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3화
-쭈와와앙!
인과율 특유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림과 동시에.
갑자기 공간 전체가 일그러지며, 하늘에서부터 거대한 빛기둥이 내려왔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떠들어 주었으니…. 설마. 내 초대를 거절하진 않겠지.】
“…당연하지. 졸렬하게 막후에서 세상을 마음껏 훔쳐보던 초월자 나으리께서 기껏 초대해주셨는데. 이쪽에서 무례를 범할 순 없지.”
비릿한 미소를 띤 채로 이죽거려준 나는, 기꺼이 인과율의 초대에 응했다.
황금빛 신력을 주입한 외골격을 전개한 채, 빛의 기둥 위로 올라서자.
시간과 공간이 제멋대로 일그러지더니, 전혀 새로운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나름 신경 써서 준비해 보았네. 여흥삼아 만든 곳치곤 꽤 정성을 들였지.】
인과율이 나를 초대한 공간은 내 심상세계처럼 칙칙한 회색빛으로 물든 무의 공간이었다.
주변을 둘러 보아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로지 허무하게 소용돌이치는 회색 구름 뿐이었고.
귀를 기울여 봐도, 귓가에 들리는 소리라곤 빠르게 고동 치는 내 심장 소리 뿐이었다.
천장도 바닥도 구분할 수 없는 회색빛 공간엔 오로지 단조로운 허무의 공간 뿐이었다.
“정성을 기울여 만든 것 치곤, 그리 개성 있어보이진 않는데?”
【그럴 리가. 필멸의 굴레에 얽매이지 말고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게.】
인과율의 느긋하면서 비웃음이 가득한 말에 따라, 회색빛 허무를 자세히 바라본 순간.
…나는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미X놈….”
【크흐흐흐. 그래. 그런 반응을 보여야. 정성을 기울인 보람이 있지.】
자세히 보니,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는 회색의 구름은 고통과 절망으로 아우성치는 인간의 영혼들을 억지로 뒤틀어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수십, 수백, 수천억…. 아니, 숫자 자체를 헤아리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많은 영혼들이 고통과 절망을 호소하며, 회색빛 허무의 공간을 암울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인간의 영혼도 장식용으론 꽤나 쓸모가 있는 법이야. 솔직히 인간이란 쓸데없이 번식력만 좋아서. 놈들의 영혼을 일일이 돌봐주는 것이란 여간 귀찮은 일이거든.】
“…네놈의 악취미와 젠체는 질리도록 봤으니까. 모습이나 드러내시지.”
빌어먹을 인과율이라는 놈은 죽은 이들의 영혼마저, 자신의 장난감으로 삼은 것이었다.
용암처럼 솟구치는 분노를 살짝 억누른 나는 어둠달을 꺼내들며, 놈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필멸의 형체를 취하는 것은 이 몸의 취향이 아니네만…. 뭐, 자네가 굳이 원한다면야.】
느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허무의 공간 속에서 희끄무레한 형체가 빚어지기 시작했다.
수없이 많은 인간의 영혼을 품은 회색빛 구름이 희끄무레한 형체를 휘감으며, 소리없는 비명을 질러댔다.
【어떤가? 제법 반가운 얼굴이 아니던가?】
“그래, 반갑기는 하네. 거 참 빌어먹게 못생긴 얼굴이었어.”
희끄무레한 구름 사이로 완성된 형체가 걸어나온 순간, 내 입에서 거친 포효가 터져 나왔다.
나를 약올리기 위해선지 인과율은 회귀 전의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내 예전의 모습에 나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성의없는 반응을 보이다니, 실망일세. 이 몸 나름대로 이 ‘독특한’ 얼굴을 빚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는가? 회귀 전 자네의 얼굴은 이 몸의 역작 중 하나였다네.】
“…그때 내 얼굴이 그쪽의 장난질이었다고?”
【하찮은 필멸자 따위를 직접 만드는 취미는 없네만, 자네는 이 몸의 ‘후계자’가 아니던가? 재미와 즐거움을 위해. 자네의 얼굴 만큼은 직접 신경써서 만들었었지. 꽤나 힘들었어.】
…이 미x 새x.
회귀 전, 나를 수렁으로 밀어넣었던 못생긴 외모는 인과율이라는 존재의 장난질에 불과했다.
놈은 단순히 자신의 악취미를 위해, 내게 그토록 낙인 같은 외모를 점지해 준 것이었다.
“크허허헝!”
폭주하듯 날뛰어대는 억눌린 분노로 인해, 고조될 대로 고조된 육신에서 폭발적인 움직임이 터져 나왔다.
입에선 성난 맹수의 그것과도 같은 포효가 거칠게 터져 나왔다.
-콰지직!
허무의 바닥이 움푹 꺼지며, 공간이 그대로 갈라졌다.
시간과 공간을 가른 채, 돌격한 내 주먹은 눈 깜짝할 사이에, 모습을 드러낸 인과율의 육신을 후려갈겼다.
【워워. 이렇게 갑자기 공격을 해오긴. 아직 대화가 끝나지 않았는데 말이야.】
그렇게 재빨리 돌격하여 인과율의 육신을 후려친 순간. 머릿속으로 비웃음 가득한 사념파가 침투해왔다.
곧이어 느릿하게 휘몰아치는 회색빛 구름이 내 육신을 노리고 사방에서 덮쳐오기 시작했다.
-후웅! 후웅! 후웅!
솟구치는 회색빛 구름에 대항하며, 나는 어둠달을 아래쪽으로 재빠르게 휘둘렀다.
파천 복룡창의 첫 번째 초식에 따라 유려하게 움직인 어둠달이 허공을 찢어발기자.
쉴새 없이 소용돌이치는 황금빛 신력에 휘감긴 창날이 수천, 수만 마리의 용을 빚어냈다.
-꽈직! 꽈지지직!
회색빛 공간을 온통 금빛으로 물들인 용들의 파도가 회색빛 구름들을 덥석 베어 물었다.
두 개의 거대한 기운이 충돌하자, 시간이 파편화되어 부서졌다. 공간이 우르르 무너졌다.
내 목숨을 노리며 날아든 회색빛 구름은 그렇게 일시적으로나마, 황금빛 용들의 무리와 대치를 이루었다.
-쿠르르르르!
두 개의 기운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동안, 나는 다음 수를 준비했다.
황금빛 외골격에서 풀려나온 황금빛 신력이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 하늘 높이 솟구쳤다.
다양한 성좌들의 권능을 품고 솟구친 신력은 허무의 공간을 붉게 물들이며, 거대한 태양이 되었다.
【흐흐흐. 새로운 질서를 품을 자가. 그 정도 도발에 넘어가면 쓰나. 그깟 껍데기에 장난을 좀 친 것 정도로 어지간히 분노한 모양이로군.】
“그깟 껍데기라고?! 나는 네놈의 장난질 때문에 평생을 괴롭게 살아왔어!”
머릿속에 다시 한번 인과율의 목소리가 사념파의 형태로 침투해왔다.
뇌를 통째로 부숴버릴 듯 머릿속으로 거칠게 파고드는 목소리와 함께, 갑자기 방향을 틀어버린 회색빛 신력의 구름이 또다시 사방에서 나를 덮쳐 왔다.
-콰르르릉!
회색빛 신력이 내 육신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바로 그 순간!
대기를 찢어내는 천둥소리와 함께, 사방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태양이 홍염을 품은 용의 화신이 되어, 그대로 아래로 뚝 떨어졌다.
-파차차차창!
그렇게 파천복룡창의 다섯 번째 초식. 광룡광림(이었던 것)이 본격적으로 발동되자.
타오르는 태양 속에서 증폭된 신력이 화염의 형태가 되어 회색빛 구름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삿된 기운을 정화하는 극양의 기운이 인과율의 사악한 신력을 불태웠다.
【그러고 보니, 자네와 함께 회귀한 버러지가 하나 있었지 아마? 하도 말을 듣지 않길래 또다른 자아까지 심어줬지만, 그마저도 극복하더군. 재밌는 녀석이었지.】
회색빛 신력의 파도가 모조리 불타 사라지자, 머릿속에 인과율의 사념이 또 들려왔다.
하지만 난 그의 목소리에 신경조차 쓰지 않고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며 그 힘을 이용해 어둠달을 힘껏 내리찍었다.
-카가가각!
폭발하듯 요동치는 내력과 위치 에너지의 조화로 인해, 인과율은 처음으로 타격을 입었다.
황금빛 와류에 휘감긴 창날이 인과율의 어깨에 아주 조금이나마 파고들었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어두운 회색빛 피가 어둠달의 창날을 타고 조금씩 어둡게 흘러내렸다.
【…호오. 이 몸에게 상처를 입힐 줄이야.】
인과율은 여유롭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려 했지만,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비릿하게 웃은 인과율의 얼굴에 신력이 이글거리는 황금빛 주먹이 득달같이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투쾅! 투쾅! 투쾅!
황금빛 신력이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주먹으로 인과율의 얼굴을 연속해서 가격하자.
마치 대장간에서 망치로 금속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기껏 말하고 있는데. 얼굴만 집중적으로 후려치는 건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자네는 성격이 너무 급해.】
…신력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다니. 역시 절대자는 절대자란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얼굴을 집중적으로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과율은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다.
오히려 놈의 얼굴을 가격한 내 주먹에서 부서진 외골격이 후두둑 무너져 내렸다.
막후에서 세상을 지배해 온 절대자답게, 놈은 자신의 압도적인 신력을 구름처럼 얼굴에 둘러,
얼굴에 가해진 공격을 모조리 막아낸 상태였다.
이야기하는 틈을 타, 어깨에 약간의 상처를 입히긴 했지만.
그것으로 인과율의 경각심만 돋군 모양인지, 놈의 몸에 어른거리는 신력의 구름이 더욱 더 짙어졌다.
눈속임을 날려, 회색빛 구름부터 유도해야겠어.
신력을 끌어모아서…. 하나, 두울, ㅅ….
【아참! 자네에게 줄 ‘선물’을 준비해 두었지. 깜빡 잊어버릴 뻔 했군. 한번 받아보겠는가?】
마음 속으로 숫자를 세며, 공격을 준비하려던 찰나.
싱글벙글 웃어대는 인과율의 눈앞에 별안간 낯익은 인영 두 개가 스르륵 떠올랐다.
“기, 길드장님…? 윤형 씨…?”
허무의 공간 속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이들의 모습에 준비했던 공격의 호흡이 순간적으로 흐트러졌다.
놀랍게도 엉거주춤한 자세의 강태백과 황윤형이 인과율의 앞에 서 있었다.
“사, 산군님?! 맙소사! 여긴 도대체 어딥니까!”
“마, 마족들을 상대하고 있었거늘. 도대체 이 기묘한 공간은….”
아무래도 전투 도중 인과율의 농간으로 끌려온 탓인지, 강태백과 황윤형은 대단히 당황한 표정으로 허둥지둥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혼란에 빠진 사이, 나를 보며 벙글벙글 웃던 인과율은 강태백과 황윤형을 향해 회색빛 구름을 칼날처럼 휘둘렀다.
“기, 길드장님! 위험! 크으윽!”
신력을 두른 어둠달로 강태백과 황윤형을 보호하려던 그 순간.
갑자기, 등쪽에서 모골이 송연해지는 듯한 고통이 엄습해왔다.
부풀어 오른 근육에서 회색빛 힘줄이 억센 나무뿌리처럼 우두둑 돋아났다.
턱이 으스러져라. 힘껏 깨문 입가에서 내장조각이 섞인 찝찔한 핏물이 울컥 흘러나왔다.
【이거. 이거…. 고작 이 정도 연기에 당한 건가? 아직 자네는 수행이 부족하군 그래.】
껄껄 웃는 인과율을 배경삼아, 무표정한 얼굴의 강태백과 황윤형이 내게 무기를 겨누었다.
방금 내 등을 찌른 그들의 무기에선 시뻘건 핏물이 그들의 새하얀 얼굴과 대비되며,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 연기라고?! 도대체 이게 무슨!
【아, 그저 죽음을 맞이한 그들의 영혼을 불러낸 것 뿐이니. 엄밀히 말해서 연기는 아니겠군.】
…뭐?
온몸을 잠식해오며, 끔찍한 고통을 선사해주던 신력의 고통도.
인과율이 비릿하게 중얼거린 충격적인 말에 잠시나마 잊혀졌다.
【자네가 그들을 각성시켜 줬다고 해서, 또 하찮은 버러지들 따위가 자네들을 돕는다고 해서. 아무런 희생없이 이 전쟁이 끝날거라 믿은 건가? 진심으로?】
“그, 그럴 리 없어. 분명히 나는 그들의 잠재력을 한계치까지 끌어줬는데!”
【어리석군. 못 믿겠다면. 보여주지. 그들이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말일세.】
비릿하게 웃은 인과율은 손을 휘둘러, 회색빛 신력을 거울의 형태로 빚어내었다.
불길하게 인간의 영혼들이 신음하는 거울 속에서, 믿을 수 없는 끔찍한 광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두둑. 우두두둑.
아그니의 힘으로 세상을 밝게 불태웠던 강태백의 육신이 마족들의 발에 나뭇가지처럼 지근지근 밟히고 있었다.
빛을 잃어버린 눈이 허무하게 허공을 훑었다. 입에선 시커먼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유, 윤형아! 눈 좀 떠봐라! 윤형아.
황윤형의 육신은 몸 반절을 잃어버린 끔찍한 모습으로 황태용의 품안에 안겨있었다.
죽어서도 결연한 의지를 버리지 못한 그의 손은 부서진 무기를 힘겹게 쥐고 있었다.
【이번에도 동료들을 희생시켰다는 것에 충격이라도 받았나? 한심하기는.】
두 사람의 최후를 목격하고 잔뜩 일그러진 내 머릿속에 인과율의 이죽거림이 느릿하게 들려왔다.
놈이 별로 떠올리고 싶었던, 결코 잊지 못할 과거의 상처를 언급하자.
뜨거운 무언가가 뱃속에서부터 울컥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 이 빌어먹을 새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