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6화
-콰르르르릉!
마치 신화 속 한 풍경과도 같은 장엄한 전투가 펼쳐지고 있었다.
별과 빛으로 이뤄진 다리가 대지를 힘껏 박차자, 폭음과 함께 지형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다.
어둠과 살점으로 이뤄진 발톱이 허공을 휘익 가르자, 세상이 그 궤적대로 두 개로 갈라졌다.
-쿠콰아앙!
혼돈 그 자체가 내려앉은 듯한 전장 속에서 빛과 어둠, 별과 살점이 거세게 충돌하자.
마족들의 발톱에 적중당한 별과 빛으로 이뤄진 육신에서 별 가루가 은하수처럼 흩뿌려졌다.
성좌의 분신들이 휘두르는 무기에 적중당한 어둠과 살점으로 이뤄진 육신에서 검붉은 핏방울이 들끓는 용암처럼 솟구쳤다.
「크으윽! 낙오자 놈들 주제에 어디서 건방지게 우리에게 대항하려 드는 것이냐! 불경한 이들에겐 천상의 진노가 내려질 지니!」
어느 성좌의 분신에게서 천둥 같은 고함이 우레처럼 터져 나오자.
내리치는 벼락 그 자체를 형상화 한 듯한 그의 무기에서 새하얀 전하가 들끓어 올랐다.
동시에 세상 전체를 하얗게 백열시킬 듯한 번개가 폭풍처럼 전방을 휩쓸기 시작했다.
-콰르릉! 콰르르릉!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새하얀 전하가 어둠으로 물든 마족들의 육신을 정신없이 유린했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번개의 폭풍 속에서 마족들의 질긴 가죽이 맥없이 꿰뚫렸다. 성긴 근육이 엉망으로 찢어졌다. 단단한 뼈가 수수깡처럼 박살났다.
일반적인 필멸의 존재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소멸할 듯한 신화적인 공격이 마족들을 휩쓸었지만….
《성좌 나으리의 힘이 고작 이 정도인가? 평화에 절은 요즘 것들의 힘이란!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군!》
《으하하하! 원한! 증오! 갈망! 세상의 섭리 저편에서 망령처럼 헤메이던 고통에 비하면 이까짓 고통 쯤은 필멸자의 장난 수준에 불과하노라!》
성좌 시절의 권능을 오롯이 회복한 마족들에겐 그 정도 공격은 생채기에 불과한 듯 했다.
휘몰아친 벼락이 놈들의 몸을 헤집었지만, 어둠 속에서 섬뜩하게 눈을 빛내는 마족들의 시선엔 여전히 투지와 적의가 가득하기만 했다.
-꾸르륵. 꾸르르륵.
시커멓게 변질된 신력이 어둠의 형태로 꿈틀대며, 마족들의 육신을 재생시켰다.
벼락에 통째로 타들어갔던 육신이 삽시간에 원래의 강인한 형태를 되찾았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에선 끝을 짐작할 수 없는 원한과 악의가 귀화처럼 둥실 떠올랐다.
…이상하군. 이놈들은 혜옥이가 상대했던 놈보다 훨씬 강한 것 같은데?
성좌 시절의 힘과 권능을 단편적으로나마 되찾았다곤 하나.
마족들의 육신은 여전히 물질적인 필멸의 한계에 얽매여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아무리 신성을 되찾은 마족들이라고 한들 김혜옥이 그랬던 것처럼 육신을 압도적인 신력으로 쳐부순다면, 새로운 육신을 빚어내기까지 잠시나마 마족들을 무력화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어째선지 성좌의 분신들과 대치하는 마족들의 재생속도는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그래봐야. 육신이란 한계에 얽매인 반쪽짜리 놈들이 큰소리치긴! 그 추악한 육신이 완전히 소멸할 때까지 계속해서 부숴주마!」
《크흐흐흐. 소용없다! 끝없는 악의 앞에 너희들은 처참히 파멸할지니!》
번개와 불, 얼음과 바람, 빛과 생명 등등
성좌들의 파괴적인 권능을 형상화한 공격이 마족들의 육신을 쉴새 없이 유린했다.
하지만 그들의 공격을 비웃기라도 하듯, 음험하게 꿈틀거리는 마족들의 육신은 어둠 속에서 끝없이 재생을 반복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힘으로!」
그렇게 지루한 난전이 이어지고 있던 그 순간. 세상이 순간적으로 거뭇하게 물든다. 싶더니.
하늘에서부터 어지간한 건물보다 더욱 더 거대한 빛과 별의 주먹이 운석처럼 떨어져 내렸다.
-콰르르르릉!
압도적인 질량의 폭력아래, 대기가 비명을 지르며 타들어갔다.
대지가 앞으로 닥쳐올 고난을 직감하며, 불안하게 부르르 떨렸다.
-콰아아아앙!
빛과 별로 이뤄진 거대한 주먹이 무자비하게 대지 위로 내리꽂히자.
단단한 대지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반구형으로 움푹 내려앉았다.
곧이어 열기를 품고 솟구친 버섯구름이 흙먼지와 함께, 세상을 순간적으로 어둑하게 물들였다.
「무슨 짓인가! 여기엔 우리 뿐만 아니라. 대의를 위해, 의기 있게 몰려든 필멸자들도 있단 말일세!」
「흐흐흐흐. 벌레같은 필멸자들의 사정따윈 내가 알바 아니지. 이것으로 그 하찮은 낙오자 놈들은 모조리 짓눌러 죽여주겠다!」
하늘을 온통 가릴만큼 거대화하여, 주먹으로 대지를 후려친 성좌의 분신은 뭐가 문제냐는 듯 산맥과도 같은 거대한 어깨를 으쓱였다.
자신의 일격에 대단히 자신이 있었던 모양인지, 그의 목소리엔 확신이 가득 차 있었지만….
-꾸르르륵.
「뭐, 뭐냐! 이, 이 불측한 기운은! 크읍!」
대지를 강타한 거대한 주먹이 꿈틀거리는 시커먼 기운에 의해, 거뭇하게 물들어갔다.
오만하게 대지를 내려보던 분신의 눈이 경악과 공포를 품고 음울하게 물들었다.
그렇게 주먹을 검게 물들인 정체불명의 시커먼 기운은 나무덩쿨처럼 계속해서 뻗어 나가, 거대화한 분신의 육신을 장악해나가기 시작했다.
「으으윽! 감히 내 고귀한 분신에게 무슨 짓으…. 동화성공…. 정신장악 개시….》
흉측하게 뻗어 나간 검은 기운이 분신의 머리 부위까지 뻗어 나가자.
당황섞인 비명을 내지르며 몸부림치던 그의 목소리가 기이하게 변조되었다.
별로 이뤄진 얼굴에서 눈처럼 형형하게 빛나던 두 개의 별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꾸드드득!
곧이어 끔찍한 소리와 함께, 빛과 별로 이뤄진 육신이 변이를 시작했다.
희미한 빛을 뿌리는 별과 별 사이가 핏줄과 살점, 뼈로 연결되었다.
분신의 외피를 구성하고 있던 밝은 빛이 어둡게 물들더니, 질긴 가죽의 형태가 되었다.
《크흐흐흐. 이것이 그 잘난 ‘성좌’ 나으리들의 힘인가! 아주 만족스럽군!》
성좌의 분신을 장악한 마족이 음험하게 중얼거리며 붉은 안광을 흩뿌렸다.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놈의 끔찍한 육신에선 끝을 알 수 없는 살의와 악의가 흉측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크워어어어억!》
-콰드드득!
우렁찬 포효 소리와 함께 끔찍하게 변이된 분신의 눈에서 시뻘건 기운이 번뜩였다.
순식간에 시커먼 불꽃이 움울하게 꿈틀거리며, 엉망으로 뒤틀린 손에 모여들었다.
음울한 악의를 품은 시선이 그의 공격을 예고했다. 시뻘겋게 달궈진 손이 다른 성좌의 분신들을 덮쳤다.
「무슨 일이죠? 세상에…. 도대체 그들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크헉!」
거대한 주먹이 세상을 검붉게 물들이며 뚝 떨어져 내리자, 멍하니 뒤틀린 분신을 바라보던 다른 분신의 입에서 경악이 터져 나왔다.
그는 마족들을 정신없이 유린하던 거대한 창 형태의 무기를 급히 회수하며, 자신을 덮쳐온 거대한 악의를 막아내려 들었다.
다급한 기색이 역력한 그는 재빠르게 창 자루의 가운데를 부여잡곤 마치 풍차처럼 창 전체를 빠르게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후웅! 훙! 훙!
시커먼 기운을 일렁이며 회전하는 창이 큼직한 방패가 되었다.
그렇게 성좌의 분신이 그에게 날아든 뒤틀린 악의을 튕겨낼 준비를 하려던 순간!
《크헤헤. 어딜 보는 건가 성좌 나으리. 아직 싸움이 끝나지도 않았잖아?》
「크…. 크아악! 도, 동화 작용개시….》
창을 든 분신을 상대하던 마족들이 그의 별과 빛으로 이뤄진 육신에 엉겨붙었다.
수많은 마족들이 분신의 몸을 뒤덮자, 그의 입에서도 괴이한 소리가 흘러나오더니.
또다시 별과 빛으로 된 육신이 끔찍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 뿐만 아니라 사방에서 다른 성좌들이 마족들에게 자신들의 분신을 장악당하고 있었다.
「감히 신성을 모독하다니! 빛이 있-으-라!」
그렇게 싸움의 기세가 마족들에게 완전히 넘어가려던 그 순간!
산 위에 걸터앉아 고고하게 전황을 지켜보던 성좌의 분신 한 체가 몸을 일으켰다.
단지 그가 몸을 일으킨 것만으로도, 태양이 지상으로 하강한 듯한 빛이 사방을 환하게 비췄다.
[…의회의 의장 나으리께서 드디어 그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일어나셨군.]
위철용답지 않게 아연한 표정으로 미뤄보건대, 아무래도 그는 성좌들의 단체 중 하나인 ‘승천의 의회’를 이끄는 의장 격인 성좌인 듯했다.
강력한 성좌라는 것을 반증하기라도 하듯, 별과 빛으로 이뤄진 그의 분신은 다른 분신들보다 더욱 더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의 몸에서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이 지상을 환하게 물들였다.
「간악한 악의 종자들이여! 네놈들이 기어 나온 하찮은 어둠 속으로 돌아가라!」
의회의 의장은 태양보다 더 밝게 빛나는 검을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그 거대한 검에 자신의 신력을 집중시켰다.
-투확! 투확! 투확! 투확!
태양보다 더 강렬하게 빛나는 검에서 무언가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들린 것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세상이 완전히 빛으로 물들며, ‘어둠’이라는 개념이 일시적으로 사라졌다.
새하얀 빛에 노출된 마족들과 마족들에게 잠식된 성좌들의 분신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증발해버렸다.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하는 법! 세상을 밝히는 빛이야말로 어둠의 천적일지니!」
삽시간에 마족들을 정리해버린 의회의 의장은 기세등등한 목소리로 껄껄 웃었다.
충만한 신력을 머금은 웃음소리가 막 재생하려던 마족들의 신체를 다시 증발시켰다.
눈부시게 이글거리는 검이 태양처럼 밝게 빛나며, 마족들을 쉴새 없이 불살랐다.
“…확실히 격이 다른 존재이긴 하네요. 다른 성좌들이 그토록 애를 먹었던 마족들을 한번에 해치우다니.”
[콧대 높은 성좌 중에서도 유독 꽉 막힌 종자들을 이끄는 독종이 바로 저놈이다. 소문은 들었지만…. 확실히 그 이름값을 하는군. 그래.]
“진작 좀 나서줬으면 전력 소모도 별로 없었을 것을….”
위철용의 말대로 승천의 의회를 이끄는 의장의 힘은 다른 성좌들과는 격이 다른 수준이었다.
그가 조금만 더 빨리 나서주기만 했어도 마족들에게 허무하게 장악당해, 파괴되어버린 분신들을 아낄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괜히 입맛이 썼다.
[남 말하기는. 애송이 네놈도 성좌들의 실력을 보고 싶어, 그저 바라만 보고 있지 않았더냐.]
“에…. 뭐. 그러긴 했죠. 얼마나 강한 존재들인지 확인해보고 싶긴 했긴 했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성좌 씩이나 되는 존재들이 마족들에게 자신들의 분신체를 강탈당할 줄은 누가 알았겠어.
위철용의 지적에 괜히 머쓱해진 나는 껄껄 웃는 승천의 의회 의장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전장 더 깊은 곳으로 향하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키이이이잉!
갑자기 무언가가 맹렬히 회전하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앗 하는 순간. 이번엔 세상 전체가 시커멓게 물들며, 일시적으로 빛이 사라졌다.
「크으으윽! 이, 이게 무, 무슨!」
어떻게 대응할 사이도 없이, 승천의 의회 의장의 육신이 어둠 속에서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호탕한 웃음을 머금었던 입에서 고통과 당황이 섞인 신음이 터져 나왔다.
눈 부신 빛을 뿜어내던 그의 검에서 빛이 사그라들더니, 이내 재가 되어 흩날렸다.
「아, 안돼! 빛이…. 빛이이이!」
쪼그라들었던 의장의 분신이 비명만을 남기고 순식간에 완전히 소멸해버렸다.
강력한 성좌의 분신을 잡아먹은 어둠이 불길하게 일렁거리며, 음울한 기운을 흩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