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2화
사방을 가득 채웠던 김종대의 지저분한 살점들이 황금빛으로 변해 사라지자.
어째선지 놈과 전투를 치르기 전과는 다른 풍경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지하 전체를 지배하고 있던 아트로포스의 권능이 사라진 여파인가 싶었으나.
신력을 퍼뜨려 주변을 살펴보자, 묘하게 낯익은 오브제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묘하게 악취미적인 면이 있다니까….”
반쯤 무너진 돔 형태의 천장에 박힌 까마득한 숫자의 빛을 잃어버린 별자리들.
무너져가는 천장을 힘겹게 지탱하고 있는 별자리가 새겨진 기둥들.
그리고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심각하게 훼손된 동상들.
얼핏 보기엔 황량하기 짝이 없는 폐허로만 보였지만,
먼젓번에 비슷한 곳에 초대되었던 경험이 있었기에, 나는 히죽 웃으며 나를 초대한 이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야. 나슈리크. 아니 크리슈나라고 불러줄까?”
『반갑습니다. 새로운 계승자이시여.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기쁘군요.』
나슈리크, 아니 크리슈나는 여전히 높낮이 없이 단조로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얼핏 보기엔 지난번과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선 묘하게 따스한 감정이 느껴지고 있었다.
『억겁의 기다림 끝에 나타난 분답게…. 저희가 남겨둔 마지막 안배까지 취하셨군요.』
“안배라는 게 그렇게까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뭐, 어찌 되었건. 댁들의 의도대로 되긴 했지.”
나를 바라보는 크리슈나의 눈빛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따스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시간 속에 풍화되어, 감정이 마모되어버린 그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희열 앞에선 어쩔 수 없는 모양인지.
감격에 젖은 크리슈나의 눈에서 녹슨 쇳물이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그동안 ‘규격 외의 존재’. 즉 새로운 세상의 ‘그릇’이 될 존재는 수도 없이 탄생했지만. 여기까지 도달한 ‘그릇’은 그대가 처음입니다.』
“그렇겠지. 탄생하는 족족 찬탈의 전쟁 속에서 허무하게 죽음을 맞았을 테니까. 이전의 나처럼 말이지.”
『…이전의 ‘나’?』
“나는 사실, 어느 성좌의 변덕으로 과거로 회귀한 존재거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크리슈나에게 회귀한 사실을 밝히자.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이 떠올라, 어쩐지 우스운 감정이 들었다.
분명, 그땐 괜히 회귀한 사실을 들킬까 봐. 웃기지도 않는 헛소리를 떠들어 댔었지?
『그랬군요. 하지만 그것 또한 운명의 부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스스로 회귀했다는 것을 밝혔음에도 불구, 크리슈나는 그리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진심 어린 환희에 가득 찬 그는 그런 사소한 사연에 신경쓰기보단, 내가 완전히 각성했다는 사실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듯한 모양이었다.
“그보다…. 그쪽에서 만든 ‘안배’라는 것이 원래 그런 식으로 작동되는 것인가?”
『‘그런 식’이라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계승자이시여.』
크리슈나가 준비해둔 ‘안배’ 덕분에 여기까지 성장할 수 있었지만.
가네샤의 파편을 품고 외형이 뒤틀려버린 김혜옥과 그들의 안배로 인해 불행하기 짝이 없는 운명을 맞은 아트로포스 등을 생각해보면, 그들의 행동이 그리 달갑게 만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 목소리에서 약간의 적의와 불만을 눈치챈 탓인지.
나를 바라보는 크리슈나의 눈이 살짝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치미 떼지마. 아무리 나를 위해서였다고 한들. 아니 새로운 질서를 각성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들. 무고한 이들의 운명까지 뒤틀어버린 것은 도저히 용서가 안 되거든.”
세상의 섭리 자체를 뒤흔들 만큼 강력한 힘, 신력이 내 몸속에서부터 아스라이 흘러나왔다.
신력을 품은 황금빛 외골격이 찬란한 금빛을 흩뿌리며, 내 몸 위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저희가 무고한 이들의 운명을 뒤틀었다니.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짐작이 가질 않습니다. 계승자이시여.』
“너희들이 영혼에 가네샤의 파편을 박아넣어 괴물로 만들어버린 김혜옥. 애초부터 내게 ‘흡수될’ 것을 상정하고 아트로포스에게 개입한 것. 너희들이 안배랍시고 저지른 일 아닌가?”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계승자이시여…. 그들의 운명은 그들 스스로가 자초한 것입니다.』
“…뭐?”
크리슈나의 안배로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었기에.
스멀거리는 분노를 억눌러 참아가며, 그에게 ‘정중한’ 항의를 하려 했지만.
크리슈나의 입에서 그들의 비극적인 운명이 그들 ‘스스로’ 자초했다는 말이 튀어나오자.
순간적으로 유형화된 분노가 내 몸에서 폭발하듯 튀어나왔다.
-콰르르르릉!
파괴의 힘을 품은 신력이 쫘악 퍼져나가며, 반쯤 부서져 있던 동상들을 먼지로 만들었다.
아슬아슬하게 무너진 지붕을 지탱하고 있던 기둥들이 지붕 째로 산산이 박살났다.
태양보다 더 뜨거운 살기가 어둑한 신전 전체를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 말. 그들이 스스로 그런 엿 같은 운명을 짊어졌다는 말을 책임 질 수 있나?”
『계승자이시여. 저희의 실책에 대해선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만. 맹세컨대. 그것은 정말 그들의 의지대로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폐허 같았던 공간이 더욱 황량해졌지만.
크리슈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파편’들의 주인은 모두, 스스로 희생하기로 했던 성좌들의 영혼 중 일부가 환생한 존재들입니다. 김혜옥…. 기억은 없겠지만 그녀 또한 가네샤의 영혼 중 일부가 환생한 존재이지요.』
“…그럼 갈나르와 아트로포스는?”
『갈나르는 본디 라흐만이라는 자가 계승자님들의 각성을 돕기 위해, 자신의 파편으로 빚어낸 ‘인형’이었습니다. 다만…. 미완성인 상태로 깃든 영혼이 자유 의지를 찾아. 하계를 유랑할 줄은 라흐만 본인도 몰랐죠. 다시 회수하긴 했지만…. 이미 상황은 늦어버린 상황이었습니다.』
…요컨대. 김혜옥은 가네샤 본인이 그런 모습으로 환생한 것이었고.
라흐만이라는 자의 파편이, 예상치 못한 자유 의지를 찾아 아트로포스의 인생까지 덤으로 꼬아버린 것인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크리슈나의 얼굴에선 거짓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담담하게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읊어대는 그의 모습에 나는 여러 가지 감정이 깃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믿도록 하지. 당신들이 굳이 내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그건 그렇고. 분명 시스템 메시지로 내게 작별을 고하지 않았었나?”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겐 최초의 성좌로서. 별처럼 아로새겨진 계승자들의 기억에 없는 정보를 알려드릴 의무가 있기에…. 소멸을 무릅쓰고 이렇게 계승자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계승자들의 기억에 없는 성보라고?”
완전히 각성하면서 나는 수많은 계승자의 기억과 낙오자들의 기억을 온전히 계승했다.
때문에, 인과율과 이 세계의 흐름에 대해 모든 것을 깨우쳤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크리슈나는 무언가, 계승자들의 기억에 없는 일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릇…. 인과율의 후보로서. 새로운 질서를 잉태한 계승자. 하지만 그 모든 ‘계승자’들이 자신의 사명대로 인과율에게 도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뭐?”
『필멸의 굴레를 미처 벗지 못한 이들 중 공포에 미쳐버린 이들은 인과율과 거래하여. 그들을 믿고 따랐던 낙오자들의 기대를 져버렸지요.』
“그릇의 의무를 져버린 채, 일신의 안전을 위해. 인과율에게 협력한 놈들이 있었다고?”
놀랍게도 크리슈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별자리에 아로새겨진 계승자들의 기억에 의하면, 모든 계승자들이 인과율의 수작질로 패망했다고 나와 있었지만.
어째선지 그의 입에선 전혀 알 수 없는 정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역대 계승자들의 기억을 뒤져봐도. ‘배신자’들에 대한 정보는 없는데. 그게 가능한 소린가?”
『정보가 없는게 당연합니다. 역대 계승자들의 ‘기억’은 죽은 이들의 기억만을 계승하니까요. 배신의 대가로…. 그들은 아직까지 살아있습니다. 인과율의 애완동물이 되어, ‘패배자’라는 멸칭으로 불리면서까지….』
침통한 표정을 지은 크리슈나는 비틀거리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곤 기이한 톱니바퀴와 알 수 없는 기계장치가 삐걱거리는 자신의 가슴을 억지로 열더니.
내부에서 빛이 바래버린 석판 하나를 힘겹게 꺼내었다.
『이것이 바로 낙오자들의 기대를 배반한 채, 인과율에게 붙은 ‘패배자’들의 기록입니다.』
-파캉!
크리슈나가 삐걱거리는 팔에 힘을 주자, 빛이 바래버린 석판이 산산이 조각났다.
오래된 석판이 부서지며, 흩날리는 가루들이 어떠한 형상을 이루었다.
“…큭.”
인간이라는 존재를 철저히 가학적인 악취미만으로 훼손시킨 듯, 끔찍한 모습이었다.
피부가 반쯤 벗겨진 벌거벗은 몸뚱이엔 별자리가 새겨진 피부가 넝마처럼 너덜거리고 있었고,
으스러지고 부서진 사지엔 기이한 형상의 고문 도구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어린이가 만들어낸 눈사람처럼 눈, 코, 입이 있어야 할 자리엔, 부서진 인도석이 우스꽝스럽게 박혀 있었다.
실로 끔찍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이들의 외형은 낙오자들과 계승자들의 기억에서 본 적이 있었다.
“찬탈의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마지막에 나타나 잔혹한 학살을 일삼던 이들이로군”
무한히 반복된 억겁의 세월 동안, 신성을 깨우치진 못했지만, 그래도 낙오자들의 안배에 따라.
수없이 많은 영웅시를 획득해 강력한 힘을 손에 넣은 계승자들도 있었다.
그렇게 어찌어찌 찬탈의 전쟁까지 살아남은 계승자들조차, 마지막에 등장해 압도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이 흉측한 존재들에게 무력하게 학살당했었다.
…인과율이 만들어 낸 변종 마족의 일종인 줄 알았는데.
이들이 바로 공포 때문에 타락해버린 ‘패배자’들이었나 보군.
『그렇습니다. 계승자님께선 스스로의 의지로 신성을 획득하셨지만. 이들은 인과율이 불어넣은 뒤틀린 힘으로 신성을 획득한 존재들이죠. 육체는 고문 속에서 피폐하게 뒤틀렸지만…. 필멸의 영역을 아득히 뛰어넘은 신력을 얻은 자들이기에. 신성을 획득하지 못한 계승자들은 이들에게 무력하게 학살당했습니다.』
마력과 내력, 차크라 따위와는 궤를 달리하는 압도적인 힘이 바로 신력이란 놈이었기에.
아무리 뛰어난 계승자들도, 신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패배자들을 당해낼 순 없었다.
베알제불과 아트로포스의 성물을 손에 넣어, 막강한 마력을 손에 넣은 나조차도.
신력을 다루는 가네샤의 서사시를 5분 언저리밖에 사용할 수 없었을 정도니까….
『진정한 신성을 깨우친 계승자님의 힘이라면, 이들을 손쉽게 상대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만…. 그래도 방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크리슈나의 걱정 어린 조언에 고개를 끄덕이자.
갑작스러운 진동과 함께, 그의 육신과 신전 전체가 점점 붕괴되기 시작했다.
“…다시 만날 수는 없는 것이겠지?”
『최초의 성좌로서. 저는 오랜 시간 동안 계승자님을 기다려 왔습니다. 제 의무를 다한 지금…. 제게 허락된 시간은 모두 끝나버렸지요.』
담담하게 말한 크리슈나는 나를 바라보더니, 굉장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 세월동안 굳어버린 육신이 짓는 미소였기에, 그의 미소는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나의 승리를 기원하는 크리슈나의 진심어린 마음만큼은 내게 제대로 전달 되었다.
『제게 허락된 시간이 여기까지이기에, 끝까지 함께 해드리지 못해 죄송스러울 뿐입니다만…. 만일을 대비해. 제가 준비해두었던 ‘보험’이 있으니. 때가 되면 계승자님을 위해.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래. 편히 쉬어. 오랜 시간동안 뒤에서 우리들을 지지해준 벗이여.”
내 인사를 받은 크리슈나의 몸이 점점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주인의 영면을 애도하기라도 하듯, 낡은 신전 전체가 모래가 되어 처연하게 흩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