더럽게 많아졌네, 다 잡은 사냥감이라 이거냐?
인과율은 대단히 친절하게도 내가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놈이 찌걸인 대로, 나와 인과율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관객석에 산채로 박제되어있는 상황이었기에….
안타깝게도 나를 구하러 나타날 백마탄 초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마, 인과율도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에 조롱거리 삼아 내게 알려준 것이었겠지.
【왜 벌써 포기하는지 모르겠군. 혹시 아는가? 이 몸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네를 구하러 와 줄 필멸자가 한 명쯤은 있을지 말일세.】
오만하게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는 인과율의 얼굴엔 비웃음이 한가득 걸려있었다.
【뭐, 희망이란 놈이 있어야 자네도 조금 더 버티지 않겠나? 그럼, 다시 ‘즐거운’ 시간을 보내보세….】
-찌지지직!
그렇게 인과율이 다시 나를 고문하려던 찰나. 주변을 휘감은 회색빛 구름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회색빛 어둠이 음울하게 가득했던 공간에 한 줄기 빛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거기까지! 싸부님에겐 이제부터 손가락 하나 못 댈 거다! 이 못생긴 지구본 대가리 놈아!》
어째선지 어둠을 밝히는 한 줄기 빛 속에서 귀에 익숙한 괴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뭔가 크고 듬직한 것이 나와 인과율 사이를 가로막았다.
“…혜옥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