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8화
내게 충성을 맹세한 황태용과 먹구름의 일원들, 그리고 오닉스 길드원들을 강화한 뒤.
발걸음을 돌린 나는 우리 쪽에 합류한 태백, 오행, 금랑, 건곤 길드의 일원들과 남부 연합을 차례로 찾아갔다.
-후와아앙!
그리곤 온몸에서 상서로운 황금빛을 너울거리며, 마치 세례를 내려주듯 그들에게도 오닉스 길드원들에게 베풀었던 것과 똑같은 성질의 은혜를 베풀었다.
수많은 헌터들이 레벨이란 시스템에 얽매여있던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존재력 포인트란 성좌들의 불합리한 제한에서 벗어나, 마음껏 자신들을 강화했다.
-이게 미국에서 5년 예산을 쏟아부어, 간신히 구입했다는 황혼의 인도자인가?
-세상에! 종말의 송곳니도 있어! 일본 놈들이 이걸 구입하느라 홋카이도를 포기했었다는데!
-캬! 내가 신화급 아티팩트를 마음대로 구입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게다가 불만을 느낀 성좌들이 헌터들에게 해꼬지를 하지 못하게도록. 나는 그들에게서 포인트 숍의 관리 권한까지 강탈해온 상태였기에….
대부분의 헌터들은 그동안 그림의 떡이었던 VIP 상점의 값비싼 물건들을 마음껏 구입하였고.
이제껏 상점 목록에만 존재했던 초호화 장비들이 모습을 드러내어, 그들의 전력을 대폭 강화시켰다.
-털썩.
그렇게 그동안 인연을 맺었던 이들을 모두 찾아다니며, 전쟁준비를 끝마친 뒤.
나는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무너지듯 몸을 뉘었다.
“대충 이 정도면. 모두를 회귀 전 상위 랭커들 급 이상으로 끌어올린 셈인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권능으로 강화된 헌터들은 회귀 전의 상위 랭커들을 압도하는 수준으로까지 성장해버린 상태였다.
내 권능으로 인해, 레벨과 존재력이란 굴레에서 벗어나 버렸기에.
회귀 전의 세상에서 정점으로 군림했던 어떤 헌터들도 그들 앞에선 평범한 일반인이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왜냐하면, 그때 그 시절엔 상위 랭커들 중에서도 국가와 동맹국의 지원까지 받아가며 레벨을 한도까지 올렸던 이들은 고작 다섯에 불과했고.
안타깝게도 그렇게 레벨을 끝까지 올렸던 이들조차, ‘너무 강해서 재미없다.’는 이유로 성좌들이 변덕을 부린 탓에 존재력 포인트를 넉넉히 후원받지 못했었으니까….
오죽하면 당시 헌터 랭킹 불변의 1위이자 미국이 자랑하던 세계 최강의 전설적인 헌터 ‘황제’ 에드워드보다, 지금의 헌터들이 훨씬 더 강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들조차 성좌 시절의 힘을 되찾은 마족들을 상대하긴 역부족인데….”
내게 은혜를 받은 헌터들은 군주급 마족 정도는 단숨에 해치울 만큼의 무력을 지니게 됐지만.
애석하게도 성좌의 힘을 되찾은 마족에게 비교하자면, 군주급 마족 ‘따위’는 태양 앞의 반딧불보다 더 못한 존재였다.
군주급 마족을 포함해, 필멸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마족들을 상대할 순 있을지 몰라도.
아무래도 아직 이들의 힘만으론 성좌와 비견되는 힘을 지닌 마족들을 상대하긴 심각하게 역부족이었다.
“둘…. 아니, 이제 열다섯이군. 그래도 그들과 대적할만한 힘을 지닌 전력이.”
영혼에 깃든 파편을 각성시킨 강태백과 김혜옥, 그리고 먹구름들이 지닌 신력은 성좌 본인이 직접 화신의 형태로 강림한 것과 비등할 만큼 놀라운 위력을 자랑했다.
그렇기에 그들이라면 성좌의 힘을 되찾은 마족들을 능히 상대할 수 있겠지만….
그런 그들조차 마흐라브처럼 과거에 높은 위계를 차지했던 개체들을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성좌라는 것들이 사건의 심각함을 좀 깨닫고, 어느 정도 활약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과거에 높은 위계의 성좌들이었던 마족들을 상대할만한 존재들은, 현재의 성좌들 뿐이었다.
그들의 무거운 엉덩이를 자극하기 위해, 모든 이들의 채널을 닫아버리는 강수를 두긴 했지만.
과연 그들이 이 사태에 진지하게 나올지는 나조차도 알 수 없는 미지수였다.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쉰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캔 꺼내. 그대로 들이켰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맥주가 선사해주는 서늘한 쾌감이 타들어 가는 속을 달래주었지만.
앞으로 있을 전쟁에서 전력이 부족하다는 근본적인 문제는 아직도 해결할 길이 요원하기만 했다.
“최소한 말이라도 통했으면…. 아. 그러고 보니 뭔가 잊고 있었던 게 있었네.”
성좌들과의 대화를 생각한 순간, 머릿속에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 하나가 떠올랐다.
피식 실없는 실소를 흘린 나는 영혼의 우주를 열어, 내가 원래 사용하던 특성 트리를 끄집어냈다.
아련한 눈빛으로 이제는 빛이 완전히 바래버린 특성 트리를 바라본 나는 신력을 사용해, 그곳에 속박된 이의 영혼을 불러냈다.
[조심해라! 애송앗! 네놈의 영혼이 왜곡되고 있어!]
…깜짝이야.
특성 트리에서 위철용의 영혼을 꺼낸 순간, 불독을 닮은 비췻빛 얼굴이 갑자기 귀청이 터질 듯한 고함, 아니 머리가 깨질듯한 고함을 내질렀다.
머릿속을 웅웅 울린 고함의 내용으로 미뤄보건대, 아무래도 위철용의 시간은 마흐라브에게 시스템을 훼손당한 시점에서 멈춰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런 저런 일이 바쁘다 보니, 이 어르신도 까맣게 잊어버렸지 뭐야.
[…간악한 낙오자 놈이 어떻게 신성을 되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이지 강력한 신력이…. 으엉?]
짤막한 팔다리를 정신없이 놀리며, 주변을 경계하던 위철용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낯익다면 낯익을지도 모르는 집안의 풍경을 둘러본 그의 시선이 내게 향하자.
위철용의 자그마한 두 눈이 왕방울처럼 커지기 시작했다.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여, 여긴?! 애, 애송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게, 게다가! 네놈의 육신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아, 아니 ‘당신’의 영혼에서 느껴지는 이 기운은…?!]
“평안하셨습니까. 어르신? 참으로 오랜만이네요.”
너무 놀란 나머지, 평소의 위철용의 입에서 그답지 않게 괴이쩍은 존댓말이 튀어나오자.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나는 위철용의 파르르 떨리는 손을 꼬옥 붙잡아 주었다.
[마, 말도 안 돼.]
신력이 자애롭게 너울거리는 손이 영과 육의 한계를 초월해, 위철용의 자그마한 손을 붙잡자.
그렇지 않아도 왕방울처럼 커진 그의 눈이 더 커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더욱 커졌다.
당장이라도 눈알이 튀어나올 듯한 위철용의 모습에 쿡쿡 웃은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하나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 이거라도 마시면서 들으시죠. 그동안 실로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요.”
*****
“…그렇게 전 새로운 질서를 짊어질 존재, 계승자로 각성한 겁니다.”
오랫동안 이어진 이야기가 끝나자.
위철용은 살짝 멍한 눈으로 냉기가 서린 맥주캔을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원래대로라면 그가 만질 수 없어야 할 맥주캔이 위철용의 반투명한 손에 붙들린 채, 이리저리 움직였다.
잔뜩 주입된 신력으로 인해, 실체와 비 실체의 구분이 사라진 맥주는 실체가 없는 배후령도 섭취할 수 있는 기물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허어…. ‘계승자’라니…. 그 청동빛 고철 덩이의 말이 사실이었단 말이더냐?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그릇’이란 존재가 정말 그런 것을 뜻하는 것일 줄이야.]
혼잣말을 중얼거린 위철용은 어떻게 반응해야할 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씰룩거렸다.
굉장히 어색한 손놀림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맥주를 들이킨 그는 입가에 거품을 묻힌 채, 탄성인지 뭔지 모를 숨소리를 길게 토해냈다.
[크으으…. 하여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보다 놈의 농간으로 인해. 마족 놈들이 기어코 일을 저질렀다 했느냐? 놈들이 신성을 되찾았다고?]
“네…. 성좌의 시대를 저물게 하겠다는 말이 헛소리가 아니었어요.”
낙오자, 마족들은 절대로 성좌의 기휘를 범할 수 없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어버렸다.
인과율의 개입으로 인해, 선대 성좌들이 남긴 파편을 흡수한 마족들은 성좌 시절의 힘과 권능을 오롯이 회복한 상태였다.
그리고 놈들은 그 되찾은 힘을 토대로 자신들의 잃어버렸던 지위를 되찾기 위해,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이 인과율의 계획에 놀아나는 것인지도 모른 채로 말이지….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빛의 찬란함을 시샘하며 지냈던 놈들이 바로 낙오자란 놈들이니…. 아무래도 정녕, 그 청동 양반의 말대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겠구나. 그것도 아주 큰 전쟁이 말이다.]
언제는 끝까지 찬탈의 전쟁이 말이나 되냐고 일축하면서, 크리슈나의 말을 못 믿겠다더니.
그래도 이젠 어느 정도 믿음이 가는 모양인가 보군.
위철용은 착잡한 표정으로 손에 쥔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곤 작은 손을 용케 까득 움직여, 캔을 찌그러뜨린 그는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착잡한 표정으로 천장을 노려 보았다.
[성좌 놈들에게 생각이라는 게 있다면, 네놈에게 협력하여 적극적으로 싸워야 할 테지만. 본존이 예전에 그랬듯, 놈들은 직접 확인하기 전까진 네놈의 말을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이야. 성좌라는 족속들은 대개 쓸데없는 아집에 가득 찬 늙은이들이니깐.]
이죽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마친 위철용은 킬킬 웃으며, 창밖에 펼쳐진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바라보자,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를 배경으로 저 멀리 우뚝 서 있는 튜토리얼 타워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애송이 네놈이 그들과 ‘설득’을 시도해야겠지. 시작의 탑. 저곳에 가면 놈들과 접선을 할 수 있을 것이니라. 물론, 놈들이 우호적으로 나온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지만.]
“…그러고 보니, 튜토리얼 타워엔 그들의 눈과 귀가 가득했었죠.”
튜토리얼 타워라. 왜 미처 그 생각을 못 했지?
생각해보니 그랬다.
새로운 관음의 대상을 찾기 위해, 튜토리얼 타워엔 언제나 새롭게 각성할 헌터들을 지켜보는 성좌들의 눈과 귀가 도처에 깔려있었다.
인과율이 정해놓은 제약으로 인해, 성좌들은 하계의 상황을 자신과 계약한 헌터의 시선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관음할 수 있었지만.
유일하게 성좌들이 하계의 필멸자들을 자유롭게 살펴볼 수 있는 튜토리얼 타워만큼은 그런 제약에서 벗어난 장소였다.
[물론, 지금은 하계의 필멸자들에게 은총을 내려줄 시기가 아니라. 하계를 바라보는 이들은 얼마 없을 테지만. 그래도 거기엔 탑의 관리를 맡은 성좌가 상주하고 있느니라.]
“그를 통해서 다른 성좌들과 접촉하라는 말씀이시군요.”
원래대로라면, 성좌들이 하계를 관음할 수단을 전부 막아버린 뒤.
마음이 급해진 그들이 자신들의 사도에 화신의 형태로 강림하는 상황을 의도했었지만.
아무래도 여러모로 급한 상황이니만큼, 무작정 그들의 반응을 기다리는 것보다 이쪽에서 먼저 접촉하는 편이 더 나아 보였다.
결심이 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간을 좁혀 창문 너머의 튜토리얼 타워를 노려보았다.
“계승자들의 기억에 의하면 튜토리얼 타워엔 만일을 대비해, 성좌들의 화신이 잠들어 있다죠? 필요에 따라 ‘약간’ 폭력적인 방법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