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1화
김종대의 비틀린 심장에서 연달아 터져 나온 비명이 조금씩 사그라들자.
숨이 멎을 듯한 정적 속에서 시커멓게 타들어 간 심장의 끈적거리는 살점 조각들이 후두둑 후두둑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후욱…. 후우욱….”
내력과 마력이 사라져버린 상태로 마음껏 날뛰어서인지, 아니면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느라 지나치게 많이 얻어맞아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온몸의 근육이 조각조각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심장이 터질 듯이 아파 왔다. 숨이 턱 막히며, 호흡이 가빠왔다.
무너져 내리는 살점 더미 속에서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어둠달로 간신히 지탱했다.
어떻게 어떻게 처리하긴 했는데….
마흐라바 놈이 내게 건 수작질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군.
“…아니, 지금은 그걸 걱정할 때가 아닌가?”
-콰드드득! 콰드드득!
대단히 애석하게도, 지금은 한가하게 앞으로의 계획 따위를 점검해 볼 타이밍이 아니었다.
뒤틀린 육신의 중심핵 역할을 해주던 심장이 파괴되었기 때문인지, 김종대의 거대한 육신이 굉음과 함께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뿌드드득!
뒤틀린 육신을 지지하던 뼈가 육신의 붕괴를 이기지 못하고 우지끈 부러졌다.
끈적거리는 점액질 살점 덩어리가 내가 서 있던 자리를 묵직하게 강타했다.
고통에 잠식된 몸뚱이를 억지로 움직여, 무너지는 뼈와 살점들을 피해 출구를 찾아 움직이려 했지만….
“…망할.”
끝없이 무너져 내리는 뼈와 살의 폭포 속에서 출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엉망으로 부러진 거대한 뼛조각들이 내가 뚫고 침입해온 통로 위로 무너져 내렸다.
끔찍한 악취를 풍겨내는 끈적한 살점들이 그나마 남아있던 통로를 빈틈없이 메웠다.
-….
안타깝지만 먼젓번처럼 검은 심장을 폭주시켜 길을 뚫어내는 방법을 선택할 수도 없었다.
앞선 전투로 인해, 그동안 검은 심장이 흡수했던 마력을 전부 소모해버렸기도 한 데다.
뭣보다 심장이 파괴됨과 동시에, 김종대의 육신에서 마력이 모조리 빠져나가 버렸기에.
더는 먹어 치울 마력이 없다고 판단한 검은 심장은 고요히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콰콱! 콰콰콱!
이대로 얌전히 무너지는 살점 속에 생매장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이를 까득 깨문 나는 온몸의 힘을 쥐어짜, 무너져내리는 살점과 뼈의 폭포를 내려찍었다.
-철퍽! 철퍼덕!
하지만 마력도 내력도 아무것도 없이, 얇디얇은 어둠달만으로 무너져내리는 살점을 파헤치려 드는 것은 마치 소주잔에 담긴 한 잔의 물로 건물 전체를 불태운 화재를 진압하려는 것과 진배없는 행동이었다.
내 발악을 비웃기라도 하듯, 김종대의 육신은 더욱 빠르게 붕괴하기 시작했다.
끔찍한 악취와 함께, 사방을 가득 채운 살점들이 엉망으로 후두둑 무너졌다.
부러진 뼈가 그나마 남아있던 통로들을 메꿨다.
-빠직! 빠지지직!
마침내, 그나마 이곳을 지탱해주던 갈비뼈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내 최후를 예고하는 불길한 소리가 점점 강렬해졌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도저히 살아나갈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얌전히 죽어줄 순 없지! 어떻게 얻은 새로운 기횐데! 이번 생은 이렇게 허무하게 최후를 맞이하고 싶진 않아!”
발악하듯 소리를 지르며, 나는 무너지는 살점 더미를 향해 계속해서 어둠달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하지만 최후의 괴력이 실린 어둠달이 부패한 점액질 살점을 뭉텅이로 베어낼 때마다, 새롭게 흘러내린 살점 조각이 빈자리를 메꾸었다.
젠장! 젠장! 어떻게 방법이 없나?
-우지끈!
마침내, 최후의 순간이 도래했다.
내 머리 위에서 붕괴를 막아주던 갈비뼈가 굉음과 함께 우지직 부서졌다.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날카로운 뼛조각이 섞인 부패한 살점 더미가 순식간에 내 몸 위로 쏟아져 내렸다.
“…!”
부러진 뼛조각들이 내 몸에 콱콱 틀어박히며, 피부를 찢고 근육과 내장을 찔렀다.
엄청난 무게를 자랑하는 살점 더미가 내 몸 위로 쏟아지며, 단숨에 척추를 박살 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다 못해, 사고가 완전히 정지할 정도의 고통이 찾아왔지만.
끔찍한 냄새를 풍기는 점액이 얼굴을 뒤덮은 통에, 비명조차 지를 수도 없었다.
…빌어먹을. 진짜 이대로 허무하게 죽는건가?
「최후의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그때였다.
흐릿해져 가는 시야 속에서 갑자기 뜬금없는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마흐라브의 수작으로 인해, 시스템의 축복이 완전히 사라진 상황이었으나, 기이하게도 시야 오른쪽 아래에선 시스템 메시지 특유의 번쩍이는 메시지가 간헐적으로 번쩍이며 알 수 없는 문구를 출력하고 있었다.
조건을 충족했다고? 그게 무슨….
갑자기 출력된 메시지의 내용에 미처 의문을 느낄 새도 없었다.
머릿속에 시커먼 의심의 먹구름이 뭉글뭉글 피어오르기 시작하기 무섭게….
-번쩍!
눈이 멀어버릴 듯한 금빛 광채와 함께, 강물처럼 흐르던 고통의 시간이 통째로 꽝꽝 얼어붙었다.
-꽈드드득!
내 육신을 부수며, 근육과 내장을 찢어발기던 뼛조각들도
내 몸뚱이 위로 쏟아져, 엄청난 압박과 고통을 선사해주던 살점들도
모두 금빛 광채 속에 그 모습 그대로 정지되어, 꽁꽁 얼어붙었다.
「고대에서부 전해진 최후의 안배에 따라, ‘그릇’의 진정한 권능이 개방됩니다.」
또 다시 의문의 메시지가 모든 것이 정지된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조용히 출력되었다.
‘그릇’의 진정한 권능이 개방된다니.
먼젓번에 잊혀진 자들의 영웅시를 개방한 것으로 그들의 안배가 모두 끝난 게 아니었어?
계속된 의문에 속이 버쩍버쩍 말라가는 느낌이었지만. 머릿속에 흐릿하게 낀 의문의 먹구름을 멀끔하게 지워낼 틈도 없었다.
의아함을 미처 풀어낼 새도 없이, 변이가 시작되었다.
“크으윽!”
갑자기 머리를 통째로 압착기에 넣고 으깨는 듯한 강렬한 고통이 느껴졌다.
영웅시를 쓸 수 없는 상황임에도, 어째선지 낙오자들의 기억이 무의식 저편에서부터 솟구쳐 머릿속을 다채롭게 물들였다.
“라크슈마, 가네샤, 베타라, 바알제불, 아트로포스….”
머릿속을 가득 채운 기억들은 이전과는 달랐다.
지금까지 그들의 한맺힌 기억이 필요에 따라, ‘일시적으로’ 머리에 떠오르는 수준이었다면.
이번엔 그들이 살아왔던 슬프고 처절한 기억들 외에 소소한 일상이나 행복한 기억 등, 그들이 살아온 삶 자체가 너무도 생생히 통째로 내 머릿속에 새겨졌다.
마치 내가 그들이 된 것처럼, 그들이 곧 내가 된 것처럼.
그들과 나를 정의하는 개념이 점점 모호해졌다. 그들의 삶 자체가 내 육신과 영혼 속에 자연스럽게 각인되었다.
-쩌적! 쩌저저적!
“…아아. 아아아.”
내 몸 속에서, 아니 영혼 속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릇’의 봉인이 풀리며, 머릿속에, 영혼 속에 광대한 우주가 열렸다.
아니, 내 자신이 수많은 가능성을 품은 우주 그 자체가 되었다.
새까맣게 암전된 암흑의 공간에, 낙오자들의 별자리가 찬란하게 아로새겨졌다.
내가 한과 업을 짊어졌었던 이들, 그리고 ‘원래’ 내 몸 속에 잠들어 있던 이들의 수많은 별자리가 새카만 우주를 아름답게 수놓았다.
“그랬구나. 그랬구나!”
내 영혼에 각인되었던 ‘그릇’이 온전히 해방되자.
그동안 있었던 찬탈의 역사가 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흘러 지나갔다.
그동안 낙오자들의 기억으로부터 단편적으로 볼 수 있었던 억겁의 세월이, 너무도 생생하게 내 눈앞에 펼쳐졌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무엇을 위해 탄생했는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하는지 등 태곳적부터 이어져 내려왔던 사명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순전히 놈의 재미를 위해, 수많은 계승자들은 고통과 고난의 세월을 겪어야만 했지. 내가 겪은 고난 또한 놈의 수작이었고.”
회귀 전, 나는 분명 지독하게 못생긴 외모를 가진 채 태어났지만.
한세훈을 비롯해 회귀 전의 인물들이 내게 보여주었던 반응은 다소 과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그때 겪었던 부조리와 불합리, 그리고 이해하지 못할 배신은 모두….
단순히 ‘그릇’으로 태어난 나를 농락하기 위한 인과율의 유희일 뿐이었다.
나 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계승자들이 다양한 이유로 놈의 유희거리가 되어 희생되었고.
채 꽃피지 못한 채로 스러진 그들의 원념은 ‘그릇’에 담겨, 후대로 후대로 계승되어 왔다.
다른 이들의 최후를 비웃었듯, 제대로 된 그릇으로 각성조차 하지 못한 채로 허무하게스러진 그때의 나를 놈은 평소처럼 깊고 깊은 심연에서부터 비웃으며 감상했었을 테지.
-까드드득!
수많은 계승자들의 한과 업, 그리고 그들의 삶이 내 영혼에 새로이 계승되었다.
영혼 속에 열린 우주 속에서 선대 계승자들의 별자리가 은하수가 되어, 시린 빛을 흩뿌렸다.
그리고 그들의 별자리가 자리를 잡은 것과 동시에, 태고적부터 계승되었던 힘이 깨어났다.
-화르르르륵!
어두웠던 영혼 속의 우주에 밝게 빛나는 황금빛 태양이 찬란하게 떠올랐다.
너무나도 따스하고 온화한 태양빛에, 창백한 빛을 흩뿌리며 섧게 울던 별자리들이 조금씩 조금씩 황금빛으로 물들어갔다.
-스파아아아앗!
황금빛 태양이 그렇게 영혼 속의 우주를 포근하게 물들이자.
마력과 내력이 빠져나가 텅 비었던 몸에 새로운 힘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필멸의 영역에선 허락되지 않았던 절대의 권능.
‘신력’이 황금빛 태양과 공명하며, 무한한 힘을 내게 선사해주었다.
“내 마지막 의무가 찬탈의 전쟁에서 인과율을 쓰러뜨리는 거라고? 얼마든지 해주겠어.”
이 우주는 본디 무한한 순환을 위해, 새로운 질서가 구시대 질서의 자리를 계승하는 ‘계승식’을 거행해 왔었다.
하지만 억겁의 세월 속에서 권력을 단맛을 알아버린 최초의 질서 ‘인과율’은 순환을 거부하고.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계승자가 채 성장하기도 전에 찬탈의 전쟁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켜. 제거해 오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순전히 놈의 유흥을 위해, 수많은 무고한 이들이 희생당한 것은 덤이고 말이야.
인과율이 그렇게 우주의 질서를 꽈악 붙잡고 놔주지 않은 통에, 이 우주는 억겁의 세월동안 정체된 채로 그의 변덕과 흥미를 위한 공간으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였다.
때문에, 내 의무는 바로….
새로운 질서로서, 인과율을 처단하고 멈춘 우주를 다시 순환시키는 것이었다.
「…마지막 안배가 모두 충족되었습니다. 부디. 무운을 빕니다.」
그렇게 내 운명에 대해, 자각한 순간.
나를 이곳으로 안내한 나슈리크의 메시지가 다시 눈앞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멈춰버렸던 시간이 다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꾸르륵! 꾸르르륵!
다시 흐르기 시작한 시간 속에서, 어두운 현실이 나를 찾아왔다.
방금 있었던 일이 마치 한순간의 꿈이었던 것처럼, 주변의 풍경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꾸드드득!
여전히 내 몸을 옥죄어 오는 살점과 뼛조각들은 호시탐탐 내 목숨을 노리고 있었고.
임박해 왔던 죽음은 조금씩 조금씩 내 눈앞으로 스멀스멀 기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카가가각!
그렇게 음험하게 기어오던 죽음은 내가 가볍게 휘두른 어둠달에 소멸되어버렸다.
초식이나 스킬 따윈 상관없이 단순히 창을 휘두른 것만으로도 내 영혼에 아로새겨진 낙오자들 중 파괴를 관장하던 이들의 힘이 발현되었다.
내 육신을 뒤덮은 살점과 뼛조각들이 모조리 찬란한 황금빛으로 산화되었다.
“이게 나의 신력인가? 가네샤의 서사시를 사용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인걸.”
그렇게 새롭게 각성한 힘을 시험해 본 나는 황금빛으로 물든 파괴의 현장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따사로운 햇볕 속에서 황금빛으로 산화되어가는 김종대의 육신이 새로운 질서의 탄생을 축하하기라도 하듯, 아름다운 빛을 흩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