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4화
-짝짝.
숨이 멎어버린 고릴라의 시신을 확인하려던 찰나.
갑자기 어디에선가 느릿하면서도 묘하게 경쾌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시험 삼아 만들어낸 장난감만으론 그대에게 어떤 인상도 남기지 못했던 모양이군.”
어째선지 귀에 거슬리는 느릿한 박수 소리와 함께.
불길하게 일렁거리는 시커먼 암흑 속에서 귀화처럼 시퍼렇게 타오르는 안광이 둥실 떠올랐다.
곧이어 몸에 착 달라붙는 가죽 갑옷을 입은 젊은 사내가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장은택?”
“쉬이 못 알아보는 것도 당연하겠지. 그들과의 거래로 나는 전성기의 젊음을 되찾았거든.”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사내의 정체는 바로, 태백의 산군이었던 장은택이었다.
‘늙은 늑대’라는 노회한 별명이 증명해주는 것처럼, 그는 원래 은퇴를 바라보던 노인이었지만.
마족들과 모종의 거래를 끝낸 모양인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장은택은 놀랍게도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비록 불완전한 실험체에 불과한 존재였지만. 자네와 ‘길드장님’을 성공적으로 이곳에 끌어들였으니. 정말이지 이 친구가 큰일을 해냈지 뭔가.”
비릿한 미소를 지은 장은택은 고릴라의 시신에 가까이 다가가, 가볍게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놈의 팔이 기이하게 변형되더니, 시커먼 어둠이 너울거리는 야수의 형상을 취했다.
-콰드드득!
장은택의 팔이 변형된 야수가 아가리를 쩌억 벌려, 고릴라의 몸뚱이를 물어뜯자.
질긴 가죽이 종잇장처럼 부욱 찢어졌다. 단단한 근육이 찰흙처럼 뚝뚝 떼어졌다.
뼈와 살이 동시에 분쇄되는 듯, 섬뜩한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그 추악한 모습도 놈들과의 거래로 얻은 결과물인가 보지?”
“추악하다니…. 자네의 비루한 미적 감각에 애도를. 이 ‘아름다운’ 육신을 두고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네만.”
이미 인간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라져 버린 장은택의 모습에 나는 놈을 노려보며, 입꼬리를 뒤틀어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놈은 내 비웃음 섞인 반응 따위엔 그리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인지.
오히려, 과시하듯 자신의 뒤틀린 육신 위에 시커먼 어둠을 두르기 시작했다.
-크르르르르.
-캐앵! 캥! 캥!
장은택의 몸을 망토처럼 휘감은 어둠에서 수없이 많은 야수의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시뻘건 귀화를 불태우며,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적의와 살기를 뿜어내는 놈.
일그러진 얼굴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원하듯 구슬피 울부짖는 놈.
쫙 찢어진 입가로 광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노릿한 안광으로 나를 노려보는 놈.
각각의 의지를 지닌 놈들인지, 장은택의 몸을 징그럽게 휘감은 야수들은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이며, 끊임없이 울부짖고 으르렁거렸다.
“보게. 아름답지 않은가? 그들의 배려로 ‘불멸자’들의 육신과 영혼을 수도 없이 포식한 결과물이라네. 그들 사이에서도 규격 외의 열등한 얼간이들이 적지 않았거든.”
장은택은 꿈틀거리는 어둠으로 이뤄진 야수들을 망토처럼 휘감은 채, 뒤틀린 웃음을 지었다.
‘불멸자’ 그러니까 마족들을 포식했다는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놀랍게도 놈의 몸뚱이에선 군주급 마족을 가볍게 상회 하는 마력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장은택의 원래 특성 트리가. 『게걸스러운 탐식의 길』이었지 아마?
회귀 전의 기억에 의하면, 장은택은 몬스터들의 살점을 흡수해, 놈들의 능력을 일부 흡수하는 전설급의 특성 트리, 『게걸스러운 탐식의 길』을 소유하고 있었다.
놈이 지껄인 바에 의하면 아무래도 장은택은 모종의 거래를 통해, ‘열등한’ 마족들을 수도 없이 포식하여 놈들의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 같았다.
먼젓번의 나태상처럼 기존에 지니고 있던 능력을 터무니없이 강화한 산군이라….
게다가 비열한 마족 놈들의 성격상, 놈에게 모종의 개조를 해뒀을 게 분명하니. 쉽지만은 않겠어.
-크르르르르….
장은택을 노려보며, 마력과 내력을 끌어올리려던 찰나, 이변을 감지한 야수들이 낮게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으르렁거리는 저음의 울음소리가 주변을 장악하기 시작하자, 주변의 공기가 꽝꽝 얼어붙었다.
모든 것을 질식시켜버릴 듯한 살기가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눈꽃처럼 피어났다.
-콰르르릉!
“푸흐흐. 그래. 우리 사이에 대화는 별 필요가 없겠지. 그들은 자네를 ‘잠시’ 붙들어두라 했네만…. 자네의 몸뚱어리가 유난히 맛있어 보여서 말이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내 쪽을 노려본 장은택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놈과 눈을 마주친 순간, 이제껏 상대해온 마족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압도적인 마력에 전신의 솜털이 쭈뼛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성좌의 힘을 일부 되찾았던 아스모데우스보다 강하다고?
「잊혀진 자들의 영웅시의 효과에 따라, 영웅시 『바알제불』가 잊혀진 영웅의 힘과 권능을 노래합니다.」
「사용자님이 보유한 마력에 따라, 영웅시 『바알제불』의 효과는 영구적으로 지속됩니다.」
장은택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나는 즉시 바알제불의 영웅시를 다시 발동시켰다.
심장에 박힌 바알제불의 신물이 암녹색 마력을 활화산처럼 토해내며, 그의 권능을 내 몸 곳곳에 퍼뜨렸다.
“그것이 바로 ‘그릇’으로서의 힘인가? 아주…. 아주! 맛있어 보이는구나!”
『잊혀진 자들의 영웅시』를 감지한 장은택의 표정이 광기를 머금었다. 한 마리 야수처럼 광포한 포효를 토해낸 놈의 몸에서 시커먼 암흑이 쫘악 퍼져 나갔다.
“크읏!”
광포하면서도 사악하기 그지없는 마력에, 멍하니 이쪽을 지켜보던 월홍 공격대원들이 기겁하며 물러섰다.
침음성을 삼키며 멈칫 물러선 김시형의 얼굴에 시퍼런 힘줄이 후두둑 돋아났다.
한 마리 굶주린 야수처럼 역병처럼 공포를 흩뿌리는 장은택의 마력을 마주한 공격대원들은 뱀 앞에서 굳어버린 한 마리 연약한 토끼와도 같은 몰골이 되어버렸다.
“네 살을 갈기갈기 찢고! 뼈를 발라! 네 권능과 힘을 탐하리라!”
“할 수 있으면 해보시던지!”
장은택의 말을 툭 끊은 나는 이죽거리는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동시에 운룡보를 운용하며, 나는 놈에게 가까이 파고 들었다.
“일단. 한 대 맞고 시작하자.”
-뻐억!
이죽거리는 속삭임 소리와 함께, 어둠달의 창날이 장은택의 입가를 파고 들었다.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인간의 그것을 닮은 싯누런 이빨이 우수수 박살 나 허공에 흩날렸다.
“크흐흐흐! 맛있는 일격이로군! 역시 잡아먹을 가치가 있는 사냥감이야!”
기습을 허용한 장은택은 호기롭게 외치며, 다시 고개를 돌렸지만.
애석하게도 놈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가한 만담 따위가 아니었다.
-꽈과과광!
약식 암룡출동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장은택의 머리가 옆으로 뿌드득 꺾였다.
내력과 화염이 뒤섞인 파편의 폭풍 속에서 놈의 머리가 녹색 체액을 흩뿌리며 산산히 분쇄되었다.
“크으르륵! 푸흐흣!”
서서히 재생되어가는 머리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자.
나는 인정사정 보지 않고, 놈의 박살 난 머리통을 향해 계속해서 창날을 휘둘렀다.
화염이 이글거리는 창날이 남아있는 뼈를 썽둥 잘라냈다. 길쭉하게 붙어있는 살점을 활활 불태웠다.
“정말 좋구나! 아주 좋아! 강한 사냥감일수록 사냥할 가치가 있는 법이지!”
공격에 무력하게 얻어맞던 장은택이 돌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갈갈이 분쇄되고 저며지며 타들어 갔던 머리는 어느새 완전히 재생을 끝낸 상태였다.
나를 바라보는 장은택의 주변에 돌연, 시커먼 암흑이 용암처럼 들끓었다.
“물어 뜯어라! 놈의 살점을 취해라!”
웃음소리와 함께 장은택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암흑 속에서 거칠게 요동치는 야수들의 무리가 삽시간에 사방을 뒤덮었다.
어둠으로 이뤄진 놈들의 송곳니가 내 숨통을 노리며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하지만. 닿지 않으면 될 뿐!
-쿠왕! 쾅! 쿠와앙!
화안금정의 힘으로 황금빛으로 변한 시야에서 장은택의 공격이 감지된 순간.
온몸에 와류처럼 들끓고 있던 내력과 마력의 소용돌이가 무서운 힘을 발휘하였다.
놈의 공격을 피해, 다른 곳으로 도약하자. 폭발하는 듯한 굉음과 함께 바닥이 쩍쩍 갈라졌다.
몸이 쭉 늘어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주변의 풍경이 휙휙 바뀌었다.
“제법 몸놀림은 날쌔다만! 이 몸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쿠콰콰쾅!
하늘에서 너울거리던 암녹색 장막이 별안간 뚝 떨어져 내렸다.
하늘거리는 장막이 바닥에 내려앉자, 폭음과 함께 콘크리트 바닥이 썩어 문드러졌다.
끔찍한 악취와 요란하게 비산한 먼지가 사방을 정신없이 수놓았다.
-꾸드드득!
사방을 잠식하며 날아든 야수들의 무리는 순식간에 대지를 타고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회색빛 콘크리트가 시커멓게 썩어들어가며,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썩어들어간 콘크리트가 무너져 내일 때마다. 앙상한 뼛조각 같은 하수관이 툭툭 튀어나와 더러운 물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치잇!”
그렇게 짓쳐들어온 부패의 파동이 뱀 앞에 선 개구리처럼 얼어붙은 인원들을 덮치려고 들자.
속으로 침음성을 삼킨 나는 내력이 듬뿍 주입된 어둠달을 그대로 바닥에 내려 꽂았다.
어둠이 이글거리는 어둠달은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을 단숨에 쑤욱 파고 들어갔다.
-화르르륵!
염룡등천의 신묘한 묘리가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감과 동시에.
내력이 쭈욱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며, 바닥에 주입된 충만한 내력이 불꽃이 되어 솟구쳤다.
화르륵 타오른 내력의 불꽃은 바닥을 잠식해오는 삿된 기운을 살라먹으며 거세게 타올랐다.
월홍 공격대원들을 노렸던 부패의 파동은 그렇게 염룡등천의 불길에 먹혀 사그라들었다.
“큽. 크읍!”
부패의 파동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것 까진 좋았지만. 상황은 그렇게까지 좋지 않았다.
바닥을 타고 흐르는 부패의 기운을 막아내는데, 나는 상당한 내력을 소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동안 개미형 몬스터들을 상대하며 막대한 양의 마력을 흡수했긴 하나. 너무 많은 내력을 소모한 탓에 순간적인 내력의 공백이 발생되었다.
“푸흐흐흐. 어리석긴…. 다른 이들을 챙길 여유가 없을텐데 말이지!”
내 몸에서 휘몰아치던 내력이 깃든 시커먼 와류의 크기가 줄어든 것을 눈치챈 장은택은 흉측한 미소를 지으며, 다음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파스스스!
순간적으로 장은택의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번뜩였다.
놈의 두 개의 입이 동시에 벌어지며, 뭉글뭉글한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사방으로 퍼져나간 음험한 기운은 시커먼 야수들이 되어, 어둠의 육신을 빚어내기 시작했다.
《끼르르륵!》
음험한 기운에 잠식당한 시신들은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싸늘한 죽음의 세계에서 일시적으로 돌아온 놈들의 눈에 장은택의 그것과 같은 녹광이 노릿하게 번쩍였다.
“사냥의 시간이다. 나의 종복들아. 사냥감들의 여린 살점으로 내게 바칠 공물을 빚어내라!”
장은택의 고함이 천둥처럼 울려퍼지자.
일그러진 어둠 속에서 빚어낸 암흑의 야수들이 거칠게 울부짖으며, 사방으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콰득! 콰드득!
나는 공포로 인해 굳어버린 공격대원들을 보호하며, 어둠달을 번개처럼 휘둘렀다.
어둠달의 창날이 되살아난 몬스터들의 육신을 순식간에 꿰뚫으며, 놈들을 다시 무의 세계로 다시 돌려 보내줬지만….
“빌어먹을!”
장은택의 몸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들의 숫자는 많아도 지나칠 정도로 많았다.
어둠달의 창날이 정면의 몬스터들을 휩쓸고 있는 사이.
측면을 노리고 숨어 들어온 놈들이 얼어붙어 있는 공격대원들에게 아래턱을 휘둘렀다.
“큭!”
급작스러운 습격에 이를 까득 깨문 나는 재빨리 오른손의 외골격에 내력을 주입하여, 측면으로 파고 들어온 몬스터들에게 약식 암룡출동을 날렸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몬스터들의 시신이 썩은 수박처럼 파사삭 부서졌다.
검은 심장이 음울하게 맥동하며, 놈들의 육신을 불태우고 마력을 앗아오고 있었지만.
막대한 양의 내력과 마력을 연속으로 소모한 덕에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