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9화
음산한 어둠이 내린 계단을 성큼성큼 걸어 내려와, 무덤의 중심부에 다다르자.
환영을 뿌려대는 암갈색 마력 덩어리들이 황량하게 널브러진 위층과는 달리, 이번엔 심상치 않은 독기를 뿜어내는 독기를 뿜어내는 시커먼 웅덩이가 광장의 정 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
-꾸르르륵!
외골격으로 몸을 뒤덮고, 전투 태세를 취한 채. 중앙의 웅덩이에 가까이 다가간 순간!
독기를 피워내며 끝없이 보글보글 올라오던 거품들의 향연이 갑자기 뚝 멎었다.
-촤아아아악!
곧이어 시커먼 웅덩이 아래에서 무언가 흉측한 것이 꿈틀거린다. 싶더니.
시커먼 독과 아트로포스 특유의 암갈색 마력을 사방으로 흩뿌리며, 웅덩이 전체가 그대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드디어 왔는가? 그대를 기다리느라 좀이 쑤실 지경이었어.』
천장 가까이 솟구친 채, 끝없이 꿈틀거리는 웅덩이에서 음습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끈적거리는 점액질 속에서 끔찍하기 짝이 없는 흉물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세상에…. 도, 도대체 꼬맹이의 육신에 놈들이 무슨 짓을 해버린 게야!]
[예,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끔찍한 짓을 저지르다니….]
끈적거리는 점액질을 망토처럼 휘감은 흉물의 모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전체적으로 놈은 솜씨 없는 화가가 인간을 엉망으로 그려낸 듯한 외형을 지니고 있었고,
오랫동안 물속에 방치된 익사체처럼 퉁퉁 불어 오른 보랏빛 피부엔 인간의 상반신들이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오래된 익사체처럼 퉁퉁 부어올라, 이목구비조차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의 정 중앙엔, 아트로포스가 남긴 ‘껍데기’로 추정되는 노파의 상반신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온갖 잡놈들을 다 만나봤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역겹게 생긴 놈은 처음인데.
『만나서 반갑네. 인과율이 점지한 ‘그릇’이여. 내 이름은 마흐라브…. 부족하지만. 자네들이 ‘낙오자’라고 부르는 이들을 보듬어 살피는 군주 중의 하나일세.』
노골적으로 역겹게 생긴 외모에 걸맞지 않게, 자신을 마흐라브라 밝힌 군주급 마족의 목소리는 굉장히 정중하면서도 묘한 위엄을 품고 있었다.
『표정이 왜 그러는가? …혹시. 내 ‘동업자’의 짓궂은 장난에 마음이 상한 겐가? 그렇다면 그 점에 대해서 정중하게 사과하지. 미안하네. 그를 조금 더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내 실책일세.』
정중한 인사에도 불구하고, 내 눈에서 경계의 빛이 사라지지 않자.
마흐라브는 부패한 살점이 녹아내리는 몸을 꾸벅 숙여, 내게 사과를 건네왔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자네에게 무례를 범한 동업자는 이미…. 합당한 벌을 받았으니.』
-꾸르륵!
묘한 말을 지껄인 마흐라브의 눈빛이 가볍게 휘어진다. 싶더니.
갑자기 놈의 얼굴이 고통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을 품고 와락 일그러졌다.
《끄, 끄어어억! 아으으으윽!》
엉망으로 일그러진 얼굴에선 사람의 것이라 볼 수 없을 만큼 뒤틀린 비명이 흘러나왔다.
핏발이 시뻘겋게 서 있는 두 눈이 나를 노려보며, 계속해서 뭔가를 호소하려 들었지만.
끔찍하게 일그러진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억눌린 비명뿐이었다.
『자네의 눈앞에 있는 이 뒤틀린 육신이 바로 내가 말했던 ‘동업자’의 말로라네.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제멋대로 일을 저지른 이에겐, 아무리 관대한 나조차 약간의 ‘벌’을 줄 수밖에 없었거든.』
…남은 두 산군 중 어떤 양반인지는 모르지만, 말도 못 하게 끔찍한 꼴을 당하셨군.
먼젓번에 둘을 처리했기에, 마족 측에 합류한 산군은 이제 박양환과 김종대만 남아있었다.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끔찍하게 뒤틀려 있기에, 둘 중에서 누가 저렇게 영 좋지 않은 말로를 맞았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들 중 하나가 마흐라브의 손에 끔찍한 괴물이 되어버렸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는 것은. 네놈은 졸렬하게 그 뒤틀린 육신에 빙의한 상태로 지껄이고 있다는 소리겠군.”
『졸렬하긴. 신중하다고 해주게. 자네의 손에 다른 군주들이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뻔히 아는 판에, 내가 멍청하게 자네 앞에 ‘직접’ 찾아오겠는가?』
뒤틀린 육신을 다시 장악한 마흐라브는 나를 바라보며 음침하게 웃었다.
음험하게 뒤틀린 입꼬리를 따라, 불어터진 살점 조각과 끈적한 피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아무튼. 자네에겐 안된 말이지만, 우리는 이미 얻어낼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얻어낸 상태라네. ‘그릇’을 사용하거나 성좌 나으리들의 힘을 빼앗는 것 말고도 우리들의 잃어버린 신성을 되찾는 방법을 찾아냈거든.』
[마, 말도 안 돼!]
…신성을 되찾는 방법을 찾아냈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슈리크의 말에 의하면, 성좌의 힘을 잃어버린 채로 영락한 낙오자들이 다시 잃어버린 신성을 되찾는 일은 오로지 ‘그릇’의 힘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릇’인 나를 차지하기 위해, 마족 놈들이 그동안 줄기차게 나와 악연을 쌓았던 것이었을 텐데….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로군. 뭐, 좋아. 그렇다면 증거를 보여줄 수밖에.』
-파지지직!
마흐라브의 눈이 또다시 반달 모양으로 휘어짐과 동시에, 별안간 성좌 특유의 신력이 나를 덮쳐왔다.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필멸의 영역을 아득히 뛰어넘는 속도로 내 몸을 강타한 신력이 전신에 퍼져나가자.
경악스러운 내용을 담은 메시지들이 주르륵 출력되기 시작했다.
「경고. 시스템 오류. 시스템 오류.」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특성 트리 및 스킬 창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애송이 이게 무스…]
괴이한 경고 메시지와 함께, 엄청난 탈력감이 찾아왔다.
동시에, 경악한 상태로 나를 바라보던 배후령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파지직.
특성 트리가 잠긴 여파로, 내 몸을 휘감았던 외골격이 허무하게 흩어졌다.
몸속에서 광폭하게 날뛰던 시커먼 내력이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진짜로. 특성 트리와 스킬 트리가 잠긴 건가?
『어떤가? 그동안 자네가 쌓아온 모든 것을 잃어버린 소감이? 허탈한가?』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은 나를 바라보는 마흐라브의 눈이 더욱 음험한 빛을 흩뿌렸다.
『애석한 일이지만, 자네의 최후는 이 김종대라는 친구에게 맡기도록 하지. 이 몸이 워낙 바빠서 말일세.』
기이한 권능으로 내 특성 트리와 스킬 트리를 잠근 마흐라브는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은 채,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놈의 의식이 사라진 자리에는 고통에 차, 흉포하게 울부짖는 한 마리 야수만이 남아 있었다.
《꾸워어어억》
-파파팟!
“스킬과 특성을 쓸 수 없다지만. 그렇다고 얌전히 죽어줄 순 없지!”
까득 이를 깨문 나는 김종대의 꿈틀거리는 육신을 향해 파고 들어갔다.
내력은 없지만, 그래도 내겐 열심히 단련해 둔 근육의 강력한 힘이 남아있었다.
《꾸그르르륵!》
내 접근을 감지한 김종대는 꾸르륵 소리와 함께, 공격을 개시했다.
불어터진 주먹이 느릿하게 움직인다. 싶더니. 엄청난 파괴력을 품고 내게 날아들었다.
-콰아앙! 쾅! 쾅!
불어터진 익사체와 같은 외형에 어울리지 않게 김종대의 공격은 매섭고 빨랐지만.
그동안 쌓아온 전투 경험은 놈의 공격이 공격해 올 방향을 어느정도 예측해 냈다.
나는 머릿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운룡보의 기억을 이용해, 내게 쇄도해온 주먹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철퍽! 철퍼퍼퍽!
성인 남성 몸통만 한 주먹을 피해내자. 빗나간 주먹이 요란하게 바닥을 강타했다.
흐물거리는 주먹이 바닥을 때리자, 독기를 품은 시퍼런 살점들이 요란하게 흩날렸다.
코를 따끔거리게 만드는 매캐한 독기와 비릿한 피 냄새에 정신이 어찔해질 지경이었다.
-까득!
하지만 외골격도 없는 지금, 그런 사소한 것에 정신이 팔릴 수는 없었다.
혀끝을 힘껏 깨물어 정신을 다잡은 나는 어둠달을 빙그르르 돌려, 날아든 살점들을 모조리 쳐냈다.
《끄아아악! 괴로워어어어!》
-치지지직!
재빠르게 움직이는 어둠달의 창날이 김종대의 살점들을 쳐 낸 순간!
소름끼치는 비명과 함께, 놈의 몸뚱이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
곧이어 꿈틀거리는 살점의 폭포 속에서 시커먼 연기가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연기 속에서 기괴하게 꿈틀거리는 살점 조각들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그 지경이 돼서도 그녀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가?”
《메에에엣!》
암갈색 마력을 품고 기괴하게 번들거리는 살점 조각들은 내가 예전에 상대했던 렘 헤드의 형상으로 변했다.
불그스름하게 얼굴이 달아오른 채, 강력한 근육을 불뚝이는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어차피 그녀의 마력이 빚어낸 환영이니, 진짜 공격만 간파해 내면 그만…. 크윽!”
-쿠와아앙! 쾅! 쾅!
살점 조각을 뿜어 낸 김종대는 먼젓번보다 더욱 광포하게 날뛰며 주먹을 휘둘렀다.
내 목숨을 노리며, 거칠게 휘둘러대는 놈의 거대한 주먹이 마력을 머금고 점점 더 빨라졌다.
살기에 잠식된 뇌가 김종대가 지녔던 생전의 전투 경험을 끌어낸 모양인지, 공격 궤도 또한 더욱 복잡해졌다.
…빌어먹을.
마력도 내력도 쓸 수 없는 지금, 놈의 공격에 한 방이라도 맞았다간 뼈도 추리지 못하겠어.
어떻게든 놈을 끝장낼 방법을 찾아야…. 어라?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으며, 김종대의 공격을 피해내려던 찰나.
근육을 위협적으로 불뚝이며 내게 달려드는 렘 헤드들의 환영이 눈에 들어왔다.
놈들의 번들거리는 근육이 눈에 들어오자, 갑자기 한 가지 기발한 아이디어가 머리를 스쳤다.
“…그래. 그거라면 할 수 있겠어!”
-타다닷!
《끄으으으! 도망치지 못한다아…! 고통을! 원한을!》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떠오른 순간.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등을 돌려 김종대에게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보여줬던 기세와는 달리, 맥없이 도망가는 내 모습에 김종대의 눈에서 맹목적인 원념의 불길이 화르륵 타올랐다.
-쿠르륵! 쿠륵!
김종대의 추악하게 일그러진 얼굴에 원념과 분노가 서리자.
놈은 무너져 내리는 몸을 꿈틀꿈틀 움직여, 느릿느릿 속도로나마 나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메에에엣!》
김종대의 거대한 다리가 바닥에 닿을 때마다, 살점이 무너지며 렘 헤드의 환영이 생성되었다.
나는 김종대를 매단 채,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나는 미리 눈여겨 봤던 램 헤드, 아니 놈의 살점 조각들이 유난히 많이 흩뿌려진 영역에 도착했다.
-콰드드득!
렘 헤드의 형태를 취한 채, 위협적으로 꿈틀거리는 살점 더미에 도착한 나는 어둠달을 깊숙이 쑤셔 박았다.
역겨운 살점 깊숙한 곳까지 어둠달의 창날이 삼켜지자, 살점에서 흘러나오는 농밀한 마력이 어둠달에 박힌 검은 심장을 깨웠다.
-두근! 두근! 두근!
내력과 마력을 전혀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검은 심장은 내 제어에서 벗어나 정신없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릴 때마다, 엄청난 양의 마력이 검은 심장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주인의 사정 따윈 안중에도 없는 이 요물은 그동안 자신이 해왔던 대로, 내 몸에 엄청난 양의 마력을 불어넣었다.
“크으으윽!”
평소대로라면 검은 심장이 흡수한 마력이 내력으로 치환 되어 내게 힘을 부여했겠지만.
마력과 내력을 다루는 법을 완전히 망각한 상황에서, 내 몸속으로 주입된 마력은 제멋대로 날뛰며 내게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선사해주었다.
이를 까득 깨물어 고통을 애써 무시한 나는 폭주하는 마력을 휘감은 채, 느릿하게 달려오는 김종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