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0화
“그래서. 그쪽의 도움이 필요하단 소립니다. 당신네도 가만히 앉아서 당하는 건 썩 달가운 일이 아니잖아요?”
조금 어벙해 보이긴 해도, 상대는 필멸의 인지 수준을 훌쩍 뛰어넘은 성좌였기에.
나는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 어떠한 거짓도 과장도 없이 사실만을 털어놓았다.
믿기 힘든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서인지, 내 이야기를 듣는 내내 ‘이야기를 속삭이는 자’의 몸을 구성하는 별들은 마치 눈을 감았다 뜨는 것처럼 흐릿하게 깜빡거렸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역시, 신화와 설화 속에 아로새겨진 고대의 전쟁들은 거짓이 아니었나 봅니다.」
“신화 속에 새겨진 고대의 전쟁들이라니요?”
「찬탈의 전쟁. 성좌들의 업무 지침서에까지 나와 있는 신화로 저희 사이에선 꽤 유명한 신화입니다. @#율의 지엄한 뜻에 따라. 세상의 질서가 뒤바뀐 전쟁들이 언급되어 있었죠.」
크리슈나와 위철용이 말해줬듯, 내 이야기는 현시대에 군림하는 성좌들로선 도저히 믿기 힘든 사실들로만 가득 차 있었지만.
의외로 이야기를 속삭이는 자는 신화 속의 내용과 비교까지 해가며,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해주었다.
…찬탈의 전쟁이 업무 지침서에 나와 있을 만큼 ‘유명한’ 신화라고?
그것도 모르다니, 도대체 위철용 이 어르신은 성좌 시절에 얼마나 태만하게 지냈던 거야.
「뭐, 다른 성좌분들은 워낙 고고한 자존심을 지닌 존재들이다 보니. 낙오자 따위와의 전쟁을 그저 허황된 이야기로 치부하고 있었지만요.」
[크흠. 크흐흐흠! 그, 그래. 너무 허황되기 짝이 없는 이야기이다 보니. 본존도 그만 깜빡 잊었던 모양이니라.]
내 오묘한 시선을 느낀 탓인지, 위철용은 괜히 민망한 헛기침을 토해내며 성좌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며 변명아닌 변명을 덧붙였다.
“다른 분들이 그것을 그저 허황된 이야기로 치부하고 있다니…. 그쪽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만. 과연 그들이 이쪽의 말을 믿어줄까요?”
「당연히, 절대로 믿어주지 않겠죠. 부끄럽습니다만. 신입 성좌로서 아직 권한이 없기도 한데다. 뭣보다 저는 그들 사이에서도 ‘괴짜’ 취급을 받고 있는지라….」
애석하게도 성좌. 이야기를 속삭이는 자는 위철용이 짐작했듯, 성좌들 사이에서도 그다지 대단치 않게 여겨지는 존재인 듯했다.
내 이야기를 날것 그대로 믿어주는 것과는 별개로, 그에겐 ‘하계를 지원해달라.’라는 요구를 다른 성좌들에게 전달해줄 만큼 강력한 발언권이 없었다.
면목이 없다는 듯, 말끝을 흐린 그는 별들로 이뤄진 머리를 힘없이 떨구었다.
[말하지 않았더냐. 이 성좌 놈은 미숙하기 짝이없는 ‘신입’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네놈에게 우호적이라곤 하나. 그에겐 네놈의 이야기를 전해줄 만한 힘도 권력도 없느니라.]
‘그래도. 처음 생각했던 것보단 훨씬 낫지 않습니까? 중요한 건 처음으로 접촉한 성좌가 ’우호적‘이다는 거죠. 게다가 딱 좋은 직책까지 지니고 있구요.’
비록 이야기를 속삭이는 자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약한 권력을 지니긴 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내게 우호적이란 것과 그가 ‘이야기’를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즉석으로 아이디어를 떠올린 나는 고개를 푹 떨군 성좌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그것’을 제시할 수밖에 없겠군요. 다른 성좌분들에게 전해주시겠습니까? 그들이 낙오자들을 처리하는 데 일정 수준의 도움을 준다면, ‘채널’ 창구가 다시 열릴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예…?」
“마침 이야기를 담당하는 성좌이시니. 설화와 신화 속의 내용을 그럴듯하게 섞어 넣으면, 그분들을 확실히 더 잘 설득하실 수 있겠네요. 어때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으십니까?”
이야기를 속삭이는 자는 이명에 걸맞게, 성좌들 사이에서 구전되어온 신화와 설화를 관리하는 성좌였다.
신입 성좌에 불과하기에 그의 권한과 권력은 보잘것없는 수준이지만, 그가 관리하는 신화와 설화엔 다른 성좌들을 움직이기 충분한 권위가 잠재되어 있었다.
이야기를 속삭이는 자에게 그것을 상기시켜준 나는 히죽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 그거야 하, 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 그분들은 ‘채널’을 닫은 이를 굉장히 증오하고 있습니다! 마, 만약 채널을 닫은 이가 당신이라는 것을 그분들이 알게 된다면….」
“그게 무슨 문제라도? 저는 ‘찬탈의 전쟁’을 성좌들의 승리로 이끌기 위해, 위대한 뜻에 따라 결단을 내린 것뿐입니다만.”
신력을 동원해, 헌터들과 성좌들 사이의 연결 창구를 닫아버린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내가 성좌들을 도발하기 위해 저지른 짓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뻔뻔하게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짓.’으로 포장했다.
얼굴에 철판을 두른 표정으로 이야기를 속삭이는 자를 바라보자, 그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내뱉는 내 모습을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어차피 제 목적은 찬탈의 전쟁에서 그쪽이 속한 세력, 즉 성좌들 측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저도 거짓말을 해서 양심이 좀 찔리긴 합니다만. 서로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어요?”
「좋은 게 좋은 것이라니….」
“그러니까. 기왕이면 그들이 홀딱 넘어가게끔. 각종 설화와 신화를 적절하게 엮어 설득해 주세요.”
「그, 그래도…. 그들을 속이면 후폭풍이….」
[정말이지 소심하고 각박하기 짝이 없는 종자로다. 어째서 그들이 이 소심한 놈에게 이야기나 관리하는 지루한 업무를 맡겼는지 알겠군.]
대의를 위해서라지만, 다른 성좌들을 속이는 것이 못내 두려운 모양인지.
이야기를 속삭이는 자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계속해서 말을 우물거렸다.
그 소심하면서도 답답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위철용의 입가에 특유의 냉소가 맺히기 시작했다.
“뭐, 그렇게나 그들을 속이시는 게 두려우시다면. 가만히 계셔도 됩니다.”
「네, 네?」
“대신, 저는 당신이 아닌 다른 성좌와 접촉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여기서 사고를 저지를 수밖에 없겠죠. 가령…. 탑의 시스템을 총괄하는 석판을 파괴한다든지.”
황금빛 신력이 휘황하게 넘쳐 흐르는 손으로 어둠달을 꽈악 틀어쥐자.
이야기를 속삭이는 자의 몸을 구성하는 별들이 정신없이 연달아 점멸하더니, 이내 창백하게 탈색되어가기 시작했다.
“아니면….이곳에 안치된 별자리를 모조리 부순다든지. 뭐, 그쪽의 ‘상급자’ 나으리를 소환하기 위해선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네요.”
황금빛 신력을 아우라처럼 두른 채, 차갑게 입꼬리를 뒤틀자.
이야기를 속삭이는 자의 몸을 구성하는 별들이 이번엔 꽈드득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렇게 소심하게 행동하며, 나와 엮이는 것을 피하려던 그의 시도는 알 수 없는 곳으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했다.
“신화까지 섭렵하신 분께서, 찬탈의 전쟁이 뭘 의미하는지 모르시는 건 아닐테고.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저도 과격한 방법을 쓸 수 밖에요.”
「기,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길 원하는 이들과 그들의 자리를 찬탈하여 새로운 질서를 열고자 하는 이들의 전쟁. 그것이 바로 억겁의 세월 동안 반복되어 온 찬탈의 전쟁 아, 아닙니까. 만약 저희 측이 패배해도 그것은 순리….」
뭐…? 새로운 질서를 열고자 하는 이들이 ‘순리’에 따라 움직인다고?
성격이 워낙 유약해서 그런건가, 아니면 성좌 주제에 세상의 물정을 모르는 건가?
-성좌들의 시대가 저물 거야.
이야기를 속삭이는 자가 더듬거리면서 변명을 웅얼거린 순간,
엉망으로 뒤엉킨 머릿속으로 기억 하나가 폭풍우 치는 날 밤의 번갯불처럼 번쩍였다.
아스모데우스와 처음 마주했을 때의 기억, 그날 놈의 입에서 들었던 음습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 내 기분을 불쾌하게 물들여갔다.
“잘 들어요. 패배? 그건 순리 따위가 아닙니다. 빌어먹을 존재가 그렇게 의도한 거라구요.”
머리가 민활하게 핑핑 돌며 사고의 연쇄가 이어졌다.
한번 번쩍 밝아진 머릿속에 계속해서 새로운 추론들이 떠올랐다.
떠오른 추론들이 서로 부딪혔다. 이어진 사고가 폭발하여 무서운 진실을 그에게 전했다.
“인과율. 그 빌어쳐먹을 존재가. 순전히 자신의 재미를 위해. 당신들을 없애려는 겁니다.”
「…차, 찬탈의 전쟁에서 저희가 패배하는 것이 그분의 의도였던 말입니까!」
마치 둔중한 둔기로 머릿속을 강타당한 듯한 표정이 별로 이뤄진 얼굴에 떠올랐다.
머리에서 비롯된 오싹한 한기가 전신으로 퍼져 나간 모양인지, 그의 육신이 얼어 붙었다.
얼굴이 경악한 표정 그대로 뻣뻣하게 굳었다. 손발이 꽁꽁 얼어붙었다.
별들의 군집으로 이뤄진 그의 육신에 소름처럼 무언가 새하얀 돌기들이 오소소 돋아났다.
「마, 말도 안 돼! 고, 고작 그런 이유로, 세계가 이 지경이 되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당신들은 이미 그들의 전쟁 속에 휩쓸린 몸이에요. 제 목적은 이번에야말로. 그 역겨운 전쟁으로부터 당신네들을 포함한 모두를 구원하는 거란 말입니다.”
어째선지 이야기를 속삭이는 자를 바라보는 나의 황금빛 안광 속에서 연민의 감정이 뿜어져 나왔다.
「이번에야말로…라고? 자, 잠깐만요! 서, 설마 다른 설화와 신화들도!」
심상치 않은 단어에 얼어붙었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 모양이었다.
이야기를 속삭이는 자가 다급한 마음에 황급히 손을 뻗어 내 어깨를 콰악 붙잡으려던 순간!
“…뭐야?”
-푸스스스.
별안간 이야기를 속삭이는 자의 별로 이뤄진 몸이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경악한 듯 바르르 떨리던 별들이 모두 분해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내 어깨를 단단히 붙잡은 그의 거대한 손이 별빛 가루가 되어, 허무하게 흩날렸다.
-쿠르르릉!
곧이어 거대한 우주 전체가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커먼 허공을 유영하던 별들이 모래처럼 바스러지며, 시공간 전체가 찌그러들었다.
벚꽃처럼 덧없이 흩날리는 별들의 별빛 가루가 한 곳으로 응집되어, 일정한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비, 빌어먹을. 애송아, 네놈의 발언이 선을 넘어버린 모양이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눈앞에 벌어진 현상을 바라본 위철용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놀랍게도 그의 조그마한 입에선 그답지 않게 공포와 경외에 전 목소리가 떨리듯 흘러나왔다.
【하는 짓이 제법 재미있어, 그동안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만. 이번만큼은 선을 넘었다. 시건방진 후계자여.】
흩날리던 별들은 촘촘히 얽히고 얽혀, 거대한 얼굴의 형상을 이루었다.
무심하면서도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위엄이 서린 얼굴이 나를 바라보며, 지독히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셨군. 인과율 나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