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 잘생겼다!-268화 (268/309)

제268화

-쿠르륵! 쿠르르륵!

생생하게 다가왔던 갈나르의 육신이 점액이 되어 허무하게 흩어졌다.

놈의 환영이 사르르 녹아 사라지자, 그 자리엔 끔찍한 악취만을 풍기는 갈색 점액 덩어리가 징그렇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화, 화안금정마저 속여넘기는 환영이라니…. 마, 말도 안돼! 그 원숭이 놈이 워낙 못 미더운 성격이긴 했어도, 진실을 꿰뚫어 보는 눈 만큼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거늘!]

갈나르의 머리 위에 떠 있었던 문구는 틀림없이 ‘진실’이었다.

하지만 아트로포스의 마력이 놈의 몸을 꿰뚫은 순간, 화안금정마저 속여넘겼던 환영은 너무도 허무하게 스르르 흩어졌다.

광장을 가득 채웠던 갈나르의 거대한 육신이 나른한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순식간에 녹아 사라지는 모습에, 위철용의 입에선 불신 어린 중얼거림이 계속해서 새어 나왔다.

[…물론 화안금정은 분명 ‘거짓’임을 일러주었을 거예요. 하지만 인지를 뒤틀고 왜곡시키는 제 능력으로 인해, 그에겐 ‘진실’로 보였겠죠.]

“게다가, 이곳은 애초에 아트로포스님의 마력으로 뒤틀린 공간이니. 왜곡의 권능이 훨씬 더 강하게 발현되었을 겁니다. 어르신과 다른 분들마저 깜빡 속아 넘어갈 정도로요.”

환영이 사라진 자리엔 아트로포스의 권능을 상징하는 암갈색 마력의 파편들이 끈적끈적한 점액질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슬라임 무리처럼 으스스하게 꿈틀거리는 암갈색 마력 덩어리들은 간헐적으로 음울한 빛을 뿜어내며, 흐릿한 환영을 역병처럼 토해내고 있었다.

“갈나르 외에도 보물 고블린에, 램 헤드, 블랙 리자드맨까지…. 이제껏 제가 상대했던 놈들의 환영이로군요.”

[네…. 기억에서 힘들고 괴로웠던 상대들을 끄집어내, 동요하게 만드는 것이 한때 제가 즐겨 사용했던 전법이었으니까요.]

씁쓸하게 중얼거린 아트로포스는 암갈색 마력 덩어리들을 우울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끼던 아이들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던 사용법인데…. 확실히 놈들이 제 육신을 완벽히 차지하긴 했나 보네요.]

뒤틀린 운명 클랜의 사교도 놈들은 생명체의 면역체계를 뒤트는 계통의 독을 사용하거나.

인지를 뒤틀어, 기억과 사고를 왜곡시키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 놈들의 주된 수법이었지.

이런 식으로 상대의 기억에서 괴롭고 힘들었던 상대들을 구현시키는 것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하긴 했었다.

그녀가 남긴 껍데기로부터, 생전의 기억까지 재현해 내다니.

바알제불의 육신을 차지해, 힘을 착취했던 아스모데우스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지.

[그리고 당신의 기억에서 본 갈나르…. 그 아이가 그렇게 추한 존재로 뒤틀렸을 줄이야.]

사방을 뒤덮고 간헐적으로 내가 상대했던 이들의 모습을 재현하는 암갈색 마력 덩어리들을 아트로포스의 권능으로 파훼하며, 아래층으로 향하려던 찰나.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 근처의 마력 덩어리들이 다시 한번 갈나르의 환영을 재현해 냈다.

튼실한 근육을 자랑하는 갈나르의 우람한 육신이 눈앞을 가득 채우자, 놈의 환영을 바라보는 아트로포스의 눈빛이 어쩐지 애틋하게 젖어 들었다.

“조금 전에 미처 못 여쭤보긴 했습니다만…. 혹시, 그를 아시는 겁니까?”

[그래, 어째선지 꼬맹이…. 그 흉측한 근육질 리치를 바라보는 눈빛이 과도하게 애틋했다만?]

[네…. 저 얼굴, 저 근육을 도저히 잊을 수 없죠. 제가 처음으로 거둔 아이인걸요. 그러니 그를 애틋하게 바라볼 수 밖에요.]

…갈나르가 아트로포스가 처음으로 거둔 아이였다고?

머릿속에 의문을 품은 순간, 아트로포스의 한과 업이 남긴 기억이 내게 답을 알려왔다.

낯선 기억들이 무의식 속에서 분수처럼 솟구쳐, 머릿속을 낯선 이의 기억으로 물들였다.

“…첫번째 사도라니. 놈은 아트로포스님을 따르는 교도 중 하나였군요.”

[그래요. 그는 제가 신성을 얻은 이래, 처음으로 제가 기거하던 영역까지 찾아온 모험가였어요. 당신만큼은 아니지만 젊고 잘생긴 존재라. 오랜 세월 동안 홀로 외롭게 지냈던 제게 좋은 활력소가 되었죠.]

[…활력소라고? 무, 무슨 망측한 소리를 하는 게야!]

아트로포스의 애틋한 눈빛과 그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위철용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리 보기좋지는 않은 얼굴이 질투를 품고 심술궂게 일그러졌다.

[젊고 잘생긴 외모에 호감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오? 나이도 자실 만큼 자신 양반이 이상한 것으로 질투하시기는.]

[뭐, 뭐야?!]

비꼬듯 비죽거리는 베알제불의 비웃음이 위철용의 귓가에 천둥처럼 꽂히자.

잔뜩 흥분한 위철용은 그대로 몸을 날려, 베알제불을 양발로 걷어찼다.

영역 다툼하는 두 마리 친칠라처럼 뒤엉킨 두 전직 성좌들은 기이한 소리를 내며, 구석으로 뒹굴뒹굴 사라졌다.

“갈나르의 외모에 호감을 가지셨다니…. 아니, 자세히 보니. 그럴 만은 했군요.”

내가 상대했던 갈나르의 모습은 다 썩어 문드러진 두개골에 기형적인 근육질 몸이 돋아난 모습이었지만.

아트로포스의 기억 속에서 그는 놀랍게도 전형적인 서양계 미남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스 조각상을 그대로 형상화 한듯한 얼굴은 유순한 선량함과 남자다운 강인함이 공존했고.

과하지 않게 탄탄하게 발달한 근육은 뭇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적합한 형태였다.

…이게 그 갈나르 모습이었다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런 처참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걸까?

아트로포스마저 갈나르가 어떻게 타락했는지에 대해 알지 못했기에.

아무리 그녀의 기억을 뒤져봐도, 애석하게도 그에 대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잘생긴 것도 잘생긴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제 영역에 들어온 그 덕분에…. 제가 고위 성좌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는 거예요.]

갈나르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려던 찰나. 아트로포스의 입에서 충격적인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그에 대한 그녀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맙소사. 갈나르 또한 ‘파편’이었군요.”

[네, 파편…. 위대한 이의 흔적을 자신의 영혼에 아로새긴 자였지요. 그를 사도로 삼고 영혼의 본질에 접촉했기에. 갓 신성을 얻은 저는 순식간에 고위 성좌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거예요.]

기억 속의 아트로포스는 이제 막 필멸의 굴레를 벗어난 하위 성좌였다.

하지만 게이트 속을 헤매다. 우연히 그녀의 영역으로 접근한 갈나르와 접촉한 이후.

그녀는 갈나르의 ‘파편’으로부터 까마득한 과거에 존재했던 성좌의 힘을 이어받아, 고위 성좌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김혜옥의 파편을 일부 흡수하여, 가네샤의 서사시를 손에 넣은 것처럼.

또 강준후가 강태백을 영혼째로 흡수하여, 신력을 손에 넣은 것처럼. 성좌들도 파편으로부터 힘을 흡수할 수 있는 것이었나.

[…그만큼 제게 도움을 준 존재이자. 첫 번째 사도로 저를 섬겼던 이가. 어찌하여 저런 모습으로 영락해버렸는지 모르겠네요.]

…잠깐만. 갈나르를 발견했던 곳이 분명 나슈리크의 안배가 깃든 곳이었지?

갈나르가 ‘파편’ 이었다는 사실과, 몬스터로 뒤틀린 그가 발견된 장소가 머리에 떠오르자.

조각난 파편들이 머릿속에서 하나로 연결되었다.

나슈리크의 창백한 얼굴이 떠오르며, 그가 말했던 단어 하나가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쳤다.

“…이 또한 안배일지니. 모든 것은 그들의 안배대로였군요.”

[네?]

“먼젓번에 말씀드렸듯, 최초로 이뤄졌던 찬탈의 전쟁 속에서 진실을 깨달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질서를 품고 태어나는 ‘그릇’을 위해. 여러 가지를 안배해뒀지요.”

나는 눈을 크게 뜬 아트로포스에게 나슈리크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설명을 들은 그녀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가, 몽롱하게 풀리는 것을 반복했다.

“그들은 반복되어온 역사를 통해, 모든 것을 예지하고 제 행보를 도울 수 있게끔 여러 가지 ‘안배’를 해두었지요. 아마 아트로포스님이 갈나르와 만났던 것도 모두….”

[세, 세상에. 그 모든 것들이 전부 정해진 안배 속에서 이뤄진 일이었군요.]

아마 나슈리크는 베알제불과 아트로포스가 내게 흡수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터였다.

때문에, 그는 아트로포스의 힘을 키워내어, 내게 흡수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피조물인 갈나르를 그녀에게 보냈던 것이었다.

비참하게 영락한 사실 따윈 없이, 갈나르 또한 그들이 안배를 위해, 만들어 낸 인형에 불과한 것이었을 확률이 높았다.

…먼젓번 혜옥이의 경우처럼. 그 ‘안배’라는 놈은 인정사정 따윈 없이, 결과만을 강요하는군. 그들은 그만큼 필사적인 건가?

나슈리크의 얼굴이 떠오르자, 괜히 입맛이 써졌다.

위철용과 똑같은 외모를 한 채, 침통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아트로포스의 모습에 더욱 입안이 까끌해졌다.

[그와의 만남. 그와의 추억…. 그리고 제 비참한 운명까지 누군가의 계획대로였다니.]

모든 비극을 초래한 ‘인과율’이라는 존재는 말한 것도 없이 악랄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지만.

놈을 상대하는 크리슈나 일당 역시, 인과율이라는 놈과 딱히 다르지 않는 듯 했다.

서글프게 눈물을 방울방울 흘려대는 아트로포스의 모습에.

한창 아웅다웅 싸워대던 위철용과 베알제불마저 할 말을 잃고, 움직임을 뚝 멈췄다.

[꼬, 꼬맹이…? 어, 어떻게 된 것이냐! 갑자기 울긴 왜 울어!]

[성좌 시절의 그녀는 감정을 잘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었소만. 어째선지 배후령이 된 후엔, 필멸자처럼 감정을 드러내는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나는 언제 싸웠냐는 듯, 추궁하듯 바라보는 두 전직 성좌들에게 쓰게 웃어준 뒤.

나슈리크의 ‘안배’와 그로 인해, 아트로포스가 겪은 잔인한 운명에 대해 말해주었다.

[허…. 어쩐지 필멸의 굴레를 벗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가. 순식간에 이 몸과 비슷한 자리까지 올라왔다. 했소만. 그런 비사가 있었을 줄은.]

[크리슈나…. 애송이 네놈이 그때 말했던. 그 청동 괴물을 말하는 게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지껄이는 놈인 줄 알았는데. 감히 우리 꼬맹이에게 그런 짓을!]

베알제불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반면, 위철용은 화가 단단히 난 표정으로 분통을 터뜨렸다.

“그들 역시, 놈과 대적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곤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건 좀 너무하긴 하네요.”

아무리 인과율으로부터, 어긋난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라지만.

크리슈나의 ‘안배’는 내가 아는 것 만해도, 벌써 두 명이나 되는 이의 운명을 엉망으로 뒤틀어버렸다.

씁쓸하게 꾹 다문 입에서 저절로 까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조용하게 흘러나왔다.

어둠을 노려보는 눈동자에서 금빛 안광이 아지랑이처럼 새어 나왔다.

…도대체 그들이 말한 안배의 끝엔 무엇이 있는 걸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