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1화
-고오오오.
성좌들이 만들어 낸 허구의 우주 전체가 통째로 붕괴 되었다.
벚꽃처럼 흩날리는 별들의 파편이 시커먼 무의 공간 속에서 씨실과 날실처럼 계속해서 얽히며, 거대한 형상을 이루었다.
별과 시커먼 어둠이 불길하게 일렁거리며, 막후에서 모든 것을 조종해온 흑막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네가 버러지 한 마리의 싸구려 동정을 얻어, 시간을 흐름을 거스른 것도. 다른 장기말들의 운명을 뒤틀어, 새로운 결과를 초래한 것까진 재미있게 지켜봤다만…. 버러지들에게 이 몸의 의중을 알리는 것만은 도저히 참아줄 수 없지.】
파르스름하게 빛나는 별과 시커먼 어둠으로 구성된 얼굴이 비릿한 비웃음을 머금었다.
무의 공간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시커먼 공간 전체가 부르르 떨었다.
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갑자기 멈췄다가 흐르는 것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감히 고개를 들 수도 없을 만큼 강력한 압박감이 내 몸 전체를 옥죄어왔다.
‘비, 빌어먹을. 뭔 놈의 압박감이 이렇게나. 크으윽!’
내 영혼에 각인된 황금빛 신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대항하려 들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무의 공간 전체를 집어삼킨 ‘인과율’의 힘은 내가 상상한 수준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당장이라도 온몸을 으스러뜨릴 듯한 압박감에, 까득 깨문 어금니가 조금씩 부서졌다.
금방이라도 허무하게 부서질 듯, 온몸의 뼈가 비명을 질러댔다.
【호오…. 시건방진 혀를 더 놀리지 못하도록, 단번에 소멸시키려 했건만. 이 정도로 저항하다니…. 그래도 그 결과에 승복하지 못한 버러지들이 이번엔 제법 쓸만한 그릇을 키워낸 모양이야.】
-푸스스스.
비웃음을 짓고 있던 별과 어둠의 얼굴에 일순간 이채가 떠올랐다.
그것과 동시에, 무의 공간 전체에 가득했던 압박감이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 그 정도 실력을 지녔으면. 선을 넘은 것도 한 번쯤은 너그럽게 봐줄 만하지. 아무래도 너를 이 자리에서 소멸시키는 것보단 살려두는 게 훨씬 더 재밌을지도 모르겠어.】
별과 어둠이 번들거리는 얼굴이 비웃음과 흥미를 머금고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태양처럼 휘황한 광채를 흩뿌리며, 나를 오만하게 굽어보는 두 눈이 묘하게 휘어졌다.
【그동안 시건방지게 이 몸의 자리를 노렸던 ‘계승자’들은 무수히 많았지만, 하나 같이 상대할 가치가 느껴지지 않은 버러지들에 불과했지…. 하지만 네놈에게선 제법 ‘가치’가 느껴지는군.】
…이제껏 그들이 두려워, 온갖 더러운 수로 그들이 채 성장하기도 전에 나락에 빠뜨려왔던 새X가 뻔뻔하게 개소리를 지껄이긴.
인과율은 무게를 잡으며, 내게 헛소리로 범벅된 거짓말을 지껄였지만.
놈이 언급한 ‘수많은 계승자’들의 기억을 계승한 나는 놈의 거짓말을 바로 꿰뚫어 보았다.
당장 나조차도 위철용이 아니었으면, 그릇의 ㄱ자도 각성하지 못한 채.
고통과 절망 속에서 허무하게 생을 마감할 뻔 했었으니까.
“…헛소리. 새로운 계승자들이 태어날 때마다, 세상을 전쟁의 업화 속에 밀어넣은 것이 누구였지?”
평화롭던 세상에 게이트가 열려, 모두를 비극으로 치닫게 만든 것도
성좌라는 존재와 낙오자라는 존재들 사이에 끝없이 전쟁이 되풀이된 것도.
모두 자신의 자리를 계승할 ‘계승자’를 제거하기 위한 인과율의 더러운 음모였다.
게다가….
놈은 그 과정에서 수많은 무고한 이들을 절망으로 밀어넣으며, 자신의 뒤틀리고 가학적인 취미를 충족시켜왔다.
-까드드득!
이 세상을 개판으로 만든 장본인과 마주하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내게 한과 업을 맡긴 낙오자들의 한 맺힌 기억!
뭣 같은 세상에서 꾸역꾸역 살아왔던 밑바닥 시절의 분노!
무기력한 분노 속에서 소중한 사람들을 떠나보냈던 절망!
그 모든 것이 농축된 격렬한 분노가 활화산처럼 타올라, 내 영혼을 불태웠다.
곧이어 내 영혼에 각인된 황금빛 신력이 내 분노에 감응해, 격렬하게 들끓어 올랐다.
어둠이 가득했던 무의 공간이 조금씩 조금씩 금빛으로 물들어갔다.
【흐응…. 설마하니 역대 계승자들의 기억을 손에 넣은 개체가 나올 줄이야. 게다가 이 정도의 힘이라니. 네놈이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진정한 ‘신성’을 얻은 존재인가 보군.】
분노와 증오에 가득 찬 눈빛으로 별과 어둠으로 이뤄진 ‘인과율’을 바라보았지만.
놈은 오히려 흥미롭다는 눈초리로, 무의 공간을 금빛으로 물들인 나의 신력을 바라보았다.
좋을 대로 헛소리를 지껄이는 입엔 무엇이 그리도 재밌는지, 묘한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그래! 내가 네놈의 통치를 끝낼 존재다!”
-꽈과과광!
분노와 신력에 완전히 잠식되어 황금빛으로 물든 어둠달이 무의 공간을 반으로 쪼갰다.
수백, 수천, 수만 배나 커진 금빛 창날이 별과 어둠으로 이뤄진 육신을 단숨에 꿰뚫었다.
인과율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별들이 순식간에 폭죽처럼 연달아 펑펑 터져나갔다.
별들 사이를 휘감은 끈끈한 어둠이 금빛 섬광에 잡아먹혀, 허무하게 흩어져나갔다.
【호오…? 하찮은 버러지들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한 소체지만. 그래도 이 몸의 ‘분신’에 이만한 타격을 입히다니. 아주…. 아주 흥미로워…. 그래서 놈들이 최후의 순간까지 굴복하지 않았던 것인가? 이 알량한 희망을 위해?】
별과 어둠으로 구성된 몸이 단숨에 반으로 토막이 났음에도 불구.
흥미진진한 목소리로 뇌까리는 인과율은 그다지 타격을 입은 듯한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지금의 상황을 진심으로 기꺼워하는 듯한 눈치였다.
【놈들이 이렇게까지 성장할 줄 알았으면, 재미를 위해 그냥 내버려둘걸 그랬어. 실은 무력한 놈들을 학살하는 것도 이제 슬슬 질려가던 차였거든.】
혼자서 쉴새 없이 혼잣말을 지껄인 인과율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별과 어둠으로 구성된 육신 속에서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안광이 내 쪽을 향했다.
휘황하게 타오른 안광과 마주한 순간, 어째선지 내 영혼을 활활 불태우던 분노가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그 대신 마치 몬스터와 처음 마주했을 때와 같은 압도적인 공포가 내 영혼을 조금씩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버러지들이 억겁의 세월동안 기다려왔던 희망을 엉망으로 더럽히는 것도 나름의 신선한 재미가 있겠지.】
“더럽힌다고…? 내가 그렇게 쉽게 당해줄 것 같아?!”
영혼을 갉아먹는 공포와 뇌로 침투해오는 두려움이 등골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뻣뻣하게 얼어붙는 주먹을 꽉 틀어쥔 나는, 애써 태연한 척 호기롭게 인과율에게 포효를 내질렀다.
【귀엽군. 아주 귀여워…. 네놈은 역시 좋은 여흥이 될 수 있겠군.】
별과 어둠으로 이뤄진 얼굴이 피식 비웃음을 토해냈다.
반밖에 남지 않은 인과율의 육신이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무의 공간을 가득 채웠던 압도적인 존재감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버러지들에게 이몸의 의중을 알리는 것은 달갑지 않다만. 그래도 명색이 ‘계승식’이니…. 그래도 ‘동등한’ 위치에서 치러져야겠지. 네놈을, 아니 자네를 ‘후계자’로 인정한 만큼 말투부터 바꿔줘야겠어. 상으로 자네가 이곳에 찾아온 목적을 대신 이뤄 주지.】
“뭐라고? 그건 또 무슨….”
【그럼. 어디 그 멍청한 버러지들을 이끌고 내게 대항해 보게. 나른한 어둠 속에서 다가올 계승식을 즐거이 기다리고 있겠네. 귀여운 ‘후계자’여.】
알 수 없는 소리를 연달아 뇌까린 인과율은 비릿한 미소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별과 어둠으로 이뤄진 육신이 저절로 분해되더니, 시간이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
-파츠츠츠.
압도적인 존재감을 흩뿌린 인과율이 허구의 우주에서 사라지자, 놈의 존재로 인해 뒤틀렸던 풍경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헀다.
나풀거리는 별빛 가루들이 시커먼 하늘에 흩날리더니, 아름다운 별의 바다를 이루었다.
희미한 빛이 인간의 그것과 닮은 형상으로 빚어지더니, 별가루를 머금고 어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좌 ‘이야기를 속삭이는 자’의 모습이 되었다.
「…어.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죠?」
다시 모습을 드러낸 이야기를 속삭이는 자는 얼떨떨한 모양인지, 별빛이 깜빡깜빡 점멸하는 얼굴로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가 혼란에 찬 표정으로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자, 한숨을 내쉰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뻣뻣하게 굳어있는 위철용을 바라보았다.
“…놈이 제가 이곳을 찾아온 목적을 대신 이뤄준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말일까요?”
[아, 아마도 네놈이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성좌들이 전쟁에 참여하도록 설득하기 위해서였지.]
“놈이 성좌들이 전쟁에 참여하도록 ‘설득’한다고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럴 리가 없….”
-파츠츠츠츠!
심각한 표정의 위철용과 인과율이 남긴 말에 의미에 대해 해석하려는 사이.
갑자기 허공을 유영하던 별들이 다양한 빛을 뿜어내며,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은하수 전체가 떨리는 듯한 진동과 함께, 별과 빛으로 이뤄진 거인들이 우주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승천의 의회에서 전하노라. 이제부터 우리 의회는 고대의 맹약에 따라, ‘찬탈의 전쟁’에서 계승자를 지지하겠다.」
「계승자에게 끝없는 심연의 축복이 있으리니! 우리 심연의 구릉 또한 찬탈의 전쟁에 참여하도록 하지.」
「우리는 언제나 싸울 곳을 찾아 헤맸소. 우리 형제자매들 또한 찬탈의 전쟁에서 계승자를 위해 무기를 휘두를 것이오.」
별과 빛의 거인 중 유난히 강대한 존재감이 느껴지는 형상 셋이 앞으로 걸어나와, 내게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존재가 허구의 우주를 묵직하게 채워나가자, 다른 거인들도 머뭇머뭇 하나둘씩 내게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죠?”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 뜬금없이 내게 충성을 맹세하는 성좌들의 모습에 나는 당황한 눈으로 위철용을 바라보았다.
[보, 본존이 알 리가 있겠느냐? 승천의 의회에 심연의 구릉, 투쟁의 궁전까지…. 맙소사. 성좌 나으리들 중 유별나게 꽉 막힌 놈들이 모인 단체들까지 갑자기 네놈에게 충성을 맹세하다니.]
위철용도 갑자기 찾아온 혼란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내게 부복한 성좌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잔뜩 동요된 채로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위대한 분! 모두의 존중을 받아 마땅할 분의 목소리께서 저희를 당신께 인도했습니다. 계승자이시여.」
내가 위철용에게 했던 질문을 오해한 것일까?
갑자기 자신을 승천의 의회 소속이라 밝혔던 성좌가 웅웅거리는 목소리로 내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해왔다.
“위대한 목소리가 당신들을 내게 인도했다고? 그게 무슨 소리지?”
「그분께선 신화 속에 구전되어 온 찬탈의 전쟁…. 간악한 낙오자들이 드높은 천상의 질서를 기휘를 침범하는 망측한 전쟁에 대해 속삭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선 우리더러 당신께 합류하여, 거짓된 신성을 손에 넣은 낙오자들을 처단하라 이르셨소이다.」
…아무래도 이 양반들은 인과율의 농간에 완전히 속아 넘어간 상태인 것 같군.
의도가 상당히 왜곡되긴 했지만, 인과율이 내게 성좌들을 붙여준다는 말은 사실인 듯했다.
내 앞에 무릎을 꿇은 성좌들은 순전히 인과율의 여흥에 따라, 마족들과의 전쟁에서 나를 지원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게다가 시작의 탑에 보관된 분신을 사용해도 된다는 허가가 떨어졌으니. 우리는 당신의 검이 되어. 닥쳐올 전쟁에서 낙오자들을 기꺼이 처단할 것이외다.」
「강림할 준비는 이미 끝마쳐 두었습니다. 계승자이시여…. 마땅한 승리를 대령하겠나이다.」
어찌나 오만한 자신감인지. 놀랍게도 인과율은 성좌들에게 자신이 걸어놓은 제약 대부분을 풀어버린 상태였다.
튜토리얼 타워에 보관된 분신을 사용해, 기꺼이 하계에 강림하겠다는 성좌들의 별빛 얼굴엔 그 어떠한 망설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이 빌어먹을 자식이 뭔 생각으로 내게 성좌들을 붙여주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른 이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이들을 최대한 유용하게 써먹어야겠어.
생각을 정리한 나는 내 앞에 부복한 성좌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당신들이 해 줘야 할 일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