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6화
“히…데붓!”
-쩌적! 쩌저저적!
장은택의 몸뚱이가 흉측한 종양에 집어삼켜져, 무너져 내리는 것과 동시에.
주변을 완전히 휘감았던 왜곡된 공간 또한 허무하게 깨어져 나갔다.
“빠져나왔어요! 싸부님!”
“그래, 역시 놈을 쓰러뜨리니. 왜곡된 공간도 원래대로 돌아오는군.”
왜곡된 공간의 뒤틀린 바닥이 아닌, ‘정상적인’ 대지가 굳건하게 내 몸을 받쳐주었다.
그에 더불어 어디에선가 불어온 시원한 바람이 볼을 가볍게 간질였다.
비로소 밖으로 빠져나왔다는 해방감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후헤헤헤. 닌자! 사무라이! 엄마 아빠도 다같이 즐겨보아요!”
“…그건 그렇고 도대체 이 양반들은 언제쯤 정신을 차리련지 모르겠군.”
바깥으로 빠져나와, 잠깐의 평화를 맛보려던 찰나.
여전히 제정신을 찾지 못한 월홍 공격대원들의 해괴한 목소리가 귓가에 아프게 파고 들었다.
그들의 정신상태는 장은택이 사망한 것과 별개의 문제인지, 월홍 공격대원들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먼젓번에 그랬던 것처럼 염룡등천을 응용하면 이들을 고칠 수 있겠지만.
지금 당장 급한건 그게 아니지.
“혜옥아. 네 ‘치유’ 스킬로 이 아저씨들을 좀 치료해주지 않겠니?”
“넵! 정신이 나간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은 처음이지만! 머리를 ‘조금’ 자극해주면 원래대로 돌아오겠죠!”
“그래. 부탁한다. 나는 당장 가볼데가 있어서.”
급한대로 김혜옥에게 월홍 공격대원들의 처우를 맡긴 나는 즉시 화안금정을 발동시켜, 강태백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찾았다.”
황금빛 안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반쯤 폐허가 되어버린 거리를 살펴본 끝에, 나는 마침내 강태백이 남긴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강태백 역시 장은택과 동행한 산군과 격전을 치르는 중인지, 그가 남긴 전투의 흔적은 격렬하기 짝이 없었다.
도로 블록과 아스팔트가 엉망으로 그을린 흔적을 찾아낸 나는 지체할 틈 없이, 강태백이 남긴 흔적을 따라 몸을 날렸다.
*****
“길드장님!”
“…설용호? 자네인가? 안타깝군. 네놈들의 뜻대로는 되지 않은 것 같아서 말이야.”
급하게 서두른 덕분인지, 강태백은 다행히 아직까진 무사한 상태였다.
만신창이가 된 채로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낯선 인물과 대치하고 있긴 했지만.
상처투성이인 그의 몸엔 치명상으로 여겨질 정도로 대단한 상처는 없었다.
“그러게. 아깝네…. 그 머저리 아저씨가 조금만 더 시간을 끌어 줬으면 좋았을 것을.”
강태백과 대치중인 남성의 외모는 전체적으로 늘씬한 것이 중성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겼다.
칠흑처럼 시커먼 머리칼은 다리까지 시원하게 쭉 뻗은 채로, 낭창낭창하게 흩날리고 있었고.
창백하게 질린 새하얀 얼굴은 남성보단 여성의 그것에 가까운 가녀린 인상이었다.
아무래도 놈이 정황상 장은택이 말하던 ‘또 다른’ 산군인 것 같은데….
산군 중에 저렇게 생긴 작자가 있었던가?
회귀 전, 태백 길드의 정점에 군림하던 산군들의 모습을 죄다 머릿속에 떠올려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렇게 ‘중성적인’ 외형을 자랑하는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내 기억 속의 산군들은 유영화를 제외하곤 죄다 땀내나게 생긴 아저씨들 뿐이었다.
“…장은택도 네놈처럼 강해지긴 한 모양이다만, 그에겐 어림도 없었던 모양이지! 이제 이 지긋지긋한 대치상태도 끝이 나겠군! 네놈을 불태워주마! 강준후!”
…뭐? 강준후라고?
그 우락부락한 근육질 남정네가 저렇게 가녀리게 변했어…?
내 기억 속의 강준후는 전형적인 군인의 외모를 자랑하던 거구의 근육질 남성이었다.
하지만, 내 눈앞에 서 있는 ‘강준후’의 얼굴에선 그 시절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흐응…. 그래. 그 햇병아리가 강해지긴 한 모양이야.”
살짝 고개를 돌린 강준후는 고혹적인 교태가 서려 있는 끈적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생긋 웃음 지은 놈의 미소 속엔 잔뜩 날이 서 있는 어둡고 음울한 욕망이 깃들어 있었다.
모든 것을 단숨에 자르고 토막낼 것 같은 거대한 위압감이 강준후의 작은 몸에서 연기처럼 흘러나와, 주변을 장악해 나가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장은택 그 머저리 때문에, 길드장 나으리 당신의 육신을 미처 손에 넣지는 못했지만….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네.”
온몸에서 끈적한 살기를 아지랑이처럼 뿜어낸 강준후는 히죽 웃으며, 가녀린 몸에서 검붉은 촉수를 뽑아냈다.
놈의 몸에서 폭발하듯 튀어나온 검붉은 촉수는 마치 살아있는 나무뿌리처럼 거칠게 땅 속을 파고들었다.
-콰드드득!
“이, 이게 무슨….”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땅속을 헤집고 들어갔던 촉수의 끝엔 장은택의 뒤틀린 시신이 덩이뿌리처럼 매달려 있었다.
한때 동료였던 이의 흉측한 시신을 섬뜩한 시선으로 바라본 강준후는 크게 입을 벌려, 장은택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너무도 그로테스크한 광경에 그것을 바라보던 강태백의 미간이 절로 찡그려졌다.
…죽어버린 동료의 시신을 저런식으로 섭취한다고?
서, 설마! 놈의 특성 트리 『식욕의 지배자』를 저런 식으로 발동시키려는 건가?!
-콰앙!
강준후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눈치챈 나는 어둠달을 틀어쥐며, 마력과 내력을 주입했다.
억센 힘줄이 돋은 나의 오른발이 바닥을 딛자, 단단한 돌바닥이 우지직 갈라졌다.
동시에 마력과 내력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외골격이 나의 몸에서 포효하듯 돋아났다.
“길드장님! 막아야 합니다! 강준후가 무슨 특성 트리를 가졌는지 있으셨습니까?!”
“…『식욕의 지배자』! 그, 그래! 놈의 특성 트리는 분명 자신이 섭취한 대상의 능력을 일시적으로 복제하는 능력을 지녔었지!”
강준후가 지닌 특성 트리 『식욕의 지배자』는 사용자가 섭취한 대상의 능력을 일정 시간동안 복제할 수 있는 권능을 지녔었다.
예전의 강준후는 식인을 일삼을 만큼 과격한 인간이 아니었지만, 마족과 결탁한 지금의 놈은 인간으로서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어버린 것이었다.
까드득 이를 깨문 나는 어둠달을 폭풍처럼 휘두르며, 라크슈마의 힘과 권능을 두른 채로 강준후에게 달려들었다.
-꽈지지직!
“…그래. 그들을 흡수한 뒤론 이젠 ‘일시적’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바뀌었지만 말이야♡”
장은택이 그랬듯, 어둠달에 의해 토막난 강준후의 몸이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어가더니.
불길하게 휘몰아치는 어둠 속에서 멀쩡한 상태의 강준후가 여유롭게 웃으며 나타났다.
…빌어먹을. 장은택의 능력을 그 사이에 완벽하게 흡수한 건가?
하지만 장은택의 재생 능력 따윈 이미 파훼법을…. 으응?
라크슈마의 영웅시를 두른 상태였기에, 어둠달의 창날엔 장은택을 패배시켰던 생명의 기운이 듬뿍 묻어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장은택의 권능을 그대로 흡수했음에도 불구하고 강준후는 재생능력이 폭주하지 않았다.
-꾸드득!
“그 아저씨가 어떻게 패배했나 했더니. 멍청하게 재생 능력을 역이용당해서 패배했나봐? 한심하긴.”
피식 웃은 강준후는 흡수한 재생의 권능을 다시 거둬들였다.
놈이 재생의 권능을 거두자, 어둠달에 서려있던 생명의 기운이 오히려 강준후의 육신을 완벽하게 회복시켰다.
고혹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본 강준후의 눈에서 오만한 살기가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예전과는 다르게, 흡수한 능력을 자유자재로 거둬들일 수도 있는 건가?
빌어먹을 정도로 사기적인 존재로 거듭나 버렸군….
“하으응…. 그 멍청하고 땀내나는 아저씨의 권능을 흡수한 것만으로도 이렇게 배가 부른데. 우리 길드장님과 귀여운 ‘그릇’을 흡수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강준후는 새로운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흉폭하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중성적인 그의 얼굴에 남성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고혹적인 미소가 요염하게 떠올랐다.
검붉게 타오르는 마력이 그의 몸을 덮으며, 거대한 나무 형태의 외골격을 생성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수많은 헌터들을 잡아먹었지만. 내 끝없는 허기를 채워줄만 한 먹잇감은 어디에도 없었지…. 진작 다른 산군들을 잡아먹을 걸 그랬어.”
-촤르르륵!
무언가가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나무 형태의 외골격에서 검붉은 나뭇가지들이 촉수처럼 자라났다.
서낭당의 신목처럼 으스스하게 흔들리는 나뭇가지엔 수많은 이들의 얼굴이 열매처럼 매달려 있었다.
원한에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들의 정체는, 놀랍게도 강태백을 배신한 산군들을 따라갔던 공격대원들이었다.
“…단순히 배신한게 아니라. 네놈이 그들을 잡아먹은 것이었군! 이 악독한 것!”
굳은 얼굴로 나뭇가지에 매달린 이들의 얼굴을 확인한 강태백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주인의 분노에 감응한 것인지, 그의 겉옷이 화르륵 불타오르더니 백 일곱 개의 구슬이 시퍼런 불꽃을 머금고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미처 말릴 새도 없이 강태백은 나를 지나쳐, 강준후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흐응. 이제서야 『번뇌』를 꺼내다니. 우리 길드장님께서도 나를 진심으로 상대한게 아니었구나?”
“당연한 소리를! 음험하기 짝이없는 네놈들이 무슨 흉계를 꾸몄을 줄 알고 처음부터 전력으로 나오겠나!”
-후와앙! 후와아앙!
불꽃을 머금을 구슬이 흉흉하게 회전 할때마다, 시퍼런 불꽃이 대기를 달궜다.
강태백이 분노에 찬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의 발걸음을 따라 시퍼런 화염이 솟구쳤다.
가벼운 등산복을 걸친 상체가 화염에 집어삼켜지더니, 시퍼런 외골격이 그의 몸을 뒤덮었다.
한 때 정점에 이르렀던 강자의 압도적인 살기가 주변을 후끈하게 달궜지만, 강태백을 바라보는 강준후의 눈은 여전히 여유를 간직하고 있었다.
“어째서 그들이 당신을 노리는지 궁금했는데. 이제야 알겠어. 당신도 평범한 존재는 아니었어.”
알 수 없는 소리를 뇌까린 강준후는 희미하게 웃으며, 땅속에 박혀있던 외골격 나무의 뿌리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촉수처럼 불길하게 꿈틀거리는 나무뿌리들이 꼿꼿하게 몸을 세운 채, 강태백을 향해 스멀스멀 움직였다.
-촤악! 촤아아악!
먹잇감을 노리는 뱀처럼 접근한 나무뿌리들이 강태백의 목숨을 노리고 거칠게 짓쳐들어왔다.
주변을 완벽히 장악한 나무뿌리들을 흘끗 바라본 강태백의 눈이 시퍼렇게 달아올랐다.
“고작 이런 나무뿌리 따위로 나를 막을 순 없다! 흐으읍!”
-화르르륵!
상처입은 맹수처럼 포효하는 강태백의 외골격에서 시퍼런 불꽃이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맹렬하게 회전하는 번뇌의 구슬들이 주인을 노리고 짓쳐들어온 뿌리를 순식간에 불태웠다.
사방을 강렬하게 물들인 시퍼런 불기둥 속에서 그보다 더 강렬한 두 개의 귀화가 유령처럼 둥실 떠올랐다.
“헤에…. 역시 나무뿌리를 휘두르는 것 정도로는 당신을 어떻게 할 수 없나보네. 아무래도 이쪽에서도 ‘조금’ 진지하게 나와야겠어.”
강태백의 불꽃으로 인해, 외골격의 나무뿌리가 전부 불타버리자.
고혹적인 미소를 지은 강준후는 눈에서 검붉은 안광을 번뜩였다.
억센 나무둥치 속에 숨은 그의 몸뚱이에서 질식할 듯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심상치 않은 검붉은 마력이 강준후의 외골격에서 아지랑이처럼 퍼져나와, 주변을 어둡게 물들였다.
“2회전을 시작할 시간이야. 어디 한번 열심히 발버둥 쳐보길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