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9화
《크아아악!》
내 오만한 표정과 도발적인 손짓에 자극을 받은 것일까?
광포한 비명과 함께, 패배자들의 눈구멍에서 시뻘건 귀화가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동시에 그들의 뒤틀린 육신에 화인처럼 박혀 있던 부서진 별자리들이 음울한 빛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크, 크으으. 크아아아!》
패바자들의 육신에 박힌 별자리들이 음울하면서도 스산한 빛을 토해내자.
마치 내가 낙오자들의 힘과 권능을 빌려오는 것처럼, 놈들의 몸뚱이가 새로운 힘과 권능을 품고 서서히 변이하기 시작했다.
-콰우우우우!
유난히 작은 덩치를 자랑하던 패배자에게 폭풍의 힘이 깃들었다.
뒤틀리고 깡마른 몸이 구름과 번개를 머금고 비대하게 쑥쑥 자라났다.
잔뜩 굽은 등이 반듯하게 펴지며, 등 뒤에서 고리에 꿰인 북 모양의 외골격이 생성되었다.
수없이 많은 못이 박혀 있던 발바닥이 돌개바람에 휩싸였다.
우득 움켜쥔 뼈톱이 번개를 품고 거대한 북채의 형태로 변이되었다.
-쿠르르르륵!
호리호리하면서도 가녀린 체형의 패배자에게 용암과 대지의 힘이 깃들었다.
가녀린 육신이 용암과 암석에 뒤덮이더니, 뚱뚱한 근육질 남성의 형태로 변이되었다.
몸 곳곳에 박혀 있던 고문 기구가 고열을 이기지 못하고 모조리 주르륵 녹아내렸다.
고문의 흉터가 가득한 하반신이 땅속으로 쑥 꺼지더니, 대지와 일체화되었다.
힘없이 낭창낭창 휘두르던 뼈톱이 용암과 암석을 품고 전쟁 망치 형태로 변이되었다.
-꾸르르륵!
뚱뚱한 체형에 금붙이가 흉하게 엉겨 붙어있던 패배자에게 바다의 힘이 깃들었다.
푸짐하게 살찐 몸뚱이가 질척하게 녹아내리며, 물과 점액으로 이뤄진 흉물의 형상이 되었다.
제멋대로 꿈틀거리는 점액질 육신에서 수없이 많은 물고기가 무리를 지어 헤엄쳤다.
탐욕스럽게 살점을 갈망하던 뼈톱이 진주와 산호가 엉겨 붙은 삼지창의 형태로 변이되었다.
《크으으으으….》
《아으윽…. 끄으으윽….》
폭풍과 번개, 암석과 용암, 물과 점액으로 이뤄진 거인들을 필두로 다른 패배자들 역시, 인과율의 ‘그릇’답게 자신이 흡수한 낙오자들의 힘과 권능을 빌어 기상천외한 형태로 변이되었다.
고통과 원한, 증오를 품은 귀화가 그들의 텅 빈 눈구멍에서 유령처럼 떠올라 내 쪽을 향했다.
곧이어 압도적인 신력의 향연이 내 목숨을 노리며 한꺼번에 덮쳐왔다.
-쿠와아아앙!
폭음과 함께, 용암과 암석으로 이뤄진 전쟁 망치가 대지를 힘껏 내려찍었다.
내가 서 있던 대지 전체가 무력하게 쩌저적 갈라지며, 쩍 벌어진 틈에서 용암이 솟구쳤다.
피 분수처럼 시뻘겋게 솟구쳐, 순식간에 시야를 가려버린 용암 속에서 거대한 주먹이 용암을 가르며, 나를 향해 짓쳐들어왔다.
-꽈과광!
용암과 암석으로 된 주먹이 황금빛 광채에 휩싸인 주먹과 맞부딪히자.
천지가 뒤집히는 듯한 진동과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한 굉음이 터졌다.
곧이어 거대한 주먹에 쩌적 금이가더니, 이내 폭발하듯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용암과 암석으로 된 파편들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크워어어억!》
-두둥! 둥! 두두둥!
단 한번의 충돌로 오른손을 잃어버린 패배자가 고통어린 신음을 토하며 쓰러지기 무섭게, 다음 공격이 나를 향해 쇄도해왔다.
묵직한 북소리가 사방을 뒤덮는다. 싶더니. 어느새 하늘을 뒤덮은 수 천, 수 만, 수 억개의 먹구름이 대지를 향해 벼락을 흩뿌렸다.
-꽈릉! 꽈르르르릉!
하늘에서부터 형성된 번개의 소나기가 사정없이 대지를 강타했다.
형체나마 남아있던 나무와 가로등이 번개에 얻어맞아, 새까맣게 전소되었다.
대지를 때리고도 그 기세를 죽이지 못한 전하의 파도가 사방을 탐욕스레 집어삼켰다.
《크아악! 크아아아악!》
벼락이 사방을 하얗게 수놓음과 동시에, 폭풍의 힘을 받아들인 패배자의 공격을 지원하기라도 하듯 다른 패배자들도 나를 향해 일제히 무기를 휘둘렀다.
사방을 뒤덮은 전하의 파도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변이된 무기들이 벼락의 힘을 머금고 내 목숨을 노려왔다.
사방을 뒤덮은 전하의 파도!
살기를 머금고 휘둘러지는 무기들의 폭풍!
그 압도적인 폭력의 향연 속에서, 아직 자세조차 제대로 잡지 못한 내가 살아날 길은 요원해 보였지만….
“…그대로 멈춰라.”
-꾸드드드득!
시간을 다스리는 마하가라의 권능과 그와 유사한 권능을 지닌 성좌들의 힘이 해방되자.
세상이 온통 금빛으로 물들며, 만물의 시간이 일시적으로 꽈득 얼어 붙었다.
사방을 뒤덮은 전하의 파도도, 살기를 머금고 휘둘러진 무기들의 폭풍도.
살기를 뿜어낸 채, 나를 노려보는 패바자들의 격렬한 움직임도.
모두 얼어 붙어버린 시간 속에서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마하가라는자신의 권능이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이야기 했지만. 애초에, 시간을 다루는 권능 자체가 평범할 리가 없지.”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나는 히죽 웃으며 내게 짓쳐들어온 공격들을 여유롭게 피해냈다.
그리곤 어둠달을 가볍게 휘둘러, 나를 향해 휘둘러진 무기들을 연속으로 따다당 후려쳤다.
-따악!
마지막으로 발을 힘껏 굴려, 바닥을 내려찍은 뒤.
나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굳어버린 시간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푸슛! 푸슈슈슛!
《크악! 크아아악!》
다시 흐르기 시작한 시간 속에서 나를 향해 힘껏 휘둘러졌던 패배자들의 무기가 방향을 바꿔, 주인들의 육신으로 파고들었다.
-쿠콰아아앙!
그렇지 않아도 한 번 가라앉았던 대지가 또다시 우르르 무너져 내리며, 그 위에 서있던 패배자들을 집어삼켰다.
자욱하게 흩날린 흙먼지 속에서 시뻘겋게 솟구친 용암이 패배자들의 육신을 불살랐다.
《크아악…? 크으으윽!》
용암 속에 삼켜졌던 패배자들이 식어서 굳어버린 암석을 뿌리치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어둠달의 서늘한 창날 뿐이었다.
-피슛! 피슈슈슛!
듬뿍 주입된 신력으로 인해 신화의 영역에 접어든 창날이 시간과 공간을 가르며, 선두에 선 어느 불운한 패배자의 육신 속으로 파고들자.
패배자의 육신에 깃든 신력과 어둠달에 실린 나의 신력이 거대한 반발을 일으켰다.
패배자의 육신에 뻐끔 뚫린 구멍에서 창세와 혼돈의 기운이 소용돌이치며, 새하얀 빛이 폭발하듯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번-쩍!
《아, 안돼에에에에!》
눈앞을 온통 밝게 물들인 섬광과 함께, 머리를 꿰뚫린 패배자의 육신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마지막 순간, 의지를 되찾은 모양인지. 그는 처절한 단말마를 내질렀지만.
애석하게도 그가 이 세상에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끄, 끄르르르…. 이, 이럴수가….》
동료가 눈앞에서 소멸한 것을 본 패배자들은 의외라는 듯 놀라더니, 뒤틀린 신음을 흘렸다.
식어버린 용암 조각들을 후두둑 떨어뜨리며 몸을 일으키던 패배자들의 육신이 움찔 굳었다.
괴물처럼 괴성만 질러대던 그들의 입에서 갑자기 지성을 갖춘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소, 소멸했다. 완전히 소멸했어! 억겁의 세월 속에서 구원은 없을 줄 알았는데….》
《가장 어두운 순간에 구원의 길이 열리나니…. 아아, 마침내….》
패배자들의 텅 비어버린 눈에서 처음으로 악의와 증오가 아닌 감정이 새어나왔다.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 어린양들처럼 그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려대며.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그릇이여. 우리가 걸었던 길을 걷는 후계자여…. 부, 부디 우리에게 안식의 길을 내려주겠는가?》
《자비를 보여주게…. 억겁의 고통 속에서 우리는 어리석은 선택의 대가를….》
-부와아아악!
패배자들은 눈물을 그렁거리며 내게 다가왔지만.
믿어준 이들을 쉽사리 배신한 놈들 답게, 당연히 놈들에겐 ‘좋은’ 의도가 없었다.
구원을 바라는 척, 우호적으로 접근한 놈들의 등뒤엔 시커멓게 꿈틀거리는 신력이 암울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대화로 상대방의 주의를 돌린 뒤, 기습하는 것은 비열한 놈들의 전매특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놈들의 알량한 감성팔이에 넘어가지 않았다.
-까드드드득!
황금빛 신력을 품고 휘둘러진 어둠달에 의해.
패배자들의 기습은 불꽃과 쇳소리만을 남긴 채, 허무하게 무위로 돌아가 버렸다.
자신의 기습이 막혀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패배자들의 눈빛에 다시 광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크아아앙!》
또다시 짐승과도 같은 포효를 토해낸 패배자들은 굶주린 짐승 떼처럼 내게 쇄도해왔다.
검붉게 번들거리는 신력은 질식시킬 듯한 살기를 뿜어냈고, 전신의 체중을 손에 실어 훙훙 휘둘러오는 일격은 흉험하기 짝이 없었다.
-후왕! 후와앙! 후왕!
불길하게 검붉은 신력을 흩뿌리는 무기들이 연속으로 허공을 갈라왔다.
워낙 단순하고, 무식하기까지 한 공격이었지만 공격 속도와 거기에 실린 위력은 무식할 정도로 대단했고, 치명적인 살기까지 머금고 있었다.
“어딜!”
하지만 패배자들의 공격이 내게 닿기 직전, 나는 신력을 불어넣은 창대를 휘둘러 놈들의 공격을 모조리 막아냈다.
-카앙! 캉! 캉!
황금빛 신력이 휘감긴 창대와 검붉은 신력이 휘감긴 무기들이 만나, 계속해서 불똥을 튀겼다.
거칠게 마찰된 금속이 피 비린내와 유사한 냄새를 훅 풍겼다.
-파사사삭!
《캬아아악!》
너울거리며 엉겨붙은 금빛과 핏빛의 군무는 핏빛의 신력이 금빛의 신력에 잡아먹히는 것으로 끝이났다.
조개 껍질이 깨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찬란한 황금빛을 흩뿌리는 어둠달이 패배자들의 무기들을 단숨에 부숴버렸다.
-콰르르르륵!
폭풍처럼 휘몰아친 황금빛 신력은 패배자들의 무기를 박살낸 것과 동시에 놈들의 육신을 금빛으로 번쩍 물들였다.
황금빛 신력이 패배자들의 뒤틀린 육신 속으로 파고들자, 조금 전처럼 놈들의 몸뚱이에 깃든 검붉은 신력과 나의 황금빛 신력이 거대한 반발을 일으켰다.
패배자들의 내부에서 창세와 혼돈의 기운이 정신없이 소용돌이쳤다.
놈들의 쩍 벌어진 입에서 새하얀 빛이 폭발하듯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기괴하게 변형되었던 놈들의 외골격에 쩌저적 시커먼 금이 거미줄처럼 퍼져갔다.
패배자들의 외골격에 금이 간 것을 확인한 나는 외골격에 황금빛 신력을 주입시켜, 마무리 공격을 시전했다.
-번-쩍!
세상을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인 광채와 함께, 패배자들의 외골격이 덧없이 깨어져 갔다.
주인에게서 떨어져나온 검붉은 외골격의 파편들이 파스스 흩어지며, 허무하게 흩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