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2화
《크르르르….》
마흐라브의 두개골과 거친 랑데부 끝에 부서져버린 진홍빛 바위에서 튕겨져나와, 바닥에 널브러졌던 고룡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시커먼 기류를 흩뿌리며, 나를 노려보는 고룡의 시퍼런 눈동자에선 불완전한 봉인에서 강재로 깨워버린 것에 대한 분노가 서슬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핵을 파괴당한 고룡과의 2페이즈 전투라…. 애초부터. 그때의 우리 수준으론 절대로 완수하지 못했을 임무였네.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
아무래도 회귀 전, 그때 당시의 우리에게 주어졌던 ‘마지막’ 임무는 고작 핵을 파괴하는 것 따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시커먼 기류를 흩뿌리는 고룡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력을 가늠해본 나는 비릿하게 웃었다.
…놈에게서는 회귀 전의 나 따위는 벌레처럼 눌러죽일 수 있을만큼 강렬한 마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크르르르르. 멸망…. 혼돈…. 태초부터 이어진 맹약에 따라, 이 얼룩진 세계에 종말을 고하노라. 내 날개는 세계를 뒤덮는 어둠이요. 내 포효는 멸망을 노래하는 노랫 소리가 될 지니….》
조그마한 도마뱀 크기였던 고룡은 어느새 신전 전체를 뒤덮을만큼 거대한 크기로 자라났다.
핵을 파괴당한 덕에, 회귀 전에 마지막으로 봤던 크기보단 훨씬 작았지만.
그래도 시커먼 비늘에 어둠을 두른 채,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굽어보는 모습에선 범상치 않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네 죽음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필멸자여. 멸망의 힘 앞에 전율하…. 크아아아악!》
-짜아아악!
“멸망? 전율? 까고있네. 중2병 걸린 도마뱀 새X가.”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내가 ‘평범한’ 필멸자였던 시절에나 해당되는 이야기.
애석하게도 지금의 내겐 멸망을 노래하는 고룡 따윈, 그저 오글거리는 소리를 지껄여대는 도마뱀에 불과했다.
손바닥에 불끈 신력을 주입한 나는 그대로 몸을 날려, 놈의 뺨을 맛깔나게 후려갈겼다.
《…이, 이 무엄한 필멸자 놈! 나는 멸망을 노래하는 고룡이요. 파멸을 가져오는 사자일…. 크아아악!》
-짜아악! 짜아아악!
“아, 그러세요? 그럼 쳐맞지만 말고 그 파멸인지 뭔지 하는 걸 당장 가져와보시던가.”
이죽거리며 손바닥으로 고룡의 거대한 뺨을 후려 칠 때마다, 누런 이빨이 후두둑 튀어나왔다.
곧이어 끔찍하면서도 비릿한 냄새와 함께, 놈의 입에서 터져나온 시커먼 핏물이 먹물처럼 바닥을 시커멓게 물들였다.
《크아아악! 이, 이 건방진 필멸자 놈!》
-쿠르르르륵!
계속된 도발과 수모에 격노한 고룡이 자신의 비늘 위에 둘러진 어둠을 한데 끌어모았다.
끝없이 소용돌이치는 어둠이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품고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부서진 신도들의 동상들도, 박살난 진홍빛 암석 파편들도.
시커먼 어둠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 삽시간에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빛조차 삼키는 어둠의 소용돌이는 모든 것을 분쇄할지니…. 어억?!》
하지만 고룡이 소환해 낸 어둠의 소용돌이는 신전 전체를 찬란하게 물들인 황금빛 아우라에 휩쓸려 순식간에 소멸해버렸다.
믿었던 권능이 단 한번에 분쇄된 탓인지, 고룡의 입에서 헛바람 삼키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마, 말도 안돼. 이 몸의 어둠과 파멸의 권능이 소멸해 버렸다고? 어, 어찌 필멸자 주제에 이렇게 강대한 마력을….》
“그건 그쪽이 알거 없고. 내가 니 X끼 때문에, 그때 얼마나 고생했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이가 다 갈리거든?”
《무, 무슨 소리냐. 필멸자여. 나와 너는 만난적이 없거늘.》
고룡에게서 힘과 권능을 소멸시켜버린 나는 서늘하게 웃으며, 잠시 잊혀진 채로 바닥에 널브러져있던 마흐라브의 부러진 다리를 다시 한번 콰악 움켜잡았다.
“아냐. 그럴 일이 있어. 그나저나 정말 잘됐지 뭐야. 엿 같은 새X들이 쌍으로 한자리에 있어줘서!”
마흐라브의 양다리를 힘껏 틀어쥔 나는 그대로 놈의 몸을 번쩍 들어, 그대로 철퇴처럼 고룡의 머리통을 향해 휘둘렀다.
-꽈아아앙!
마흐라브와 고룡의 두개골이 기적의 랑데부를 일으키는 소리가 폭음처럼 터졌다.
둘의 두개골 경도가 제법 비등했던 모양인지, 신전 전체를 울리는 굉음이 터졌음에도 불구.
둘 중 하나의 머리가 썩은 호박처럼 완전히 박살나는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다.
잠시 마흐라브와 고룡의 단단한 머리에 만족스레 감탄한 나는, 또다시 마흐라브의 다리를 잡고 흐느적거리는 몸뚱이를 번쩍 들어올렸다.
-꽈앙! 꽈앙! 꽈과과광!
축 늘어진 마흐라브의 육신이 허공을 부웅 부웅 가를 때마다, 굉음이 터졌다. 폭음이 터졌다.
힘과 권능을 빼앗겨,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하던 고룡의 거대한 머리통이 점점 땅속으로 푹푹 파고 들었다.
“으하하하. 그래! 바로 이걸 원했었어!”
-꾸꽈광! 꽈과과광!
광포한 웃음 속에서 마흐라브의 몸뚱이가 점점 더 빠르게 허공을 갈랐다.
폭음 속에서 고룡과 마흐라브의 두개골에 조금씩 조금씩 잔금이 퍼져나갔다.
그렇게 한참동안, 침묵이 내려앉은 신전 내부에 폭력과 광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
-퍼석.
이제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되어버린 두 개의 육신이 힘없이 부서졌다.
나는 황금빛 신력을 휘둘러, 마흐라브와 고룡의 영혼을 성불시킨 뒤.
고개를 돌려, 말없이 이쪽을 지켜보던 위철용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알고 계셨던 거에요?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야. 어차피 그때의 우리는 비참하게 실패했을 거라는 거.”
[그래. 세 번째 단계를 열기 위해선. 하계에서 가장 강한 자들의 희생이 필요한 법이었거든. 어차피 그때의 너희들은 무슨 짓을 하든 멸망을 노래하는 고룡에게 잡아먹혀 패배할 운명이었다.]
거 참. 한세훈 따위와 엮이지 않았어도 어차피 빌어먹게 가혹한 운명이었구만. 그래.
무거운 표정으로 담담하게 중얼거리는 위철용의 대답에, 나는 비릿하게 한쪽 입술을 올렸다.
“운명이라…. 운명은 개뿔이. 어차피 그것도 성좌들이 인과율이라는 방구석 외톨이 놈의 헛짓거리에 놀아난 것 뿐이죠.”
크리슈나와 다른 낙오자들의 기억에 의하면.
애초에 『페이즈 3 : 멸망』에서 ‘멸망’이라는 단어의 의미 자체가 하계의 필멸자들 뿐만이 아니라, 성좌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세계를 관음하다 질린 인과율이 모든 것을 다시 리셋시키기 전에, 성좌들의 손을 빌어 하계의 모든 것을 멸망시키는 과정이 바로 『페이즈 3 : 멸망』이었으니까….
당연히 그렇게 하계가 멸망한 뒤엔, 쓸모가 없어진 성좌들은 ‘찬탈의 전쟁’이라는 이름 아래 마족들에게 패배하여 낙오자로 영락할 운명이었다.
[…그래. 필멸의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자화자찬하는 성좌 나으리들조차 결국엔 더 큰 운명의 굴레에 속박되어 있는 것이었다. 허허. 모든 속박과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등선을 했거늘. 오히려 더욱 강력한 굴레에 얽매이게 된 것이었다니. 이 얼마나 희극적인 일인지.]
씁쓸하게 중얼거린 위철용은 허탈하게 웃더니, 자신의 뒷통수를 벅벅 긁었다.
[그래도…. 본존의 그 기질이 어떻게보면 모두를 구원한 형국이 되어버렸구나. 솔직히…. 애송이 네놈 같은 사내가 운명이란 이름 아래에 허무하게 죽어야만 하는 것이 아주 고까웠거든.]
뭐, 이 양반만은 그래도 나를 가엾게 여겼었지….
뒤늦게 깨달은 엿같은 진실 때문에, 위철용에게 잠시 원망섞인 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회귀 전, 외모에 상관없이 나를 응원해줬던 유일한 성좌였다.
게다가, 뭣보다 위철용의 말대로 그가 성좌의 지위까지 버려가며, 나를 회귀시켜줬기에.
원래대로라면 허무하게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을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었다.
[허, 그놈 갑자기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긴, …됐다. 사내놈이 징그럽기는. 그때는 그래도 못생긴 얼굴로 쳐다봐서 부담도 없었는데. 쓸데없이 잘생겨져서는.]
위철용을 바라보는 내 눈빛이 살짝 부담스럽게 변해서일까?
위철용은 끔찍하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더니, 머리를 휘휘 내저으며 내 시선을 피했다.
[솔직히 필멸자 애송이 한 놈을 위해, 막대한 대가를 지불한 것 같긴 하다만. 뭐 결론적으론 일이 잘 되었으니…. 합당한 값어치를 치렀다고 봐야지. 게다가 말했다시피 본존은 마음에 드는 행동에 대가를 아끼는 성격이 아니라서 말이다.]
“…어울리지 않게 부끄러워 하시긴. 뭐. 됐습니다. 덕분에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까요.”
괜히 어울리지 않게 부끄러워하는 위철용에게 씨익 웃어준 나는 고개를 돌려, 마흐라브와 고룡이 남긴 한과 업의 응어리를 내 몸 속으로 받아들였다.
“그건 그렇고. 예상은 했지만. 브라흐마라니…. 크리슈나를 가장 잘 따르던 성좌마저 인과율의 손에 왜곡되어버린 모양이네요.”
그동안 암중에 숨어 마족들의 움직임을 조율했던 마흐라브, 아니 브라흐마가 남긴 한과 업의 응어리를 흡수하자.
여느 때처럼 낯선 기억들이 홍수처럼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왔다.
브라흐마를 거꾸로 뒤집은 마흐라브라는 이름에서 짐작했듯, 그는 한때 크리슈나의 뜻을 따르며 인과율과 대항하던 성좌였다.
[크리슈나인가 뭔가 하는 작자가 놈의 진실을 가장 먼저 깨달았으니. 그의 측근들에겐 예정된 비극이 찾아올 수 밖에 없었겠지.]
“…하긴. 마족으로 영혼이 뒤틀려 타락했던 이들은 거의 다. 크리슈나의 측근들이었으니까요.”
가네샤, 니르리티, 라크슈마, 브라흐마 등등.
마족들의 수뇌 역할을 하던 이들은 모두, 한때 크리슈나의 수하였던 성좌들이었다.
오랫동안 자신과 맞서며, ‘그릇’을 지원해온 크리슈나를 조롱하기라도 하듯.
인과율은 그동안 크리슈나가 아끼던 수하들을 ‘찬탈의 전쟁’을 주도하는 마족들의 소재로 사용해온 것이었다.
[세상의 섭리를 정하는 자가, 이토록 졸렬할 줄이야…. 성좌라는 허울좋은 이름하에 놈을 따랐던 세월이 다 부끄러워지는군.]
참으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행동에 위철용은 얼굴을 감싸쥐며, 낮게 신음했다.
아무래도 한때나마 성좌라는 이름아래, 인과율의 뜻대로 움직였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수치스럽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방구석 쳐박혀서 음험하게 악취미나 즐기던 놈이 인성이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저와의 승부를 계속해서 회피하며 이딴 잔챙이들이나 내보내는 것 보세요.”
자신의 악취미를 만천하에 드러낸 격 밖에 되지 않았던 ‘패배자’들과
찬탈의 전쟁을 주도시키기 위해, 규격 이상의 힘을 불어넣었던 ‘마흐라브’.
인과율이 준비한 카드가 모조리 내게 패배해, 소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선지 놈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위철용을 달래주며, 조용히 침묵만을 지키는 인과율을 비웃으려던 찰나.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기다리고 있던 손님이 불쑥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왔다.
【…소원대로 즉시 초대하도록 하지. 실은 이 몸도 슬슬 지루해지려던 참이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