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 잘생겼다!-276화 (276/309)

제276화

-콰앙!

쓰러진 놈들을 향해, 가볍게 발을 구르자.

어마어마한 양의 신력이 내 몸에서 풀려나와 대지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꿈틀거리는 황금빛 신력이 대지 속으로 녹아들자, 내 의지에 감응한 대지가 이적을 일으켰다.

-꾸드드득!

황금빛 쇠사슬이 대지에서 솟구쳐, 무력화된 채로 땅바닥에 널브러진 마족들을 포박했다.

찬란하게 번쩍이는 사슬 속에 번데기처럼 꽁꽁 묶인 놈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지만.

안타깝게도 사슬에 실린 신력은 마족들 따위가 어떻게 해볼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놈들을 적절한 곳에 쳐박아 두세요. 꽉 묶어놨으니 꼼짝도 못 할 겁니다.”

날파리 떼처럼 많은 마족들 사이에서 유난히 강력한 기운을 풍기는 놈들을 포획했으니.

더는 이까짓 잔챙이 놈들 따위에게 시간을 끌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오닉스 길드원에게 놈들의 처분을 맡긴 뒤.

온몸에 황금빛 신력을 두른 나는 정적이 찾아온 전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저벅.

강자 특유의 여유가 깃든, 느릿하기 짝이 없는 발걸음이 대지를 디딜 때마다.

딱딱한 전투화 밑창 모양대로 움푹 파인 발자국이 휘황한 금빛을 머금었다.

감히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양의 신력이 내 몸에서 풀려나와 대지로 스며들었다.

-번-쩍!

푹 파인 발자국을 금빛으로 물들이던 황금빛 아우라가 대지를 타고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곧이어 대지가 태양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처럼, 눈이 멀어버릴 듯한 황금빛 광채가 세상을 온통 금빛으로 물들였다.

《…!》

오닉스 길드를 습격한 마족들은 중급 마족부터 시작해서 고위 마족까지 골고루 끼어있었지만, 압도적인 힘 앞에선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강렬하게 이글거리는 황금빛에 노출된 마족들은 너나할 것 없이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순식간에 재로 변해버렸다.

“마, 말도 안 돼. 사, 상처가 치유되고 있어…?”

세상을 황금빛으로 물들인 금빛 광채는 단순히 파괴적인 행위만을 행한 것이 아니었다.

만물을 자애롭게 보듬는 햇빛처럼, 반짝이는 황금빛이 쓰러진 오닉스 길드원들을 휘감자.

그들의 몸에 가득했던 상처들이 삽시간에 멀끔하게 치유되었다. 부러지고 찢어진 뼈와 근육이 감쪽같이 재생되었다.

-푸스스스.

곧이어 덧없게 파스스 흩날리는 잿가루 속에서 소멸해버린 마족들이 남긴 한과 업의 응어리가 반딧불처럼 어룽거리며 날아와, 내게 흡수되었다.

따스하게, 자애롭게 너울거리는 황금빛 아우라 속에서 수없이 많은 낙오자들의 뒤틀려버린 영혼이 안식을 되찾았다.

“한 많은 미련일랑 내게 맡기시고. 좋은 곳으로 잘들 가시라고. 당신들의 복수는 내가 해줄 테니.”

반딧불처럼 날아든 수없이 많은 한과 업의 응어리가 내 몸으로 흡수되자.

머릿속으로 수없이 많은 이들의 기억이 해일처럼 밀려와,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다양한 사연을 지닌 이들의 기억을 마주하며 쓰게 웃은 나는 그들의 영혼이 승천한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느새 어둑하게 물들어버린 밤하늘에선 시린빛을 흩뿌리는 별들의 무리가 차갑게 빛나며, 새카만 하늘을 창백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

“도, 도대체 자네. 아, 아니 당신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나의 개입으로 인해,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되자.

가문의 ‘어르신’들과 목숨을 건 사투를 하고 있었던 황태용이 내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눈앞에서 펼쳐진 이적 행위에 경외감을 느낀 모양인지, 나를 대하는 그의 말투는 어느새 존댓말로 바뀌어 있었다.

어슴푸레한 밤하늘처럼 창백하게 질린 얼굴엔 두려움과 공경심이 골고루 뒤섞여 있었다.

“예전에 인사드리지 않았습니까? 태백 길드의 산군. 설용호입니다.”

“무, 무슨 소리를…. 그, 그렇게 강력한 힘을 지닌 이가. 평범한 인간일 리가 없잖습니까.”

장난스레 꾸벅,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나는 황태용에게 새삼스러운 인사를 건넸지만.

나를 바라보는 황태용의 얼굴은 여전히 두려움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리고 잔뜩 굳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그의 목소리에선, 강태백이 약점을 쥐고 흔들었을 때완 차원이 다른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그때 그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어르신’들이 바로 이들인가?

파랗게 질린 황태용 너머로 나를 경계하듯 바라보는 날카로운 인상의 노인들.

그들의 몸에선 과연, 일반적인 헌터라고 생각할 수 없을만큼 강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 열 세명 전원은 내가 영혼에 깃든 ‘파편’의 힘을 일깨워 주기 전의 강태백을 가볍게 능가할만큼의 강자였다.

“뭘요. 특별한 인연이 있어 대단치 않은 힘을 손에넣었을 뿐. 그렇게까지 대단한 존재는 아닙니다.”

황태용에게 ‘그릇’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줄 이유도 의리도 없었기에.

나는 완전히 나에 대한 경외심에 잡아먹힌 황태용에게 겸손하게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를 바라보는 그의 흔들리는 시선과 날카롭게 눈을 빛내는 노인들의 시선에선 경계의 빛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떠드는 이 일수록 수상한 구석이 많은 법이지. ‘평범한’ 인간. 아니 필멸의 영역을 옛저녁에 벗어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이가 무슨 겸손한 소리인가.”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노인들 중 선두에선 노인의 입에서 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늙은 까마귀를 연상케하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엔 의미심장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헌터라는 같잖은 존재들이 나타기 훨씬 오래 전부터, 가문의 ‘먹구름’으로서 암약해오며 온갖 강자들과 조우해봤지만. 자네처럼 필멸의 영역을 벗어난 이는 처음이로군. 솔직히 놀랐으이.”

코가 까마귀 부리처럼 휘어진 노인의 눈빛이 새파랗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몸에서 보통 헌터라면 감당하기 어려울만큼 강렬한 살기가 새어나왔다.

그리고 서슬퍼렇게 빛나는 살기 속에선 놀랍게도 희미하게 신력이 느껴졌다.

…호오. 어쩐지 심상치 않은 기운을 흩뿌린다 싶었더니.

이들의 영혼에도 ‘파편’이 심어져 있군. 크리슈나가 말했던 ‘보험’이 바로 이들을 뜻하는건가?

아무래도 크리슈나와 낙오자들이 나를 위해 안배한 ‘파편’들이 모두 마족들 손에 넘어갔을 때를 대비한 ‘보험’이 바로 이들인 것 같았다.

화안금정을 통해 노인들의 영혼을 꿰뚫어 보자, 그들의 영혼엔 낯익은 성좌의 ‘파편’들이 박혀있었다.

…내겐 너무도 익숙한 크리슈나의 기운이 느껴지는 파편들이.

“필멸의 영역에선 이 힘을 꺼낼 기회가 없었지만. 자네가 상대라면…. 으헉!”

내 몸에 깃든 크리슈나의 힘과 권능을 슬쩍 내 몸 위에 두르자.

불꽃과도 같이 너울거리는 살기를 눈으로 토해내며, 나를 바라보던 노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래요? 제가 누구길래 그런 말씀을 하실까….”

미소를 머금은 내 육신을 통해, 크리슈나의 신력이 사방으로 흩뿌려지자.

선두에 선 노인, 아니 잔뜩 경계심을 내비친 채 나를 바라보던 노인들 전원의 몸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아, 아아아…. 너, 너는. 아, 아니 당신은….”“오, 오오오. 전설이 사실이었어! 수백년, 수천년의 기다림이 바로 우리 대에서 끝나다니!”

크리슈나가 비밀리에 안배한 만큼, 아무래도 노인들 사이에서도 뭔가 전해져내려오는 것이 있는 듯 했다.

창백하게 질렸던 노인들이 짓무른 눈에서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흐느끼듯 주저앉은 노인들은 나를 향해, 경건한 태도로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아아아! 세상의 뒤편에서 암약해온 저희 먹구름의 진정한 주인이시여!”

“마침내 오셨나이까! 고대의 약조에 따라, 저희들은 기꺼이 당신의 수족이 되겠나이다!”

“그동안 저희들이 준비한 모든 것은 오롯이 당신의 것! 저희는 이날만을 위해 살아왔나이다!”

…뭐야. 비상시를 대비한 ‘보험’치고는 내용이 뭔가 거창한데?

바닥에 몸을 납작 엎드린 채, 뜨거운 눈물을 흘려대는 노인들의 입에선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부담스러운 소리들이 연달아 흘러나왔다.

잔뜩 격양된 표정으로 흐느끼듯 알 수 없는 소리를 외쳐대는 그들이 표정은 광신도의 그것을 연상케 할만큼 맹목적인 믿음이 깃들어 있었다.

“어, 어르신들? 지금 도대체 이게 무슨….”

“이 철없는 애송이놈! 지금 어디서 허리를 꼿꼿하게 피고 있는 것이냐!”

“어서 예를 표하지 못할까! 우리 가문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진정한 주인 앞에서 그렇게 멍청한 태도를 보이다니! 우리들의 판단이 흐려진 모양이로군!”

황태용은 반쯤 넋을 잃어버린 표정으로 노인들에게 질문을 하려 했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따스한 대답이 아니라, 서릿발처럼 차가운 질책이었다.

어째선지 격노한 표정의 노인들은 그를 강제로 붙잡아, 내 앞에 꿇어 앉혔다.

“이 모자란 놈의 충성을 받아주십시오. 존귀한 분이시여. 못났지만 그래도 저희가 오랜 세월동안 당신을 위해 준비한 세력을 이끄는 자입니다.”

…이거 만일을 대비한 ‘보험’치고는 나름대로 괜찮은 것 같은데?

원래대로라면 황태용을 설득해, 마족들의 잔당을 칠 세력을 빌릴 예정이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보험’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내 앞에 넙죽 엎드린 황태용을 바라보며, 나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거 생각보다 일이 쉬워지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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