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7화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싸부님과 적대하는 놈에겐 자비란 없-다!”
혼란 속에서, 나와 대치하고 있는 인과율의 기괴한 모습을 발견하자.
본능적으로 상대를 직감한 김혜옥의 눈에서 회색빛 광채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우람한 그녀의 근육이 회색빛 신력을 머금고 더욱 크게 자라났다.
싸움을 앞둔 수탉처럼 잔뜩 흥분한 김혜옥은 그렇게 제 앞에 걸리적거리는 장애물들을 모조리 때려 부수며, 인과율을 향해 폭풍처럼 달려들었다.
【물론, 흥분한 관객들이 무대에 난입하는 사태가 벌어져선 아니 되겠지. 관객들은 관객의 의무에 충실해야 하는 법일세.】
김혜옥의 솥뚜껑만 한 주먹이 인과율의 얼굴을 막 분쇄하려던 그 순간.
비릿하게 이죽거린 인과율은, 손가락으로 김혜옥의 주먹을 가볍게 막아내었다.
곧이어 놈의 입에서 ‘관객’이라는 말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회색빛 허무의 구름에 집어 삼켜진 그녀의 시간이 통째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쩌적! 쩌저저적!
인과율에게서 뻗어 나간 회색빛 허무의 기운은 삽시간에 전장, 아니 세상 전체를 집어삼켰다.
전쟁의 광기와 혼란이 불꽃처럼 이글거리던 전장에 서늘한 정적이 찾아왔다.
무기를 휘두르며, 희생자들을 찾아다니던 마족들도.
마족들에게 분연히 맞서며, 끝까지 항전하던 헌터들도
마족들과 헌터들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도륙하며, 자신의 오만을 내세우던 성좌들도.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움직임을 뚝 멎었다.
서늘한 정적에 잠겨버린 전장 속에서 인과율은 해와 달로 이뤄진 눈을 능글맞게 빛내며, 움직임을 멈춰버린 이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쿠르르르릉!
천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세상 전체가 인과율의 의지에 따라 변화하기 시작했다.
위태롭게 흔들거리는 대지에서 새하얀 순백이 대리석이 연속해서 솟구쳤다.
시커먼 먹구름이 으르렁거리던 하늘에 시커먼 금이 쩍쩍 가더니, 하늘 전체가 무너졌다.
요란하게 파도가 요동치던 바다가 급격하게 메말라가며, 무저갱과도 같은 바닥을 드러냈다.
【어떤가? 계승식을 나눌만한 장소치곤 제법 볼만하지 않은가?】
[…세상에.]
인과율의 의지에 따라.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살던 지구 전체가, 아니 태양계 전체가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는 고대 콜로세움의 형태로 변형되었다.
태양계 전체가 변형된 콜로세움은 일개 필멸자로서는 감히 그 크기를 완전히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거대했지만, 필멸의 인지 영역 따윈 진작에 뛰어넘은 나는 그 정신 나간 크기를 온전히 체감할 수 있었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로군. 태양계 전체를 경기장으로 개조한 것도 모자라. 성좌들마저 관객석에 집어 넣어두다니….”
【승부 결과에 따라, 그들의 운명 또한 갈릴 테니. 저 버러지들에게도 운명의 순간을 목도 할 수 있는 기회 정도는 줘야 공평하지 않겠는가? 관대한 이 몸 나름의 자비일세.】
압도적인 스케일을 자랑하며, 끝없이 펼쳐진 관객석엔 얼어붙은 시간 속에 갇혀버린 이들이 인과율의 말 그대로 ‘관객’처럼 앉아 있었고.
저 멀리 우주에서 하계를 관음하던 성좌들의 본체마저, 인과율의 의지에 따라 다른 이들과 비슷한 신세가 된 채로 관객석에 붙들려 있었다.
너무나도 초현실적인 광경에 잠시 신음한 나는 까득 이를 깨물며, 어둠달을 힘껏 틀어쥐었다.
“그래…. 모든 이들의 운명은 그쪽과 나의 단판 승부로 결정되겠지. 당연히! 이쪽도 순순히 져 줄 생각은 없어!”
전의를 다진 것과 동시에, 폭풍과도 같은 포효를 내지르자.
내 영혼에 박힌 수없이 많은 별자리가 휘황하게 빛나며, 내게 저마다의 힘과 권능을 동시에 불어 넣어주었다.
『화신강림』의 효과로 인해, 빛의 화신과도 같이 거대하게 변해버린 육신이 수많은 이들의 권능을 품고 압도적인 파괴의 힘을 머금었다.
-콰르르르릉!
응축될 대로 응축된 파괴의 힘은 천둥과 번개의 형태로 세상에 강림했다.
거대해진 내 몸에 걸맞게,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는 어둠달이 세상을 부욱 찢어발겼다.
휘몰아치는 천둥과 번개의 폭풍 속에서 시간과 공간이 엉망으로 조각나 부서졌다.
【하찮은 버러지들의 힘을 좀 모았다고 해서. 진지하게 이 몸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건가? 흥미롭군.】
-꽈직! 꽈지지직!
입꼬리를 사납게 뒤튼 인과율이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놈이 손을 휘두른 궤적대로 허공이 그대로 찢어지더니, 그 틈에서 블랙홀이 생성되었다.
-쭈와아아악!
그렇게 갑자기 생겨난 블랙홀은 게걸스럽게 입을 쩌억 벌려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시간과 공간을 거칠게 갈라 찢으며, 인과율을 향해 쇄도했던 내 일격은 삽시간에 시커먼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허무하게 소멸해버렸다.
“당연히 아니지! 설마 그렇게 안일하게 그쪽을 상대하려 했을까!”
-후와아아앙!
하지만 나의 진정한 노림 수는 따로 있었다.
호기롭게 포효를 토해낸 나는 거대화한 두 팔을 휘둘러, 그대로 양손으로 별들을 움켜쥐었다.
내 손에 붙잡힌 시커먼 암석의 결정들이 황금빛 신력을 머금고, 태양처럼 강렬한 열과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흡!”
그렇게 작은 태양들을 움켜쥔 나는 오만하게 웃는 인과율을 향해, 힘껏 양팔을 교차했다.
-콰아앙! 콰아아앙!
약식 암룡출동과 광룡광림의 장점만을 파괴적으로 뒤섞은 유성우가 콜로세움을 강타했다.
엄청난 열기를 머금은 작은 태양들이 운석처럼 콜로세움 전역에 떨어져 내렸다.
폭음과 함께, 열기와 먼지의 파도가 쉴 새 없이 콜로세움 전체를 거칠게 두드렸다.
-피슛! 피슛! 피슈슈슛!
그렇게 별들을 집어던진 것과 동시에 나는 다음 공격을 이어나갔다.
파천 복룡창을 신화적으로 재해석한 움직임이 허공을 화려하게 수놓자.
파괴 그 자체의 기운을 머금은 어둠달에서 수없이 많은 용들의 무리가 솟구쳤다.
-콰우우우!
황금빛 파괴의 기운을 머금은 수억, 수조 마리의 용들은 저마다 난폭하게 포효하며, 열기와 먼지의 폭풍을 뚫고 인과율을 향해 날아들었다.
【요란해 보이지만. 그다지 실속이 없군. 안타깝게도 자네의 공격은 필멸의 영역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네. 이런 건…. 그저 미숙한 풋내기의 장난질 수준이야!】
-피슛! 피슛! 피슈슈슛!
…뭐?
비웃음을 흘리며, 허공에서 갑자기 어둠달과 유사한 창을 만들어낸 인과율은, 놀랍게도 나의 움직임을 그대로 똑같이 모방했다.
회색빛 허무가 일렁거리는 창날에서 나와 정확히 똑같은 숫자의 회색빛 용이 솟구쳤다.
-콰드드득!
회색빛 허무의 기운을 품은 용과 황금빛 신력을 품은 용이 맞부딪히자.
먼지와 열기의 폭풍을 뚫고 격돌한 두 종류의 용들은 너무도 허무하게 소멸해버렸다.
【점잖지 못하게 흙먼지 따위나 피워대는 공격도 그리 효과적이지 못했지.】
-슈르르륵!
수억, 수조 마리의 용과 같은 수의 용이 만나 소멸해버린 곳에서 어마어마한 숫자의 블랙홀들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인과율의 비릿한 목소리와 함께 등장한 블랙홀들은, 콜로세움을 가득 채웠던 먼지와 열기의 폭풍을 그대로 멀끔하게 집어삼켜 버렸다.
【이 몸의 분신 따위를 상대했을 때와 같은 수준으로 싸워서야…. 자네에게 승리가 돌아갈 일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네.】
그렇게 재빨리 돌격하여 인과율의 육신을 후려친 순간. 머릿속으로 비웃음 가득한 사념파가 침투해왔다.
곧이어 느릿하게 휘몰아치는 회색빛 구름이 내 육신을 노리고 사방에서 덮쳐오기 시작했다.
-후웅! 후웅! 후웅!
솟구치는 회색빛 구름에 대항하며, 나는 어둠달을 아래쪽으로 재빠르게 휘둘렀다.
파천 복룡창의 첫 번째 초식에 따라 유려하게 움직인 어둠달이 허공을 찢어발기자.
쉴새 없이 소용돌이치는 황금빛 신력에 휘감긴 창날이 수천, 수만 마리의 용을 빚어냈다.
-꽈직! 꽈지지직!
회색빛 공간을 온통 금빛으로 물들인 용들의 파도가 회색빛 구름들을 덥석 베어 물었다.
두 개의 거대한 기운이 충돌하자, 시간이 파편화되어 부서졌다. 공간이 우르르 무너졌다.
내 목숨을 노리며 날아든 회색빛 구름은 그렇게 일시적으로나마, 황금빛 용들의 무리와 대치를 이루었다.
-쿠르르르르!
두 개의 기운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동안, 나는 다음 수를 준비했다.
황금빛 외골격에서 풀려나온 황금빛 신력이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 하늘 높이 솟구쳤다.
다양한 성좌들의 권능을 품고 솟구친 신력은 허무의 공간을 붉게 물들이며, 거대한 태양이 되었다.
-파차차차창!
그렇게 파천복룡창의 다섯 번째 초식. 광룡광림이 수많은 성좌들의 힘을 품고 펼쳐지자.
타오르는 태양 속에서 증폭된 신력이 화염과 번개를 머금고 인과율을 향해 내리꽂혔다.
【너와 함께 회귀한 그 버러지의 재주가 내게 먹힐 거라, 생각 한 건가? 우습군.】
회색빛 신력의 파도가 모조리 불타 사라지자, 머릿속에 인과율의 사념이 또 들려왔다.
하지만 난 놈의 헛소리에 신경조차 쓰지 않고 외골격에 신력을 두른 채, 인과율의 사념이 들려온 곳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꾸과아아앙!
황금빛 신력과 외골격에 휘감긴 주먹이 인과율의 면상에 정통으로 파고들었다.
폭발하듯 요동치는 신력이 무서운 위력을 발휘했다. 신력과 신력이 만나 굉음을 빚어냈다.
“…먹혔는데?”【….】
내 목소리에서 비웃음이 감돌자, 인과율은 뭐라 대꾸하려 들었지만.
애석하게도 놈의 입에선 그 어떠한 말도 흘러나오지 못했다.
별과 어둠으로 빚어진 입이 쩍 벌어진 순간, 황금빛 주먹이 놈의 주둥이 속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투쾅! 투쾅! 투쾅!
황금빛 외골격과 타오르는 신력에 휘감긴 주먹으로 인과율의 얼굴을 연속해서 가격하자.
마치 대장간에서 망치로 금속을 후려치는 듯한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놈의 얼굴을 이루고 있는 별들이 비참하게 으스러지더니, 허무하게 흩날리기 시작했다.
【얼굴만을 집요하게 후두려 패다니. 아직 필멸의 상식에 갇혀있는 모양이로군. 한계에서 벗어나 보게. 상상력을 좀 더 발휘해 보란 말일세.】
하지만 인과율의 얼굴을 이루던 별들이 모조리 으스러졌음에도 불구.
별과 어둠이 으스러진 자리에선 계속해서 비웃음에 가득 찬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어떠한 타격도 입지 않은 모양인지. 놈의 목소리엔 여전히 여유가 가득했다.
【필멸의 한계에서 벗어나 보게. 그래야 이 몸이 좀 더 ‘재미’를 느끼지 않겠는가.】
-파츠츠츠.
으스러져 흩날린 별들이 어둠 속에서 재생 되었다.
어둠에 휘감긴 별들은 저들끼리 제멋대로 얽히며, 인과율의 얼굴을 빚어냈다.
완전히 상처를 재생해 낸 놈은 기대와 흥미가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