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8화
“…지루하니 재미있게 해달라고? 그런 것치곤 그쪽도 멀쩡하진 않아 보이는데 말이야.”
인과율의 능글맞은 목소리에 허옇게 이를 드러내고 이죽거리는 것으로 답했지만.
애석하게도 놈의 목소리가 시종일관 여유를 잃지 않은 것을 온몸으로 증명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계속된 공방 속에서 인과율은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뭐, 어쩌면 자네 말대로 멀쩡하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군. 실은 슬슬 자네에게 흥미를 잃어가던 참이었으니….】
거칠게 타오르는 태양과 차갑게 얼어붙은 달로 만들어진 두 눈이 비웃듯 묘하게 휘어졌다.
서서히 몸에 두른 황금빛 신력이 희미해져 가는 나와는 달리, 인과율의 몸에 불길하게 일렁거리는 회색빛 허무의 신력은 아직도 강렬하기 짝이 없는 특유의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고.
수많은 행성과 별들의 무리로 이뤄진 몸뚱이에선 여전히 끝을 알 수 없는 아득한 절망이 시커먼 안개처럼 음험하게 어룽거리고 있었다.
여유를 잃지 않은 인과율의 모습으로 미뤄보건대 계속 힘을 소모해가는 나와는 달리, 아무래도 놈은 아직도 자신의 진정한 힘과 권능을 꺼내지도 않은 듯한 모양이었다.
【괜찮으니. 자네가 준비해 온 수를 다 꺼내보란 말일세. 언제까지 이렇게 ‘단순한’ 방법으로 이 몸을 공략하려는 건가. 자네의 수준에 맞춰, 적절히 대응해주는 것도 이젠 슬슬 지루해지려는 차거든.】
오만하게 뇌까리는 인과율의 말처럼, 놈은 그동안 나와의 공방에서 철저히 나의 공격을 똑같이 모사하여 대응해왔다.
그 어떤 성좌의 힘과 권능을 빌어, 놈에게 공격을 시도해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마치 나를 조롱하기라도 하듯, 아니면 모든 만물을 빚어낸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계속해서 인과율은 나와 정확하게 똑같은 힘과 똑같은 방식으로 맞받아쳐 왔다.
…빌어먹을. 이쪽의 공격이 아예 통하질 않으니.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모르겠어.
능글맞은 미소를 띤 채, 이쪽을 바라보는 인과율과 시선을 마주하자.
가슴 한편이 선득해지며, 억눌러왔던 어둡고 암울한 절망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 역병처럼 머릿속을 장악해가는 어두운 감정을 애써 털어낸 나는 까득 어금니를 깨물며 어둠달을 힘껏 틀어쥐었다.
-쿠드득! 쿠드드득!
황금빛 신력이 거대화된 외골격으로 다시 한번 퍼져나가자.
라크슈마를 비롯한 다양한 성좌들의 힘과 권능이 외골격을 조금씩 변이시키기 시작했다.
무언가 단단한 것이 힘껏 비틀리는 소리와 함께, 나의 등 뒤에서 외골격으로 이뤄진 금빛 손이 수십 개 돋아났다.
그렇게 돋아난 금빛 손들에서 다양한 낙오자들의 힘과 권능을 품은 무기들이 연꽃처럼 후두둑 돋아났다.
“내 공격이 단순하다고? 지루하다고? 천만에!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쿠오오오오!
수십 개의 손에 들린 수십 개의 무기가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창조와 파괴 등 다양한 속성의 기운을 동시에 머금었다.
거대화된 내 육신에 순간적으로 응집된 압도적인 힘으로 인해, 광활한 콜로세움을 넘어, 차원 전체가 엉망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내게 응집된 압도적인 파괴의 힘으로 인해, 시간과 공간, 원인과 결과 등 만물의 섭리가 그것의 고유한 의미를 잃고 엉망으로 부서져 갔다.
“하늘을 깨부수고 모든 것을 멸하는 압도적인 힘 앞에서, 만물의 섭리 따위는 산산이 부서져 그 의미를 잃을지니!”
고조될 대로 고조된 그 절정의 순간!
나는 인과율을 향해, 수십 개의 무기를 동시에 휘둘렀다.
“파천 복룡창 제 영식! 파천!”
-파차차창!
응집된 파괴의 힘을 이기지 못한 수십 개의 무기와 수십 개의 금빛 팔이 빛으로 화했다.
만물의 섭리 따윈 깡그리 무시한 채, 오로지 파괴 그 자체만을 위한 폭력적인 힘이 콜로세움 전체를, 아니 이 아득히 광활한 우주 전체를 새하얀 순백의 색으로 물들였다.
-…!
소리마저 파괴해버린 파멸의 힘으로 인해, 순식간에 우주에 정적이 찾아왔다.
말 그대로 하늘이 부서지며, 아득한 우주 전체에 반짝이던 별들이 일순간 빛을 잃었다.
곧이어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별들이 빛으로 승화한 채, 허무하게 흩날렸다.
인과율의 힘과 권능이 고스란히 깃든 콜로세움마저 파괴의 힘을 이기지 못해, 광활한 바닥 전체가 빛이 되어 흩어져 갔다.
그리고 그 파괴의 순간에서 인과율은….
【호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상반된 개념을 충돌시켜, 압도적인 파괴력을 빚어내는 기술이라…. 이번만큼은 인정해 주겠네. 꽤 재미있었거든.】
…멀쩡했다.
비록 육신을 구성하는 행성과 별들의 무리가 절반이나 소멸하긴 했지만.
모든 것이 빛으로 변해 흩날리는 파괴와 소멸의 한복판에서 인과율은 너무도 여유로운 표정으로 여전히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반밖에 남지 않았던 행성과 별의 육신 또한 빠른 속도로 재생되고 있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건가? 자부심을 느껴도 좋네. 억겁의 세월 동안 이 몸에게 도전했었던 수많은 떨거지 중에 재생이 필요할 만큼의 타격은 입힌 것은 자네가 처음이거든】
히죽거리며 능글맞게 뇌까린 인과율은 한쪽만 남은 팔을 슬쩍 들어 올렸다.
놈의 팔에서 회색빛 허무에 휩싸인 행성과 별들이 불길한 빛을 토해내자.
시간째로 얼어붙은 채, 관객석에 박제되어 있었던 이들로부터 무언가 희끄무레한 것이 빨려 나오기 시작했다.
끝없이 요동치며 괴로운 귀곡성을 토해내는, 그 희끄무레한 것들의 정체는 바로….
다름 아닌 그들의 영혼이었다.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모두를 ‘관객’으로 대우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아아. 그랬었지. 하지만 자네와의 여흥을 즐기다 보니. 문득 입이 심심해져서 말이야. 그저 막간에 가볍게 간식을 좀 즐기는 것뿐이니. 너무 각박하게 굴지는 말게나.】
수천, 아니 어쩌면 수만에 이를지도 모르는 무고한 이들의 영혼조차, 인과율이라는 놈에겐 그저 ‘가벼운’ 간식거리로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게걸스럽게 수많은 이의 영혼을 먹어치운 놈은 마치 나를 조롱하기라도 하듯, 입가를 짓궂게 뒤틀어, 퇴폐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이 빚어낸 피조물들을 한낱 간식 따위로 치부하다니. 미쳐도 완전히 미친 모양이야.”
【피조물이라니. 그저 이 몸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빚어낸 버러지들에 불과한 존재들일세.】
“미X놈.”
게걸스럽게 영혼을 흡수한 채, 뻔뻔하게 떠들어대는 인과율의 빌어먹을 모습에서, 나는 형용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어, 순간적으로 용암처럼 솟구친 분노를 다스린 나는 다시 조금씩 차오른 신력을 몸에 두르기 시작했다.
-파츠츠츠.
내 영혼에 박힌 낙오자들의 별자리가 나를 응원해주듯 찬란하게 빛나며, 힘을 계속해서 불어넣어주었다.
그들이 살아온 한과 업의 무게가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며, 신력이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구쳐 올랐다.
그렇게 어느정도 소모한 신력을 보충하는데 성공했지만….
【진즉 낙오해버린 버러지들이 자네에게 상당히 많은 것을 안배해 준 모양이로군. 필멸의 굴레조차 벗지 못한 몸으로 그만한 양의 신력을 보유하다니. 아주 놀라운 일이야.】
여유롭게 느물거리는 인과율은 놀랍게도 처음 대적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불길하게 꿈틀거리는 회색빛 신력이 별과 행성으로 이뤄진 육신 위에서 깜빡깜빡 점멸했다.
수많은 공격을 그대로 받아낸 놈의 신력은 전혀 줄어있지 않았다.
막후에서 세상의 질서를 지배해온 절대자답게, 보유한 신력도 차원이 다른 건가?
빌어먹을, 계속해서 소모전으로 간다면 나만 불리해 질 텐데.
[…참으로 빌어먹게 교활한 놈이 아닐 수 없군. 애송아. 안타깝게도 네놈은 이미 놈이 파둔 덫에 걸려든 모양이다.]
그렇게 건재한 모습의 인과율을 노려보며, 머릿속으로 새로운 전략을 짜내려던 찰나.
갑자기 위철용 특유의 냉소가 듬뿍 담긴 목소리가 머릿속을 웅웅 울려왔다.
‘덫에 걸려들었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 원숭이가 남긴 눈엔 진실을 꿰뚫어 보는 힘이 있지 않았더냐. 화안금정에 신력을 집중해. 놈의 몸을 자세히 살펴보거라.]
위철용의 뜬금없는 조언에 머릿속에 의문부호가 떠올랐지만.
그가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쓸데없이 흰소리할 성격이 아닌 것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나는 순순히 위철용의 말대로 눈에 깃든 화안금정에 황금빛 신력을 불어넣었다.
“…염X. 이따위 수작질을 해놓고 공정성 어쩌고를 지껄였어?”
신력이 주입된 화안금정이 진정한 힘을 해방하자.
콜로세움 전체를 뒤덮고 있었던 거짓된 환영의 안개가 스르륵 사라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인과율이 이곳에 무슨 짓을 해놨는지, 뒤늦게 눈치챈 나는 나직이 욕설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보이느냐? 놈이 이곳에 무슨 짓을 해놨는지?]
환영이 걷힌 콜로세움은 마치 거대한 나무와도 같았다.
오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인과율에게서 뻗어 나온 굵직한 뿌리들이 콜로세움 전체를 뒤덮고 있었고.
구불구불하게 얽힌 뿌리들은 하나같이 관객석에 갇혀있는 이들과 굳건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동안 네놈이 어떤 공격을 하든. 놈은 자신과 연결된 ‘관객’들에게 충격을 떠넘겨, 피해를 막아왔던 것이야. 그러니 네놈이 얼마나 파괴적인 공격을 하든 놈에겐 아무런 타격이 없었던 게지.]
그랬다.
그동안 인과율이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줬던 비결은 바로, 관객석의 ‘관객’들에게 있었다.
위철용의 말처럼, 간교하게도 놈은 자신과 뿌리로 연결된 관객들에게 피해를 떠넘기는 식으로 나의 공격을 모조리 손쉽게 넘겨온 것이었다.
파천 복룡창 궁극의 초식, 『파천』의 위력이 너무나 대단했기에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놈은 조금 전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적지 않은 숫자의 성좌를 희생해버린 상태였다.
물론, 그러고도 충격을 전부 떠넘기지 못해.
나를 도발하는 척, 관객석의 영혼들을 흡수해. 몸을 재생시킨 것이겠지만.
【자네 표정이 왜 그러나? 호오…. 놀랍게도 이곳에 얽힌 ‘비밀’을 눈치챈 모양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