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3화
갑자기 두 중년인 사이에 끼어든 인물은 다름 아닌 김시형이었다.
일단 말을 꺼내긴 했지만, 뭔가 켕기는 게 있는 모양인지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이내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실은 태백 길드의 박양환 산군님이 다녀가신 뒤로, 길드장님의 집무실에 웬 핏빛 마력석 하나가 놓여있었습니다. 길드장님을 잘 아는 모두가 의문을 품었지만…. 길드장님이 워낙 그것을 애지중지하셔서 다들 이야기조차 꺼내지 못했었죠.”
“뭐라고?! 내가 마력석 따위를 애지중지했다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말이 안 될 만큼 수상한 소리니까. 자네의 길드원이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것 아니겠나. 시형 군이라고 했나? 계속해보게.”
꾀많은 여우처럼 아티팩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강태백과는 달리, 우직한 곰처럼 단순하기로 소문난 홍성동은 아티팩트는커녕 마력석조차 비겁하다며 거부하는 인물이었다.
때문에, 그런 성격의 홍성동이 마력석 따위를 애지중지 여겼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충분히 수상하게 들릴만한 이야기였다.
잔뜩 흥분한 홍성동을 막아선 강태백은 눈을 빛내며, 김시형에게 더 이야기할 것을 재촉했다.
“…예. 처음엔 다들, 길드장님께서 그 핏빛 마력석을 소중히 여기시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만…. 어째선지 그것의 존재가 머릿속에서 점점 잊혀졌습니다. 저 역시 김혜옥 치유사님께 치료를 받기 전까진 그것의 존재를 미처 떠올릴 수 없더군요.”
“그, 그런 사악한! 그렇게 수상한 물건을 내가 그렇게나 아꼈다니!”
…건곤 길드 전체에 영향을 미칠만큼 거대한 힘을 지닌 마력석이라.
아무래도 오행과 금랑의 통제권을 잃어버린 놈들은 다음 타겟으로 건곤을 노렸었나 보군.
김시형의 이야기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홍성동은 입을 떡 하니 벌렸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강태백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더니, 그의 표정이 점점 진중해졌다.
건곤 길드원들의 정신을 뒤흔든 핏빛 수정과 관련된 증언에서 무언가를 떠올린 모양인지, 강태백은 으드득 이를 갈았다.
“나 역시도 놈들의 마력향에 취해, 한때 스스로의 의지를 잃어갔었지. 아무래도 마족 놈들은 5대 길드 모두를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써먹으려는 모양이야.”
“…자네까지 당했었다고?”
“태, 태백 길드까지 놈들의 마수가 닿았던 겁니까?”
가장 신중한 성격인 강태백마저 마족들의 수작질에 당했었다는 말에 경악한 것일까?
강태백을 바라보는 홍성동과 김시형의 눈이 순간적으로 크게 홉떠졌다.
그런 그들의 시선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은 강태백은 손을 들어, 내 어깨를 짚었다.
“그래. 여기 이 설용호가 아니었으면, 나 역시도 놈들의 꼭두각시가 되었을 걸세.”
그러고 보니. 강태백도 한때 유영화에게 받은 마력향에 심취해서 상태가 안 좋았었지.
그 때문에 회귀하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그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었고 말이야.
“자네까지 그랬다니…. 아무래도 이거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닌 모양이야. 길드에 돌아가는 대로 그 핏빛 수정인가 뭔가에 대해, 신중하게 조사해봐야겠어.”
“마침 자네에게 할 말도 있으니. 같이 가세나. 게다가…. 자네를 치유했던 김혜옥 치유사라면, 만일의 상황에 큰 도움이 될 걸세.”
강태백은 슬쩍 시선을 돌려, 남몰래 하품하던 김혜옥을 바라보았다.
마족들의 마력에 잠식당한 홍성동을 치유한 것이 다름 아닌 그녀였기 때문인지.
김혜옥을 바라보는 강태백의 눈빛엔 묘한 기대감이 가득했다.
“네…? 저, 저요?”
“그래, 혜옥 양. 미안한 일이네만. 만일을 대비해 동행해 줄 수 있겠나?”
“뭐, 뭐 어려울 건 없지만요…. 혹시 싸부님도 같이 가시는 건가요?”
갑작스러운 동행 제의에 김혜옥은 대단히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난생처음 코뚜레를 바라보는 송아지와도 같은 눈빛에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도 말하려고 했는데. 나는 따로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 말이야.”
강준후가 남긴 기억이 속삭여 준 것 중, 지금 당장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전직 산군 김종대가 이곳 근처에서 아트로포스의 ‘껍데기’를 이용해, 강화된 강마병들을 양산하고 있다는 것.
강준후마저 그것들의 위험성을 두려워했을 정도이기에.
놈이 그것들을 더 양산하기 전에, 하루빨리 그것들을 파괴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에엑?! 싸부님? 또 바쁜 일이 생기신 거예요?”
“가봐야 할 곳이라니?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겐가?”
“강준후로부터 변절자 김종대가 이곳 근처에서 강마병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그럼 우리도 동행해야 하지 않겠나? 건곤을 조사하는 것보다. 그쪽이 더 급해 보이네만.”
“‘강마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네만. 태백이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필시 범상치 않은 놈들이겠군. 은원에 철저한 것이 우리 건곤의 방식일세. 우리도 돕도록 하지.”
강태백과 홍성동이 즉시 나를 돕겠다고 나섰지만.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곳을 담당하고 있는 김종대의 성격상, 불리하면 즉시 튀어버릴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에 여럿이 몰려가는 것보다는 나 혼자 비밀리에 놈을 암살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김종대, 그 인간의 성격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우선 길드장님께선 혜옥이와 함께, 건곤 길드의 조사에 협력해주시기 바랍니다. 혹시나 제게서 신호가 끊긴다면. 이쪽으로 지원을 와주시고요.”
“하긴. 김종대. 그 교활한 너구리 놈이라면. 우리의 침입을 눈치채는 즉시 도망가버리겠지. …알겠네. 만일을 대비해 지원을 준비해 두도록 하지. 무운을 빌겠네.”
그렇게 강태백과 대화를 마친 뒤.
나는 커다란 눈에 아쉬움이 가득한 김혜옥과 다른 이들에게 작별을 고하고는, 지체할 새 없이 강준후의 기억이 속삭여준 장소로 향하기 시작했다.
*****
[으하하하하! 오랜만이다. 애송아! 들어다오! 본존이 드디어! 드디어! 해냈지 뭐냐!]
강준후의 기억이 속삭여준 강마병 공장을 향해, 내달리던 도중.
어째선지 아트로포스와의 만남 이후,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했던 위철용이 호탕한 웃음과 함께 내 가슴팍으로부터 못생긴 얼굴을 쑤욱 드러냈다.
…그러고 보니. 이 어르신 얼굴 본지도 꽤 오래되었었군.
평소답지 않게 과하게 흥분한 것이 어째, 불길한 예감부터 드는데….
“해내셨다고요? 어쩐지 한동안 조용히 계신다. 싶더니….”
[으하하핫! 그래! 그동안 집중해야 할 일이 좀 있어서 말이다! 처음엔 이게 되나? 싶었지만! 본존이 누구더냐!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성공해버렸느니라!]
그동안 위철용이 이런 식으로 흥분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영 골치 아픈 일만 생겨났기에.
그의 호들갑스러운 설명을 듣자마자, 이맛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하지만, 이번엔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겨를조차 없는지.
내가 그런 표정을 짓거나 말거나, 위철용은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어째. 불길한 예감이 현실이 되어가는 것 같군.
[으하하하! 네놈이 낙오자 놈들의 업이니 뭐니 하는 잡스러운 것들을 흡수해댄 통에, 쓸만한 실험 소재를 잔뜩 얻을 수 있었지! 대어를 기다리는 강태공의 심정으로! 본존은 마침내! 그 탁하디탁한 강에서 ‘그것’을 건져 올리는데 성공했지!]
내 몸에 흐르는 낙오자들의 마력에서 ‘그것’을 건져냈다고?
이 양반이 대체 어디서 뭘 찾아낸거야?
낙오자들의 한과 업을 짊어진 여파로 인해, 지금도 내 몸속엔 그들에게서 흡수한 마력의 잔재들이 엉망으로 들끓고 있긴 했다.
어차피 검은 심장의 권능으로 인해, 머지않아 내력으로 변할 마력들이라 그닥 신경 쓰고 있지 않았지만, 위철용은 그 혼탁한 마력의 강에서 무언가를 건져내는 데 성공한 듯했다.
“…마력의 강에서 뭔가를 건져내요? 거기서 건져낼 만한 것이 있긴 합니까?”
[그래! 으하하. 그 꼬맹이가 그리워서…. 크흠! 아, 아니 허무하게 바스러지는 마력들이 아까워 이것저것 시도를 해보다. 마침내 ‘그것’을 건져내는 데 성공했지!]
아무래도 위철용이 건져낸 것은 그가 마음을 주었던 아트로포스와 관련된 무언가인 듯 했다.
잔뜩 흥분하여 속사포처럼 떠들어대다, 순간적으로 위철용의 본심이 튀어나온 것 같았지만.
그의 비췻빛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목격한 나는 그것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꼬맹이라. 역시 이 어르신은 안타까운 운명을 맞은 아트로포스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모양이로군. 보기보다 이상한 데서 정이 많은 양반이라니까.
[아무튼!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이렇게 떠드는 것보단 직접 보여주는게 낫겠지! 자! 보아라! 그리고 경배하라! 본존의 결실을!]
-짜악!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신나게 떠들어대던 위철용은 별안간 크게 손뼉을 쳤다.
작은 몸에서 터져 나온 것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경쾌한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봐도 박수 소리만 요란하게 퍼져나갔을 뿐, 딱히 유의미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건져낸 것이 혹시, 그렇게 큰 박수를 칠만큼의 정력이셨습니까? 뭐, 여전히 정정하신 것 같아서 좋긴 한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죠?”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자, 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위철용을 바라보았다.
내 불신 어린 눈빛과 마주한 위철용은 어색하게 미소를 짓더니, 내 가슴팍 속으로 쏘옥 파고 들어갔다.
순식간에 그의 비췻빛 신형이 내 몸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본존이 신호하면 나오라고 하지 않았더냐.]
[싫어요! 이 추악한 모습으로 어딜 나가란 말이에요!]
…뭐여?
분명 내 몸속으로 기어들어 간 것은 위철용 혼자였지만.
기이하게도 그가 내 몸으로 들어간 직후, 내 머릿속에 울린 음성은 ‘두 개’였다.
[우리 같은 존재에게 외형이 무에 문제가 된단 말이냐. 그러지 말고….]
[그럴 수도 있지 않소. 아무리 내가 여러 가지 모습을 취해보긴 했소만. 이 모습은 영….]
[뭐야?! 이 파리 새끼가 감히 본존의 외모를 평가하려고 들어!]
…두 개가 아니라 세 개?
두 개라 생각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가느다란 여성의 목소리에 더불어 중후한 남성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추가로 울려 퍼졌다.
머릿속을 윙윙 울리는 낯선 목소리들의 향연에 나는 그저 당황 섞인 표정으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자아. 소개하마. 네놈에게도 익숙한 이들일 테지!]
한참 머릿속에서 낯선 목소리들과 드잡이질을 하던 위철용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위철용과 똑같이 생긴 암갈색, 암녹색 배후령들이 줄줄이 튀어나왔다.
“뭐, 뭡니까? 분신술?! 초코맛 위철용과 올리브맛 위철용인가요?!”
[뭔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얏! 말하지 않았더냐! 네놈의 몸속에 흐르는 파편에서 뭔가를 건져냈다고!]
“그것…. 크흠! 아무튼. 옆에 있는 그분들이 말씀하신 ‘그것’입니까?”
[그래! 하나는 실수로 건져낸 덤이지만 말이지!]
‘덤’이라는 말에 위철용의 옆에 서 있던, 조금 더 짙은 색의 암록빛 위철용의 표정이 대번에 와락 구겨졌다.
[…망각의 속에서 구출해 준 것은 고맙소만. 아무리 그래도 덤이라니! 말이 심하지 않소! ]
[그래요! 게다가 애시당초 저희보고 ‘그것’이라니요! 무슨 도구 취급도 아니고!]
[그, 그게 아니라 꼬, 꼬맹아…. 본존은 그냥….]
위철용의 입에서 흘러나온 ‘꼬맹이’라는 단어가 귓가를 두드리자.
나는 비로소 그가 ‘결실’이라 칭하는 이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트로포스? 그리고….”
[뭐야. 선물을 제법 넉넉히 전달해줬다. 생각했거늘. 벌써 이 몸의 이름을 잊어버린 건가? 이거 섭섭하군. …베알제불일세.]
맙소사.
놀랍게도 위철용이 건져낸 ‘그것’이란, 내게 자신들의 힘을 넘기고 소멸했던 이들의 자아였다.
도대체 무슨 만행을 저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그들의 자아를 이용해, 자신과 똑같은 배후령의 형태로 복원시킨 모양이었다.
[뭐…. 외형이 좀 심하게 괴상해지긴 했지만. 뭐, 어쩔 수 없죠. 영락하여 소멸했던 제가 이렇게나마 당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요.]
“…도움을 준다니요?”
[그래! 도움! 본존이 그저, 꼬맹이를 그리워하기 위해, 이들을 배후령의 형태로 복원시켰겠느냐? 다 네놈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느니라!]
…누가 봐도, 그냥 아트로포스를 그리워해서 그러셨던 것 같은데.
[본의 아니게 당신의 기억을 훔쳐보게되서 죄송하긴 합니다만, 그…. 낙오자들이 제 육신으로 뭔가를 빚어낸다고 하지 않았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