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5화
“마족은! 뜯고! 찢고! 부순다!”
양손, 아니 외골격까지 포함해서 네 개의 팔마다 마족들의 시신을 꽈악 움켜쥐고 포효하는 김혜옥은 말 그대로 신화시대의 광전사와도 같은 포스를 뿜어내고 있었다.
회색으로 물든 눈이 번개처럼 이글거리는 귀화를 머금었다. 쩌렁쩌렁한 포효를 내지르는 입이 천둥과 우레를 머금었다.
저쯤 되면 거의 가네샤 본인보다 훨씬 더 강한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설마?
김혜옥 또한 파편의 힘을 완전히 각성한 상태였기에.
다른 파편들을 흡수하여 신성을 되찾은 마족들을 상대로 어느 정도 선전할 줄은 알았지만.
설마하니 그들을 이렇게나 쉽게 압도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처음 나타난 놈에 이어, 김혜옥은 어느새 두 번째로 나타난 마족마저 순식간에 ‘찢어버린’ 상태였다.
《끄, 끄으으으.》
유난히 시커먼 기류를 흩날리며 음흉하게 웃는 것이 제법 강력해 보이는 마족이었지만.
김혜옥의 압도적인 근육이 발휘하는 강력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놈도 전임자처럼 순식간에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와도 같은 신세가 되어버렸다.
전임자에 비해 파편의 힘을 더욱 진하게 흡수한 탓인지, 두 번째로 나타난 놈은 그렇게 심하게 당한 상태로도 용케 목숨만은 붙어있는 듯 했다.
《이, 이럴 수 없다. 과거의 힘을 되찾은 이 몸이 고작 ‘파편’ 따위에게 패배할 수는….》
곤죽이 되어버린 입에서 불신 어린 말이 힘겹게 흘러나왔다.
초점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불안하게 뒤룩뒤룩 주변을 헤매는 눈알이 의문을 머금었다.
그렇게 뜯어지고 부서진 육신이 힘겹게 꿈틀거리며, 재생을 시도하려던 찰나.
“셧 업! 패배자!”
김혜옥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마족을 향해 입을 쩌억 벌리자.
그녀의 입에서 극도로 압축된 공기 덩어리가 회색빛 신력을 머금고, 넝마가 된 마족의 육신을 향해 발사되었다.
-쿠콰앙!
회색빛 신력을 잔뜩 머금은 압축된 공기가 마족의 몸에 닿은 순간.
폭음과 함께 대지 전체가 움푹 가라앉더니, 지진이라도 난 듯 정신없이 우르릉 흔들렸다.
곧이어 움푹 꺼진 대지에서 거대한 버섯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가네샤에게 저런 권능이 있었던가? 저건 또 도대체 무슨 원리로 파생된 기술이지?
가네샤가 원래 지녔던 권능과는 몇백 광년 정도 떨어진 것 같은 권능이었지만.
파괴력 하나만큼은 기가 막힌 수준이었다.
응축된 회색빛 신력은 마족의 육신을 완전히 이 세상에서 소멸시켜버렸고, 놈의 오염되고 뒤틀린 영혼을 완전히 흩어놓았다.
“…영혼이라. 그래, 이들의 영혼도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둘 순 없지.”
금방이라도 꺼질 듯 힘없이 나풀거리는 영혼의 모습에, 뒤늦게 잊어버렸던 것을 기억해 낸 나는 쓰게 웃으며 황금빛 신력을 사방으로 퍼뜨렸다.
-샤아아아.
따스한 기운을 품은 황금빛 물결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전장 곳곳을 배회하며 귀곡성을 토해내는 마족들의 영혼들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만물을 포근하게 감싸 안는 태양과도 같은 황금빛 신력에 노출된 마족들의 영혼들이 하나둘씩 서글픈 귀곡성을 멈추었다.
《아, 아아아…. 그래. 그런 것이었군. 내 운명은 이미….》
《모든 것은 그가 의도한 것이었어. 나는, 우리는 그의 손바닥 안에서….》
황금빛에 휩싸인 마족들, 아니 마족으로 뒤틀렸던 낙오자들의 영혼들은 오래전에 취했어야 할 안식을 뒤늦게나마 되찾았다.
황금빛 광채 속에서 어쩐지 후련한 표정을 짓는 그들의 영혼들은 한과 업의 결정체를 남긴 채, 하나둘씩 안식을 찾아 떠나갔다.
*****
“다시 만나자마자 헤어져서 아쉽지만…. 어서 가세요. 싸부님! 여긴! 제가 맡고 있을게요!”
가네샤의 힘과 권능을 기대한 것 이상으로 발휘한 김혜옥은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활약해주었다.
그렇게 마족들을 손쉽게 찢어발긴 김혜옥은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호기롭게 포효했다.
…그래. 혜옥이가 이 정도의 무력을 보여줬으니. 다른 이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다른 이들도 기대한 것 이상으로 잘해 줄지도 모르겠어.
김혜옥의 호기로운 외침에 지나온 길을 살짝 돌아보자.
강태백과 설악 공격대 역시, 한창 전투를 치르고 있는 모양인지.
서리와 불꽃의 폭풍이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모습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하늘 전체를 불살라 버릴 듯, 살벌하게 치솟은 불기둥들의 향연으로 미뤄보건대.
강태백 역시 자신의 영혼에 깃든 성좌, ‘아그니’의 힘을 충분히 잘 휘두르고 있는 듯했다.
“다른 분들도 최선을 다해, 마족 놈들을 상대하고 계실 거에요. 그러니…. 싸부님께서도 저흴 걱정하지 마시고 부디….”
호기롭게 외치던 김혜옥은 살짝 말끝을 흐렸다.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리는 것으로 봐선, 아무래도 그녀는 가네샤의 기억을 일부 이어받은 덕에 앞으로 내가 어떤 존재를 상대해야 하는지 뒤늦게나마 눈치챈 모양이었다.
[…이길 수 있겠느냐?]
아끼던 김혜옥의 감정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것일까?
튜토리얼 타워에서 나온 이래로 계속해서 침묵만을 유지하던 위철용이 걱정스레 물어왔다.
그답지 않게, 위철용의 목소리는 평소의 패기따윈 찾아볼 수 없이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솔직히…. 모르겠어요.’
튜토리얼 타워에서 체감했던 ‘인과율’의 힘과 권능은 지금의 나로서도 감히 그 끝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대했다.
파편을 흡수하여 신성을 되찾은 마족들마저도, 아니 그들보다 곱절은 강력한 성좌들마저도 인과율 앞에선 하찮기 그지없는 ‘버러지’에 불과할 정도로 놈은 아예 격을 달리하는 강자였다.
그래, 솔직히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은 전혀 들지 않지만.
그래도 앉아서 얌전히 당할 수는 없지….
“그래, 놈은 제법 강력한 상대, 아니 감히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적이지만. 그래도…. 이제껏 그래왔듯. 아무 일도 없이 호쾌하게 이기고 올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말렴.”
흔들렸던 마음을 정리한 나는 김혜옥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었다.
김혜옥을 위로하기 위해 건넨 말이었지만, 이것은 나에게 스스로 하는 다짐이기도 했다.
“따라가고 싶지만 이번엔 제가 따라가봤자 짐만 되겠죠…. 어쩔 수 없네요. 부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싸부님. 저는 싸부님의 승리를 기원하고 있을게요!”
-쾅!
김혜옥의 작별인사에 미소로 화답한 나는 즉시 땅을 박찼다.
단순히 가볍게 땅을 박찬 것만으로도, 단단한 대지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내 육신은 어느새 하늘 저 높은 곳까지 높이 솟구쳤다.
-인간의 저력을 보여주마! 이 징글징글한 놈들!
-얍삽한 서울 촌놈들에게 뒤처지지 마라! 남부연합! 마음껏 날뛰어라! 최후의 싸움이다!
그렇게 하늘 높이 솟구치자, 아래에 펼쳐진 전장의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깃발을 휘두르며 악을 써대는 양소혜와 양석필의 지휘 아래, 남부연합원들은 무기를 휘두르며 마족들에게 용맹하게 돌격하고 있었다.
무기와 발톱, 갑옷과 털가죽이 격렬하게 충돌하며 심상치 않은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어둠 속에 웅크렸던 세월은 이제 끝이다! 새로운 질서를 위하여!
끝없이 늘어선 전선의 선두엔 청회색 신력을 휘황하게 흩뿌리는 먹구름들이 오닉스 길드원들을 지휘하며, 약속했던 대로 선봉에서 마족들을 마구 학살하고 있었다.
청회색 벼락이 지상에서 번쩍일 때마다, 마족들의 육신에서 시커먼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어르신들의 말씀 들었지! 가자 윤형아!
-네! 아버지! 돌격조! 정면으로 파고 들엇!
황윤형과 황태용 부자 역시, 먹구름들의 인도를 받아 용맹하게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황윤형의 육신에서 두 마리의 용이 뻗어 나와 전방을 난폭하게 휩쓸었다.
그에 화답하듯, 황태용의 검에서 솟아난 시커먼 용 한 마리가 마족들의 육신을 유린했다.
-꼭두각시처럼 조종당했던 설움을 갚을 모처럼의 기회다! 목숨을 아끼지 마라! 명예를 위해!
-오행 샌님들에게 질쏘냐! 금랑 길드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모두에게 똑똑히 보여줘라!
전장 한 귀퉁이에선 오행 길드의 생존자들과 금랑 길드의 생존자들 역시, 약속했던 대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마족들과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광기와 귀기까지 느껴지는 그들의 무기에선 마족들에게 이용당했던 설움을 갚겠다는 굳은 의지가 그대로 묻어나오고 있었다.
-건곤 길드는 절대 빚을 잊지 않는다!
-이번엔 못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 태백 길드를 위하여!
마족들에겐 불행한 일이지만, 광기와 귀기를 퍼뜨리는 사람은 그들 뿐만이 아니었다.
홍성동 또한 자신이 당했던 굴욕을 잊지 않은 모양인지, 건곤 길드원들과 함께 마족들에게 번개와 천둥을 아낌없이 퍼붓고 있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펼쳐진 전장 한복판엔….
-저쪽! 저쪽이에요! 어서 다른 분들에게 연락을!
-그럴 필요가 있나요? 제가 처리하도록 하죠!
…위험하게시리. 댁들은 도대체 왜 거기에 있는 건데?
놀랍게도 이세영과 신지현 역시, 전장의 한복판에 당당히 서 있었다.
신지현은 수많은 수신기에 둘러싸인 채 악을 써대는 것으로 미뤄보건대, 아무래도 그녀는 이번에 사령탑 역할을 자처한 모양이었다.
위험천만한 전장의 중심에서 광기에 찬 웃음을 흘려대는 이세영은 움켜쥔 단검을 번개처럼 휘둘러대며, 신지현 쪽으로 접근하는 마족들을 거침없이 베어 넘기고 있었다.
“그래도. 다들 도망가지 않고 여기까지 잘 따라와 준 모양이로군.”
전장을 내려다보며, 그동안 나와 인연을 맺었던 이들의 모습을 가볍게 훑은 뒤.
나는 히죽 웃으며 끝없이 늘어선 전장 너머를 향해 날아갔다.
-쿠르르르릉!
전장의 저편, 필멸의 영역에서 벗어난 곳에선 신화 그 자체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성의 무리가 어둑한 새벽하늘을 밝게 물들이며, 지상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시커먼 어둠이 정신없이 꿈틀대며, 지상으로 쏟아지는 유성의 무리를 어둑하게 물들였다.
-콰앙! 콰아아앙!
하늘에서 떨어진 유성이 지표면 위로 내려앉을 때마다.
귀청이 떨어질 듯한 폭음과 함께, 대지 전체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슴푸레한 새벽의 어둠에 포근하게 안겨있던 대기가 때아닌 재난에 서글프게 울었다.
-후와아앙!
새벽하늘을 밝게 물들이며, 쏟아졌던 유성들이 모조리 지표면에 틀어박히자.
유성이 틀어박힌 크레이터마다, 형형색색의 신묘한 빛이 터져 나왔다.
크레이터를 중심축으로 삼아, 성좌들의 정체를 암시하는 별자리들이 대지에 아로새겨졌다.
-쿠르르르르.
별자리가 새겨진 크레이터마다, 별들의 군집으로 이뤄진 거대한 형상들이 압도적인 존재감을 흩뿌리며 그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각양각색의 빛을 흩뿌리며, 거대한 형상을 빚어낸 별들의 군집 사이에서 유난히 커다란 별 두 개가 안광처럼 강렬하게 번뜩였다.
「크으윽! 이 간악한 낙오자 놈들이 어디서 이런 힘을…!」
「감히 우리에게 맞서다니! 놈들을…. 크윽!」
놀랍게도 성좌들의 분신들이 마족들에게 밀리는 판국이었다.
별과 빛으로 이뤄진 육신들이 꿈틀거리는 불온한 어둠에 하나둘씩 휘감겼다.
하늘을 울리고 땅을 떨리게 하는 성좌들의 음성에 불신의 감정이 섞여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