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2화
“홋호! 견자단 킥!”
순식간에 홍성동에게 쇄도한 김혜옥은 그대로 몸을 팽이처럼 빙그르르 회전시키더니, 녹색 마력을 휘감은 육중한 다리로 홍성동의 복부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꾸꽈앙!
《캬하하학!》
아름드리 나무처럼 굵은 다리에서 비롯된 김혜옥의 발차기가 홍성동의 복부에 작렬하자.
괴이하게 변이된 그의 육신이 < 모양으로 꺾이더니, 입에서 핏물이 왈칵 뿜어졌다.
어찌나 무식한 공격이었는지, 홍성동의 몸에 이글거리던 시뻘건 전하가 순간적으로 잦아들었다.
“조심해! 엘더 뱀파이어는 물리적인 타격이 거의 통하지 않거든!”
“뭐예요? 분명 느낌이 있었는데…. 어머낫!”
하지만 흡혈종의 일종답게, 엘더 뱀파이어의 육체는 저주받은 피와 점액으로 이뤄져 있었다.
얼핏 보기엔 김혜옥의 흉악한 일격으로 적지 않은 타격은 입은 것처럼 보였지만,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홍성동의 몸엔 어떠한 상처도 없었다.
박쥐와 사람, 그리고 늑대를 적절히 뒤섞은 육체가 정신없이 출렁거리며, 광기를 흩뿌렸다.
생채기 조차 없어보이는 모습에 녹색 안광을 뿜어내던 김혜옥의 눈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파직! 파지지직!
《크…. 크핫! 힘이 넘친다! 늙고 노쇠한 몸에 젊음의 활기가 다시 돌아온다! 피, 피가 더 필요해!》
“쉿쉿! 번개쟁이 아저씨! 그거 젊음 아니야! 그냥 냄새나고 더러운 거야!”
광기에 절은 비명을 토해낸 홍성동은 한 마리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번개의 가시를 둘렀다.
슬라임처럼 출렁거리는 그의 몸이 정신없이 요동치며, 김혜옥을 향해 재빠르게 접근했다.
번개의 가시와 광기를 두른 비대한 몸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김혜옥의 머리 위로 뚝 떨어졌다.
-빠지지지지직!
“으갸갸갸갹!”
시뻘건 전하와 꿈틀거리는 점액에 집어삼켜진 김혜옥의 입에서 시커먼 연기가 흘러나왔다.
마력을 머금고 심상치 않은 녹색 빛을 내던 근육에 나무뿌리 같은 힘줄이 툭툭 튀어나왔다.
귀화가 일렁이던 그녀의 눈이 순간적으로 허옇게 까뒤집어졌다.
《피를 내게 바쳐라! 너희들의 붉은 피로 나는 젊음의 활기를 되찾을 지니!》
“끄, 끄르르! 셀, 셀프 케어 서비스 펀치!”
-콰앙!
삽시간에 김혜옥의 몸을 집어삼킨 홍성동의 눈에 광기 어린 환희의 빛이 떠오르자.
잠깐 정신을 잃었던 김혜옥의 눈이 희미한 생기를 되찾았다.
그렇게 정신을 다시 붙잡은 그녀는 녹색 마력을 휘감은 주먹을 번쩍 들어올리더니, 자신의 심장을 그대로 내리쳤다.
-번-쩍!
《캬아아아악!》
김혜옥이 스스로의 심장을 내리쳐, 치유의 권능을 발동시킨 바로 그 순간.
찬란한 에메랄드 빛이 김혜옥의 몸을 감싸는 것과 동시에, 어째선지 그녀의 몸을 휘감고 있던 홍성동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이 터졌다.
《ㅂ…빛! 비이잋! 저주받을 빛!》
-철퍽! 철퍼퍽!
당황섞인 신음을 토해낸 홍성동은 김혜옥에게서 도망치듯 떨어져 나왔다.
출렁이는 몸이 순간적으로 정해진 형태를 잃고, 거대한 점액처럼 변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단순한 치유의 에너지에 저렇게까지 반응한다고?
신성력이 흡혈종과 상극이긴 하지만, 김혜옥의 마력엔 신성력이 포함되어 있지 않을텐데?
“어라…?”
에메랄드 빛에 휩싸여 완전히 몸을 회복한 김혜옥조차, 홍성동의 상태에 의문을 느꼈는지.
무언가 생각에라도 잠긴 듯, 녹색 마력이 줄기줄기 피어오르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가만 있어봐. 싸부님! 이 번개쟁이 아저씨가 엘더 ‘뱀파이어’로 변이되었다고 그러셨죠?! 근데 그러고 보면 흡혈귀도 일종의 질병 아니에요?”
“흡혈귀가…. 질병이라고?”
“생각해보니 그럴 듯 하지 않아요? 괜히 멀쩡한 사람에게 전염시킬 수도 있고 건강상태(?)도 영 좋지 않게 변해버리고…. 일단 속는 셈 치고 치료를 한번 시도해 볼게요!”
“…신성력도 없는 네 치유의 마력에 타격을 입은걸 보면 그럴 듯 하긴 하네.”
“넵! 싸부님! 으어어어! 그린 라이트으으! 메잌 미 스트로오옹!”
홍성동의 상태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결론을 내린 김혜옥은 특유의 포효를 내질렀다.
나름대로 마력을 자신의 몸에 응집시키는 중인지, 그녀가 밟고 있는 땅이 쩌적 갈라졌다.
녹색 외골격이 눈부신 빛을 발하더니, 에메랄드빛 마력이 용암처럼 들끓었다.
“번개쟁이 아저씨! 제가 금방 치료해 드릴게요! 흐압!”
《…?!》
녹색 마력을 줄기줄기 뿜어내며 씨익 웃는 김혜옥의 흉악한 모습에, 이성을 잃어버린 홍성동마저 본능적인 공포를 느낀 모양이었다.
경계의 눈빛을 보내며, 푸르르 떨리던 핏빛 몸체가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딱 멈췄다.
광기만이 느껴지던 그의 핏빛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즈, 증오스러운 빛! 저리 가! 저리 가앗!》
순간적으로 눈빛이 변한 홍성동이 황급히 자리를 뜨려 들었지만, 김혜옥은 번개처럼 그의 품 속으로 파고들어 단숨에 그를 들쳐멨다
슬라임처럼 꿈틀거리는 육신이 기분 나쁠 법 한데도 김혜옥은 홍성동을 단단히 붙들었다.
-콰아아앙!
그 상태로 홍성동의 머리를 옆구리에 꽉 끼운 김혜옥은 그대로 땅을 힘껏 박차고 날아올랐다.
외골격부터 시작해서 온몸이 녹색으로 물든 그녀는 단숨에 구름 저 너머로 사라지더니….
-쐐애애애액!
중력과 가속도의 힘을 업고 빠른 속도로 바닥을 향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녹색의 마력을 전신에 휘감은 그녀와 홍성동의 육신이 한 줄기 빛나는 유성이 되었다.
엄청난 풍압에 홍성동의 점액질 몸체가 기분 나쁘게 흔들렸지만, 김혜옥의 단단한 근육은 그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흐아압! 치료와 평화와! 슬픔의-! D.D.T!”
하늘에서 거대한 거구가 구름과 구름을 가르며, 유성처럼 바닥을 향해 내리 꽂힌 그 순간!
-꾸꽈꽈꽈꽝!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세상이 녹색으로 번쩍 물들었다.
엄청난 크기의 크레이터가 움푹 파이며, 흙먼지와 함께 버섯 구름이 요란하게 솟구쳤다.
폭심지에서부터 돌과 암석이 파도처럼 치솟더니,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지표면 전체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무너져가던 주변의 건물들이 완전히 파괴되며, 부서진 파편들을 눈물처럼 후두둑 흩뿌렸다.
“…충격 전달 성공!”
《….》
하늘 높이 솟구쳤던 녹색 버섯 구름과 흙먼지가 조금씩 잦아들자.
거대한 크기의 크레이터 한 복판에서 반쯤 몸이 땅에 파묻힌 두 개의 인영이 보였다.
곧이어 엄청난 짓을 저지른 채로 해맑게 웃는 김혜옥의 몸에서 에메랄드 빛이 폭사 되었다.
-번-쩍!
충격 에너지를 치유 에너지로 바꾸는 것이 바로 김혜옥의 능력!
까마득한 높이에서 떨어져내린 무식한 충격이 그대로 치유의 에너지가 되었다.
운석이라도 떨어져 내린 듯한 크레이터에서 에메랄드 빛이 찬란하게 솟구치더니, 바닥에 머리가 완전히 쳐박힌 홍성동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기, 길드장님의 몸이?!”
-파지직! 파지지직!
김혜옥의 괴이쩍은 추론이 옳았던 것일까?
치유의 에너지에 뒤덮인 홍성동의 몸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요란한 스파크와 함께, 그의 육신을 뒤덮었던 핏빛 마력이 에메랄드 빛에 잡아먹혔다.
그와 동시에 홍성동의 몸 곳곳에서 섬뜩하게 으르렁거리던 핏빛 전하가 사그라들었다.
기이하게 변이된 채로 슬라임처럼 출렁거리던 몸뚱이가 일정한 형상을 이루었다.
“역시! 흡혈귀는 질병에 불과하다니까요!”
“…그러게. 어쩐지 네가 지닌 치유의 권능에 격하게 반응하더라니.”
도대체 무슨 원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째선지 에메랄드 빛이 사그라들자, 홍성동의 모습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엘더 뱀파이어와 유사하게 변이되었던 육신이 평범한 중년 아저씨의 그것으로 변했다.
시뻘건 핏물이 찰랑거렸던 불측한 마력이 꺼져가는 잔불처럼 점점 사그라들었다.
땅에 머리를 처박은 채, 의식을 잃어버린 홍성동의 육중한 몸뚱이가 간헐적으로 푸들거렸다.
…단순히 김혜옥의 치유 에너지가 홍성동을 치유해버린 걸까?
아니면 그녀의 몸에 박힌 가네샤의 ‘파편’이 뭔가 일을 저지른 걸까?
“웨이크 업 플리즈! 번개쟁이 아저씨!”
김혜옥의 변화에 대해 내가 잠시 상념에 빠진 사이.
치료(?)를 끝마친 김혜옥은 마치 밭에서 무를 뽑아내는 것처럼, 머리를 처박은 채로 기절한 홍성동의 몸을 쑤욱 뽑아냈다.
그리곤 특유의 기이한 함성을 지르더니, 홍성동의 가슴팍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우지직!
“커! 커허헉! 이, 이게 무슨 날벼락…. 쿨럭.”
갈비뼈가 으스러졌다 다시 붙는 소리와 함께, 홍성동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다소 치료과정이 과격하긴 했었지만, 김혜옥의 치료답게 완벽한 효과를 발휘한 모양이었다.
컥컥거리며 흙을 뱉어내는 홍성동의 눈빛에선 조금 전과는 다르게 광기가 요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헤이 번개쟁이 아저씨! 이제 좀 정신이 들어요?”
“…말하는 고릴라? 크, 크흠! 아, 아니지! 이보게. 시형군! 이들은 도대체 누군가. 여기는 또 어디고!”
김혜옥의 질문에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감상평을 내놓으려던 홍성동은 귀화가 일렁거리는 그녀의 눈을 마주하자, 헛기침과 함께 슬그머니 김시형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태백 길드의 강태백 길드장님과, 설용호 산군님. 그리고…. 김혜옥 치유사님입니다.”
“뭐라고? 강태백과 그 떨거지들이 어째서 우리 구역에…. 켁! 케헥! 그보다 왜 입에서 흙맛이 느껴지는 거지?”
흙을 계속 뱉어내는 홍성동은 지금의 상황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차별적인 광기와 살기를 내뿜던 두 눈엔, 지금은 의문만이 가득했다.
그는 계속해서 흙먼지를 뱉어내더니, 조금 전의 격돌로 인해 더욱 엉망이 되어버린 광장과 구석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는 강태백을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성동이…? 자네가 도대체 여기 왜 나타난 건가? 설마하니…. 이건 죽기 전의 주마등인가?”
홍성동과 흔들리는 시선과 마주하자, 강태백의 입에선 몽롱한 의문이 흘러나왔다.
생으로 영혼이 뽑혔다가 다시 살아난 부작용인지. 그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자네야말로 도대체 왜 우리 앞마당에 태연히 모습을 드러낸 건가! 여긴 우리 건곤의 구역일세!”
강태백의 얼굴을 확인한 홍성동의 표정이 언짢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찌푸려진 그의 얼굴에서도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혼란이 가득했다.
…대충 말하는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세뇌 같은걸 당한 모양인데.
이 아저씨 몸에선 정신 조작계 마력 특유의 냄새가 전혀 나질 않았단 말이지….
“자네 구역이라니? …그러고보니 그런 것 같긴 하군. 미안하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서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아서 말일세.”
“5대 길드 간의 불가침 선언을 주장한 건 분명 자네 아니였나?! 그런데 자네가 어찌…. 잠깐 그러고보니 나는 분명히 길드장실에서….”
정신줄을 반쯤 놓고 혼란스러워하는 두 중년인의 모습에, 나와 김시형을 서로를 바라보고 누가 먼저랄새도 없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동병상련의 고통을 나눈 우리는 서로의 길드장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간략히. 일러주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 우리 건곤이 태백 길드에 신세를 졌을 줄이야.”
“그랬군. 어쩐지 기억이 흐릿하다 했더니, 아예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었어. 어쩐지 요즘들어 진귀한 경험을 여러번 해보는 것 같군.”
나와 김시형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두 길드장의 표정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깐깐한 여우처럼 깡마른 강태백과 후덕한 곰처럼 두툼한 홍성동의 입에서 동시에 혼란스러운 감정을 품은 한숨이 연기처럼 흘러나왔다.
“그보다 내가 엘더 뱀파이어로 변이되었다고? 그래서 거기 그…. 치유사가 날 치료했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먼젓번 회의에서 내가 일러주지 않았나. 이중환도 놈들에게 당해, 몬스터로 변이되어 생을 마감했다고 말일세.”
“…자네가 그토록 부르짖었던, ‘업계에 깃든 어둠’이 진실이었나 보군. 솔직히 그땐 자네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듣지 않았네만…. 이 꼴을 보아하니 자네의 말이 옳았던 것 같구먼.”
힘없이 중얼거린 홍성동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떨구었다.
어느정도 정신이 들었는지, 냉철한 총기를 되찾은 강태백은 말없이 그를 지켜보았다.
“전에 말했듯, 이중환은 길드의 변절자에게 당해 몬스터로 변이 당했지. 혹시 자네도 마음에 걸리는 이가 있나? 갑자기 찾아온 인물이라든지, 갑자기 태도가 바뀌거나 한 인물 말일세.”
“…그러고보니, 얼마 전에 자네 길드의 박양환이라는 자가 나를 찾아왔었네. 그리고 ‘성의’ 표시라면서….”
놀랍게도 홍성동의 입에선 의외의 인물이 튀어나왔다.
태백 길드의 나머지 두 산군 중 하나이자, 산군들의 실질적인 수장이었던 박양환.
도무지 행방을 찾을 수 없었던 변절자에 대한 실마리가 의외의 곳에서 튀어나왔기에.
홍성동을 바라보던 나와 강태백의 표정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진중하게 굳어졌다.
“그래, 거 충분히 수상한 일이로군. 놈에게 성의 표시로 도대체 뭘 받은 겐가?”
“그, 그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에게 뭘 받았는지 도저히 기억이 나질 않네. 부, 분명히 굉장히 귀한 것을 받았던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아무래도 박양환은 놈들에게 뭔가 특수한 정신 조작계 능력을 부여받은 모양이로군.
분명 홍성동의 몸에선 정신 조작이나 세뇌 특유의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충격과 공포에 빠진 그의 모습은 누가봐도 정신 조작 계통의 능력에 당한 모습이었다.
그가 박양환에 대해 기억하려고 애쓰는 것을 본 강태백은 그에게서 이중환이 겹쳐보인 모양인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제가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