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6화
-피슛!
황금빛 광채에 휘감긴 창날이 회색빛 구름을 비스듬하게 베어냈다.
특유의 비릿한 비웃음을 짓고 있던 인과율의 얼굴에 시커먼 선이 그어졌다.
-푸화하하학!
반으로 잘려나간 얼굴이 스르륵 미끄러지자, 단면에서 회색을 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꼿꼿하게 서 있던 무릎이 휘청 꺾이며, 회색빛 구름에 휘감긴 육신이 허무하게 쓰러졌다.
지독하게 비릿한 피 냄새가 허무만이 가득한 공간을 서서히 잠식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대로 끝났을 리는…. 없겠지?]
“당연하죠. 어차피 이건 놈이 여흥을 위해 만들어 낸 분신에 불과하니까요.”
…그런 것 치곤 소름 돋게 강했지만.
바닥에 널브러진 채, 간헐적으로 경련하는 고깃덩어리는, 어디까지나 인과율이 나의 요청에 따라 ‘여흥으로’ 만들어 낸 분신에 불과했다.
아직 본격적인 전투는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한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어둠달을 더욱 힘껏 틀어쥐었다.
【역시 보통이 아니군. 보통은 찰나의 승리에 취해,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데 말이야.】
회색빛 허무만으로 가득 찬 공간에 별안간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사방을 휘감은 회색빛 구름이 조금씩 조금씩 걷혀가기 시작했다.
회색빛 구름이 걷힐 때마다, 그곳에 박혀있는 인간들의 영혼이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고오오오.
처절하게 울려 퍼진 고통 어린 비명 속에서 공간 전체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회색빛 구름이 완전히 걷히자, 시커먼 어둠이 가득한 우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천장도 바닥도 없이, 무한하게 광활한 우주 속엔 수없이 많은 별자리가 모래알처럼 알알이 박혀있었다.
【이 몸의 진정한 모습을 목도하고 공포에 떨어라! 어리석은 필멸자여! …같은 진부한 말은 지껄이지 않겠네. 피차 그런 낯뜨거운 대화를 나눌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이, 이것이 세상의 섭리를 뒤에서 조율하던 존재의 진정한 정체….]
“…미친.”
시커먼 우주 속에서 감히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존재가 턱을 괸 채, 나른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하 그 자체를 인간의 형상으로 빚어진 듯 거대한 빛의 육신.
놈의 눈은 이글거리는 태양과 가물거리는 달로 이뤄져 있었고.
느릿하게 움직이는 손은 이름 모를 행성과 부서진 별들의 무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시커먼 우주 전체를 오만하게 굽어보며, 손가락을 까딱이는 인과율의 모습에선.
튜토리얼 타워에서 만났던 성좌의 화신체와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위용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오게. 도전자여. 와서 내게 자네의 진정한 가치를 증명해보게나.】
-우오오오오.
나른하게 웃은 인과율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자.
단지 그것만으로 시커먼 우주 전체가 엉망으로 왜곡되며 찌그러들기 시작했다.
이름모를 별들이 구슬픈 비명을 내지르며, 허무하게 분쇄되었다.
흐릿한 빛을 처연하게 내뿜던 행성들이 산산이 부서지며, 잿빛 파편들을 휘날렸다.
…고작. 몸을 일으킨 것만으로도 이 정도 압박이라니.
이것이 바로, 막후에서 세상의 섭리를 멋대로 조율해온 존재의 진정한 위엄인가?
“후우우우….”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자세를 잡는 인과율의 모습에.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서서히 신력을 온몸으로 퍼뜨리기 시작했다.
-까득! 까득! 까득!
황금빛 신력이 외골격으로 파고들자. 기이한 소리와 함께, 황금빛으로 물든 외골격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한때, 강태백의 영혼에 깃들었던 성좌. ‘아그니’의 진정한 힘을 내 외골격을 통해 개방시켰다.
“…화신강림. 내영성래!”
-파아아아앗!
내 입에서 나직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온 순간.
아그니의 힘을 품고 부르르 떨리던 외골격이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시커먼 암흑의 공간 속에서 부서진 황금빛 외골격이 씨실과 날실처럼 계속해서 얽히며, 거대한 형상을 이루었다.
-구오오오오.
빛과 열이 빚어낸 형상이 시커먼 우주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내 모든 감각이 거대화된 외골격과 동화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외골격과 동화하여 감각을 공유하자, 불멸의 영역조차 가뿐히 뛰어넘은 감각이 무한대로 확장되었다.
곧이어 내가 우주 그 자체가 된 듯한 압도적인 고양감이 찾아왔다.
【호오…. 화신강림이라니. 하찮은 버러지의 재주를 그런 식으로 활용하는가?】
빛의 화신 그 자체가 되어버린 내 모습에 인과율의 두 눈이 이채를 머금었다.
무의 공간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시커먼 우주 전체가 부르르 떨었다.
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갑자기 멈췄다가 흐르는 것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놈이 가볍게 웃은 것만으로도 자그마한 별과 거대한 행성들이 우수수 부서져 나갔다.
【하지만 덩치가 좀 커졌다고 이 몸의 ‘격’에 어울리는 존재라곤 할 수 없는 것 이난가?】
“글쎄. 과연 그럴까?!”
타오르는 빛, 불타는 태양 그 자체가 된 나는 거대화된 어둠달을 그대로 휘둘렀다.
불길과 빛으로 벼려진 어둠달이 지면을 통째로 불태우며, 인과율을 향해 쇄도해갔다.
어둠달에서 뿜어진 황금빛 광채가 어둑해진 세상을 순간적으로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과연. 그 버러지보단 훨씬 쓸만하군.】
비릿한 비웃음이 떠오른 별과 어둠의 얼굴에 일순간 이채가 떠올랐다.
손을 휘저어 혼탁한 어둠으로 이뤄진 창을 빚어낸 인과율은 어둠달을 향해, 그대로 어둠으로 빚어낸 창을 휘둘렀다.
-쿠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빛과 어둠이 충돌했다.
세상의 종말이 지척으로 다가오기라도 한 듯, 대지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쩌저적 갈라진 대지의 틈새 사이로 새빨간 마그마가 핏물처럼 울컥울컥 치솟았다.
【역시, 이 몸이 직접 나서기에 걸맞는 인재로다. 힘과 힘이 부딪히는 호쾌한 싸움을 해본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군.】
-까드드득!
이 세상을 개판으로 만든 장본인이 나를 바라보며, 오만하게 웃자.
먼젓번처럼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내게 한과 업을 맡긴 낙오자들의 한맺힌 기억!
뭣 같은 세상에서 꾸역꾸역 살아왔던 밑바닥 시절의 분노!
무기력한 분노 속에서 소중한 사람들을 떠나보냈던 절망!
그 모든 것이 농축된 격렬한 분노가 활화산처럼 타올라, 내 영혼을 불태웠다.
곧이어 내 영혼에 각인된 황금빛 신력이 내 분노에 감응해, 격렬하게 들끓어 올랐다.
거대화된 황금빛 외골격을 휘감은 신력이 폭풍처럼 울부짖었다.
【지난번에 내가 지적하지 않았나. ‘감정’ 따위에 휩쓸려서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말일세.】
“멋대로 지껄이지 마라! 이 오만한 쓰레기 자식!”
-콰드드득!
분노와 신력에 완전히 잠식되어 황금빛으로 물든 어둠달이 무의 공간을 반으로 쪼갰다.
수백, 수천, 수만 배나 커진 금빛 창날이 별과 어둠으로 이뤄진 육신을 단숨에 꿰뚫었다.
인과율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별들이 순식간에 폭죽처럼 연달아 펑펑 터져나갔다.
별들 사이를 휘감은 끈끈한 어둠이 금빛 섬광에 잡아먹혀, 허무하게 흩어져나갔다.
【흐응…. 하찮은 버러지들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한 소체지만. 그래도 내 ‘본신’에 이만한 타격을 입히다니. 아주…. 아주 흥미로워….】
별과 어둠으로 구성된 몸이 단숨에 반토막이 났음에도 불구.
흥미진진한 목소리로 뇌까리는 인과율은 그다지 타격을 입은 듯한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지금의 상황을 진심으로 기꺼워하는 듯한 눈치였다.
【그동안 내 뒤를 이을 ‘후계자’랍시고 나타났던 얼간이들은 하나 같이 영 시원치 않은 놈들이라. 내 흥미를 채워주기도 전에 알아서 도태되었다만…. 어쩌면 네놈은 약간이나마 내 억겁의 지루함을 달래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혼자서 쉴새없이 혼잣말을 지껄인 인과율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별과 어둠으로 구성된 육신 속에서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안광이 내 쪽을 향했다.
휘황하게 타오른 안광과 마주한 순간, 어째선지 내 영혼을 활활 불태우던 분노가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그대신 마치 몬스터와 처음 마주했을 때와 같은 압도적인 공포가 내 영혼을 조금씩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지루함을 달랜다고? 천만에! 이번에야말로 네놈의 역겨운 통치를 끝내주지!”
영혼을 갉아먹는 공포와 뇌로 침투해오는 두려움이 등골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뻣뻣하게 얼어붙는 주먹을 꽉 틀어쥔 나는, 애써 태연한 척 호기롭게 인과율에게 포효를 내질렀다.
【귀엽군. 아주 귀여워…. 역시, 네놈은 좋은 여흥이 될 수 있겠군.】
별과 어둠으로 이뤄진 얼굴이 피식 비웃음을 토해내자.
반 밖에 남지 않은 인과율의 육신이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무의 공간을 가득 채웠던 압도적인 존재감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우선은 자리를 옮기지. 명색이 계승식인데. 이렇게 무식한 방법으로 싸워서야 되겠는가?】
“뭐라고? 그건 또 무슨….”
【서로 품위를 좀 지켜보잔 말일세.】
알 수 없는 소리를 연달아 뇌까린 인과율을 비릿한 미소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별과 어둠으로 이뤄진 육신이 저절로 분해되더니, 시커먼 우주가 또다른 풍경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싸, 싸부님?”
“용호…? 싸움이 끝난 건가?”
“사, 산군님?! 크, 큰일 났습니다! 기, 길드장님께서….”
세상의 풍경이 휙 바뀐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웅웅 울리는 귓가엔 수없이 많은 낯익은 목소리들이 정신없이 파고들었다.
“이건 도대체….”
【명색이 ‘계승식’일세. 이렇게 재미난 의식에 관객이 없어서야 쓰나.】
전장 한가운데로 나를 인도한 인과율은 어느새 인간과도 같은 크기로 줄어들어 있었다.
태양과 달로 이뤄진 눈이 흉측한 비웃음을 머금었다.
“이건 도대체….”
【명색이 ‘계승식’일세. 이렇게 재미난 의식에 관객이 없어서야 쓰나.】
전장 한가운데로 나를 인도한 인과율은 어느새 인간과도 같은 크기로 줄어들어 있었다.
태양과 달로 이뤄진 눈이 흉측한 비웃음을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