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0화
-썩둑!
패배자들의 몸을 뒤덮은 신의 힘을 두른 외골격들이 일제히 소멸하자.
오랫동안 고문에 시달렸던 비루한 육체가 그대로 노출되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그들의 육신엔 신력이 한 줌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기에.
자비심 없이 휘둘러진 어둠달은 그들의 가슴팍을 단숨에 꿰뚫어버렸다.
《…끄아아아.》
창날에 실린 신력이 패배자들의 몸뚱이 곳곳으로 퍼져나가자.
그들의 영혼에 각인된 부서진 별자리들이 빛을 잃더니, 이내 추악하게 뒤틀린 육신이 모래알처럼 허망하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자신을 믿었던 이들을 배신한 놈들의 말로는 언제나 비참한 법이지.”
패배자들은 한때 나와 같은 길을 걸었던 ‘그릇’들이었다.
그때도 인과율에게 대항하는 낙오자들은 새로운 시대의 희망에게 모든 것을 걸었고.
이들 또한 낙오자들의 안배에 따라, 새로운 질서를 품은 그릇으로 각성했지만….
패배자들은 그 비참한 이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공포와 절망 앞에서 모두의 희생과 기대를 배신해 버렸다.
나는 빛 속에서 허무하게 바스러지는 패배자들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파스스스.
“…배신자들은 안식마저 허락받지 못하는 건가?”
패배자들의 뒤틀린 영혼에게나마 안식을 찾아 주려고 했으나.
인과율이 가한 고문으로 인해 영혼까지 왜곡된 탓인지. 애석하게도 그들은 제대로 된 영혼조차 세상에 남기지 못했다.
패배자들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 흩뿌린 황금빛 신력은 조각 난 채로 스러져가는 그들의 영혼 사이를 허무하게 더듬을 뿐이었다.
[인과율 놈의 가학적인 취미대로 ‘개조’된 치들이니. 영혼 또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겠지.]
“그렇겠죠. 조금 전에 제게 자비를 구하며 눈물을 흘렸던 것도. 인과율이라는 놈이 제 동정심을 자극하기 위해 그렇게 행동하게끔 조련해둔 것뿐일 테고요.”
잠시나마 이성을 되찾은 것처럼 보인 모습조차, 상대의 동정심을 자극하기 위한 연기였다.
패배자들이 공포와 절망 속에서 제 한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인과율과 맺었던 협약은 말 그대로 그들의 ‘목숨’만을 보장해줬을 뿐이었다.
목숨을 살려준 대가로 인과율은 그들의 자아를 완전히 거세한 채, 자신의 장난감으로 개조해 버렸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배신의 대가를 톡톡히 치른 패배자들의 비참한 말로에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
[괜찮느냐? 어떻게 보면 네놈의 미래가 될지도 모르는 이들을 상대했는데 말이다.]
“…네? 갑자기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완전히 소멸해버린 패배자들의 시신을 뒤로하고, 더욱 더 깊은 곳으로 향하려던 찰나.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위철용이 대뜸 내게 괴이쩍은 질문을 해왔다.
…인과율과 조우한 이래로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던 양반이 갑자기 이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그들 또한 네놈과 같은 길을 걸었던 이들이지 않았더냐. ‘그릇’이란 존재로서 낙오자들의 한과 업을 짊어졌던 이들. 필멸의 육신으로 새로운 희망과 질서를 품었던 이들…. 네놈 이전에 저렇게나 많은 이들이 공포와 절망에 잡아먹혔는데. 그들의 말로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게냐?]
위철용은 그답지 않게 살짝 흥분한 기색으로 장광설을 토해냈다.
나를 바라보며 잔뜩 찌푸린 그의 눈가에선 걱정이란 감정이 진득하게 묻어나왔다.
“그야 당연한 걸 왜 굳이 물어보십니까? 당연히…. 아무렇지도 않죠.”
[뭐…?]
내 입에서 의외의 대답이 흘러나왔기 때문일까?
뭐라 조언을 해 주려는 듯, 크게 숨을 들이마셨던 위철용의 입에서 헛바람이 흘러나왔다.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의문의 감정을 품고 기괴하게 찡그려졌다.
…이런 반응이라니. 도대체 이 어르신은 날 얼마나 나약해 빠진 얼간이로 인식한 거야?
여기까지 와서, 내가 저렇게 한심한 패배자 놈들의 말로 따위에게 동요할 리가 없잖아?
“도대체 절 어떻게 보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것이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게 당연하다고?]
“네, 당연하죠. 아무리 한때 저들이 저와 같은 길을 걸었다고 한들. 결국엔 공포와 절망에 먹혀, 한심한 선택을 한 얼간이들에 불과하잖습니까. 여기까진 비슷한 길을 걸어왔을지 모르지만. 그들과 저는 종착지 자체가 다를 텐데, 굳이 제가 그들을 신경 써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위철용의 의문에 여유롭게 히죽 웃으며, 자신 있게 답을 해줬지만.
어째선지 그는 더욱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심각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후우. 네놈이 그들처럼 공포와 절망 앞에 굴복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느냐? 먼젓번에 경험했듯. 그 ‘인과율’이라는 존재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힘을 가진 존재이니라.]
…허. 이 양반은 지금, 내가 그 얼간이들처럼 모두를 배신할 것을 걱정하고 있는 건가?
비로소 뒤늦게 위철용의 진의를 깨닫자, 불쾌한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회귀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누구보다 오랫동안 나를 옆에서 지켜봤던 이가 내뱉은 불신은 내게 참을 수 없는 불쾌함을 아낌없이 선사해주고 있었다.
“세상에…. 한때 세상을 오시했던 ‘천마’라는 양반의 안목이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됩니까?”
[…?]
“갑자기 뭔 이해하지 못했다는 눈빛을 보내십니까? 물었잖습니까. 잘나신 ‘천마’ 위철용 님의 안목이 고작 그것 밖에 안 되냐고요.”
[도대체 갑자기 그게 무슨….]
“제가 그렇게 나약한 인물로 보였다면, 도대체 왜 성좌의 자리까지 포기하며 제게 새로운 기회를 주신 겁니까? 놈들처럼 고작 그 정도로 포기할 얼간이를 위해 소멸마저 각오할 만큼. 성좌의 자리와. ‘천마’ 위철용이란 이름의 값어치가 가벼운 것이었습니까?”
위철용의 불신 어린 발언에 치밀어 올랐던 불쾌한 감정은 날카로운 독설이 되었다.
내게서 처음 보는, 엄혹하기 짝이 없는 반응에 위철용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당황의 기색이 서렸다.
[…그래. 그랬었지. 미안하군. 본존이 믿었던 ‘설용호’라는 애송이가 어떤 놈이었는지 잠시 잊었던 모양이다.]
오랫동안 정신적인 수양을 한 존재답게, 당황은 잠시뿐이었다.
잠시 침묵을 유지하며 나를 바라보던 위철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내게 사과를 해왔다.
“파천 복룡창의 무리에서도, 아니 만물의 이치가 다 그렇지 않습니까. 똑같은 무공을 습득하여 똑같은 무의 길을 걸어도. 개인의 행동과 의지에 따라, 그 종착지는 서로 다르잖아요.”
[그래. 미안하다니까. 에잉. 걱정이 좀 돼서, 조언이나 좀 해줄까 했더니. 까칠한 반응을 보이긴. 제자 키워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더니. 크흠!]
“…그거 어르신의 사부님 되시는 분께서. 예전에 똑같은 소리를 하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뭐, 뭐라고? 도대체 그건 또 어디서…. 빌어먹을. 네놈의 영혼에 아로새겨진 본존의 기억이 영 시답잖은 것까지 다 알려준 모양이로군…. 으음?!]
“…친절하게도 마중까지 나오셨나 본데요?”
그렇게 위철용과 시시덕거리며, 가볍게 투닥대고 있으려니.
갑자기 앞쪽에서 항거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압력과 음울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불꽃이 튀는 소리와 함께, 아무것도 없던 허공이 쩌저적 갈라졌다.
거미줄처럼 갈라진 공간에선 어둠과 마족 특유의 뒤틀린 신력이 불길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놈들이 부여한 거짓된 힘과 권능을 모조리 빼앗았는데도. 여기까지 올 줄이야…. 역시 그분의 말씀대로 이번 ‘그릇’은 각별한 존재인가 보군.》
어둠의 소용돌이 속에서부터 걸어 나온 이는 말쑥한 정장 차림의 인간 남성이었다.
하지만 쭉 째진 눈에서 불길하게 흘러나오는 어둠과 속삭이듯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음성에선 마족 특유의 끈끈한 기운이 음험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처음보는 외형의 소유자였지만, 나는 놈의 재수없는 말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흐라브. 우리 사이엔 서로 빚이 있었지 아마?”
《빚은 무슨. 그저 가벼운 인사였지.》
마흐라브는 뻔뻔하게 히죽 웃으며, 양손에 시커먼 신력을 둘렀다.
마족들을 이끄는 수장답게, 놀랍게도 놈의 양손에선 각기 다른 힘을 지닌 신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머지 두 사교도 집단의 성좌가 어디로 가버렸나 했더니….”
《그동안 내가 만든 실험체들을 수없이 만나보지 않았던가? 다양한 존재들의 육신을 필멸의 육신에 기워붙이는 실험 말일세. 마침내 나는 그걸 성공시켰거든.》
음험하게 웃는 마흐라브의 육신은 성좌 두 명과 한 마리의 마족, 그리고 한 명의 인간이 뒤섞여 있었다.
한 때 태백 길드의 산군이었던 박양환은 자신의 야망을 이루지도 못한 채.
기괴한 존재들과 한 덩이로 융합되어, 마흐라브의 새로운 몸을 구성하는 부품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빙의 따위와는 격이 다른 기운이 느껴지는군. 역시, 제정신이 아니야.”
《자네 말대로 빙의 따위와는 다르지, 그들의 신체 중 ‘쓸만한’ 부위만을 내 본체에 이식해, 힘을 손에 넣은 것이니까.》
-피슛!
재수없게 웃어대는 마흐라브의 목에 황금빛 선이 번개처럼 그어졌다.
빛보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보다 빠르게 휘둘러진 어둠달이 순식간에 놈의 목을 훑고 지나갔다.
《무례하긴. 비겁하게 다짜고짜 기습하는 겐가?》
“네놈이 할 말은 아닐텐데? …그리고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한가롭게 대화따윌 나눌만큼 살가운 사이였지?”
《하긴…. 하지만 자만하지 말게.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이몸에게 이따위 상처는…. 크학?!》
투덜거리며 잘려나간 부위를 재생하려던 마흐라브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놈의 살점을 잘라낸 어둠달의 창날엔 나의 신력이 듬뿍 묻어 있었다.
그리고 그 신력엔 한때 마흐라브에게 실험체로 수난을 당했던 두 성좌의 권능이 섞여 있었다.
베알제불의 부패와 타락의 권능 그리고 아트로포스의 왜곡의 권능이….
-꽈지지직!
오만상을 찌푸린 마흐라브는 시커먼 신력이 번들거리는 손으로 자신의 목을 통째로 뜯어냈다.
괴로운 표정으로 헐떡거리는 놈의 눈빛이 비로소 볼만하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분께서 자네의 육신을 얼마간 양도해주신다고 속삭이셨지. 아무래도 그분께 온전히 바치지진 못하겠어.》
살기가 번들거리는 눈빛을 흩뿌린 마흐라브는 양손에서 휘어진 갈고리를 꺼내들었다.
정육점에서나 쓸법한 거대한 고기 갈고리가 심상치 않은 존재감을 과시했다.
매끈하게 휘어진 곡선을 타고, 암울한 신력이 주변을 시커멓게 물들였다.
《격렬한 실험으로 인해, 내 몸에 이식된 성좌들이 원래 갖고 있었던 권능은 사라져 버렸지만. 내가 지닌 권능은 수십배나 강화되었다네.》
-부와아아악!
심상치 않은 미소를 띤 마흐라브는 신력이 번들거리는 갈고리를 휘둘러, 허공을 부욱 찢었다.
놈의 몸에서 회오리치는 시커먼 기운이 허공에 응집되더니, 보랏빛 게이트가 생성되었다.
《바로 공간을 다루는 권능이 말이야….》
으스스하게 뇌까리는 마흐라브의 눈엔 보랏빛 귀화가 암울하게 일렁거렸다.
놈을 바라보며, 어둠달을 까득 틀어쥔 내 눈에서도 황금빛 안광이 아지랑이처럼 새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