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 잘생겼다!-251화 (251/309)

제251화

이제 막 등산을 마친 참인지, 등산복에 산악회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는 말 없이 자신의 앞에 놓인 음료를 연신 들이켰다.

-쿠르르륵!

등산복 차림의 남자가 빨대를 통해, 바닥이 드러난 음료를 신경질적으로 힘껏 빨아들이자.

얼음밖에 남지 않은 플라스틱 컵에서 기묘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엇이 그리도 불만인지, 말없이 음료를 들이켜던 그는 기이한 신음을 내며 탁자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기 시작했다.

“…벌써 두 시간째일세.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건가?”

푹 눌러쓴 산악회 모자 아래에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반쯤 으르렁대듯 말하는 등산복 차림의 남자, 강태백의 시선이 마침내 내 쪽을 향하자.

나는 어깨를 으쓱한 뒤, 탁자에 놓여있는 쿠키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야. 저도 정확히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는 알 수 없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손에 넣은 정보는 그저, 오늘 이곳에서 놈들이 ‘무언가’를 저지를 것이라는 단편적인 내용뿐이에요.”

인사팀원들과 뒤틀린 운명 클랜이 남긴 정보를 분석한 이세영의 경고에 따라.

나와 강태백은 어울리지도 않는 등산복 차림으로 대충 변장한 채, 아침 일찍부터 건곤 길드 강남 지부 인근의 카페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 상태였다.

“끄으응…. 소혜나 석필이 형님이라도 모시고 왔으면. 이야기하는 재미라도 있었을 것을.”

“아직 뒷수습이 끝나지 않은 상황이라. 한창 바쁠 때 아니겠습니까.”

많고 많은 인원 중 굳이 나와 강태백이 나선 이유는 간단했다.

오직 나와 그만이 다른 산군들을 상대할 만큼, ‘만전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정욱과 휘하의 설악 공격대는 아직 먼젓번에 입은 부상에서 채 회복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양석필과 남부 연합은 내분으로 인해 쪼개졌던 세력을 아직 다 추스르지 못한 상황이었다.

혜옥이를 데려온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그녀는 조합장으로 등극한 언니를 도우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나는 일행 중 상대적으로 가장 여유로운 강태백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지루함과 무료함을 버티지 못하는 중년 아저씨 특유의 히스테리를 제대로 겪어보는 중이지.

“끄응….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언제고 이렇게 죽치고 앉아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 아닌가. 뭔가 불온한 조짐이라도 보인다면 모르겠네만….”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끝을 흐린 강태백은 주변을 흘긋 바라보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둘에, 망고 마카롱 하나 나왔습니다.

-네네, 혹시 캐리어 하나 부탁드려도 될까요?

곧 습격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가 무색하게도. 강남 지부 인근의 풍경은 평화롭기만 했다.

특히 우리가 앉아있는 카페엔 수상한 냄새는커녕, 평온한 일상의 냄새만이 가득했다.

“이렇게나 평화로운 분위기에 젖어있다, 보니, 저절로 긴장이 풀릴 지경이란 말이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비상사태’를 기다리는 것만큼 지루한 일은 없는 모양인지.

강태백은 그리 달갑지 않은 지루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목을 우두둑 꺾기 시작했다.

“차라리. 지금 당장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좋겠….”

-쿠콰아아아앙!

강태백의 말이 씨가 된 것일까?

갑작스러운 폭발음과 함께, 이곳에 가득했던 일상의 평화가 와장창 부서져 나갔다.

차량이 가득한 도로 한가운데가 폭음과 함께, 별안간 움푹 함몰되며 무너져 내렸다.

매캐한 흙먼지가 하늘 높이 피어올랐다. 사람들의 비명이 폭음 속에 뒤섞였다.

-꽈지지지직!

“…빌어먹을. 말이 씨가 된다더니!”

설상가상으로 그렇게 함몰된 구덩이 정 중앙에서 보랏빛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급변한 상황에, 나와 강태백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욕지기를 내뱉으며 자리를 박찼다.

“자! 자! 당황하지 마시고! 이쪽입니다! 이쪽으로!”

과연 산전수전을 다 겪어본 백전노장다웠다.

욕지기를 내뱉으며 뛰어든 강태백은 능숙한 솜씨로 먼저 패닉에 빠진 사람들을 인솔하며,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기 시작했다.

“아직 게이트가 완전히 열린 건 아닙니다! 진정하시고 침착하게 움직이세요!”

마력이 깃든 그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허공으로 퍼져나가자.

뒤늦게 건곤 길드의 건물에서 붉은 갑옷을 차려입은 헌터들이 허겁지겁 뛰어나오기 시작했다.

내 기억에 의하면, 건곤 길드 산하의 공격대 중 저렇게 새빨간 갑옷을 선호하는 공격대는 ‘월홍’ 공격대가 유일했다.

“가, 감사합니다! 상황은 이제 저희가 맡을 테니…. 협조를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붉은 갑옷을 입은 월홍 공격대원들 사이에서 걸어나온 호리호리한 외모의 남자.

월홍 공격대의 공격대장 김시형은 사람들을 대피시키던 강태백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일반적인 길드 소속의 공격대장답게, 게이트와 강태백을 번갈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약간 견제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아무리 고마워도, 자기들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경고겠지.

“협조라. 아무렴 당연히 협조해줘야지. 이곳은 건곤 길드의 영역이 아니겠나.”

강태백의 말대로 김시형과 월홍 공격대에게서 느껴지는 기도가 범상치 않았다.

얼핏 보기엔 국내 최강의 공격대라는 태백 공격대 그 이상이었다.

“동업자 셨습니까? 죄송합니다만. 본사 방침에 따라. 긴급상황시 사내의 모든 인원들은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대피소에 대피해 계셔야 합니다.”

혼란을 틈타 밖으로 나가려고 한 순간.

앞에서 휘하 공격대원들을 지휘하던 김시형이 내쪽으로 다가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뭐 규정상 그리하여야 합니다만. 그쪽은 ‘평범한’ 방문객이 아니시군요.”

역시 헌터는 헌터를 알아보는 법일까?

내 앞을 막아선 김시형의 암석같은 얼굴에 순간적으로 이채가 감돌았다.

그의 시선이 묘하게 호전적으로 변해가기 시작하자. 피식 웃은 나는 푹 눌러쓴 후드를 벗었다.

“…당신은 태백의 그 얼굴천….”

“예. 설용호입니다. 모종의 일이 있어 잠시 들렀습니다만. 일이 소란스러워진 모양이군요.”

김시형의 입에서 민망한 별명이 튀어나오려고하자.

재빨리 중간에 그의 말을 끊은 나는 그에게 정식으로 인사하며, 악수를 청했다.

“흐음…. 조금 전 찾아온 ‘불편한’ 방문객 분을 수행하고 계셨던 모양이로군요. 이해합니다.”

대충 눈치를 챈 모양인지, 김시형은 빙긋 웃으며 내 손을 맞잡았다.

붙잡은 손에서 호승심에 불타는 헌터 특유의 강인한 악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해해주셨다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나 역시, 순순히 당해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마주잡은 손에 악력을 가하기 시작하자, 김시형의 얼굴에 깃든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하하하. 역시. 태백의 산군으로 군림하는 분답게. 보통이 아니신 모양입니다. 그럼. 사원들의 대피가 끝났다니. 저는 사태를 수습하러 가보겠습니다.”

김시형의 목소리는 호탕하니 호의적이었지만.

그 속엔 자신의 먹잇감을 가로채지 말라는 경고가 숨어 있었다.

《키르르륵!》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들은 마치 늑대와 갑각류를 반쯤 섞어놓은 듯한 생김새였다.

게나 가재의 그것과 같은 빨간 껍질은 어지간한 금속 이상의 강도를 지닌 듯 단단해 보였다.

침을 질질 흘리는 늑대 형태의 입가엔 모든 것을 찢어 발길듯 날카로운 송곳니가 음험하게 빛나고 있었다.

-콰지직! 콰직!

월홍 공격대는 몬스터들의 갑각을 너무도 쉽게 깨부수고 있었다.

특히 공격대장 김시형의 해머가 놈들의 몸을 후려칠 때마다, 도자기 깨지는 소리와 함께 몬스터들의 갑각이 퍽퍽 깨져나갔다. 날카롭게 날이 선 앞다리가 곤죽이 되어 으스러졌다.

“역시, 월홍 공격대인가. 제법 유명했던 그들이라 그런지. 실력이 보통이 아니로군.”

“…이 정도 되는 실력의 공격대가 이런 변방을 맡고 있다니….”

강태백의 감탄사처럼 월홍 공격대의 무력은 지금껏 만나본 공격대와는 감히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수준이었다.

발생과 동시에 과부하된 보랏빛 게이트에서 쏟아져나오는 이형의 몬스터들은 잔뼈가 굵은 나조차도 처음 보는 놈들이었지만,

월홍 공격대원들은 김시형의 지시에 따라, 전혀 동요하지 않고 유기적인 움직임으로 놈들의 맹렬한 공습을 막아내고 있었다.

분명 현재 시점에선, 우리 태백 길드의 태백 공격대가 한국 최강의 공격대라 칭송받고 있었지. 아마?

쟤네들에 비하면 걔들은 그냥 허영심에 가득찬 거품 덩어리에 불과한데?

솔직히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유영화의 장례식장에서 마주쳤던 태백 공격대 또한, 국내 최강이란 이명에 걸맞게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쓴 호랑이와도 같은 흉포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지만, 지금 내 눈앞의 월홍 공격대와 비교하자면, 귀엽게 갸르릉 거리는 아기 고양이에 불과할 정도였다.

“대충…. 첫 공습은 막아낸 것 같군. 각 조장들. 상황 보고해.”

묵직한 해머를 휘둘러 버둥거리는 몬스터의 머리를 박살 낸 김시형은 묵직한 카리스마가 깃든 낮은 목소리로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돌격조! 부상자 무! 사망자 무! 총원 12명! 이상 없습니다!”

“방패조! 부상자 무! 사망자 무! 총원 10명! 이상 없습니다!”

“지원조! 부상자 무! 사망자 무! 총원 8명! 이상 없습니다!”

우렁차게 대답하는 각 조장들이 목소리엔 자신들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팽배해 있었다.

아무런 피해 없이 첫 공격을 막아냈다는 보고를 들은 김시형은 서늘한 눈길로 허공에 입을 쩍 벌린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지원조 박 조장은 길드에 게이트 안정화팀 지원 요청하고, 방패조는 조장의 지시에 따라 이곳에 바리케이트를 구축해. 나머지는 다음 습격에 대비한다.”

김시형의 지시를 받은 팬텀 공격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서늘한 눈길로 게이트를 바라보던 김시형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입꼬리를 슬쩍 비틀었다.

“견학 요청은 처음 받아보는 거라. 남의 눈길이 영 익숙지는 않군요. 태백의 산군님께 괜히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드리진 않았을지 걱정입니다만….”

말투는 겸손했지만. 김시형의 입가엔 호전적인 비웃음이 깃들어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자신이 지닌 무력에 대한 자부심이 듬뿍 묻어나오고 있었다.

어찌나 대단한 자신감이 그의 몸에서 묻어나오던지.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내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그의 발걸음 소리조차 과시하듯 과장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닙니다. 실망스럽기는요. 오히려…. 이 정도면 저희 태백의 태백 공격대원들이 긴장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요? ‘최강’이라는 수식어를 두고 경쟁할 공격대가 나타났으니 말입니다.”

김시형의 도발적인 시선을 받은 나는 부드럽게 빙긋 웃으며, 그를 추켜세워줬다.

내 잘생긴 얼굴에 떠오른 매력적으로 따사로운 웃음에, 김시형과 그의 뒤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수행원들의 얼굴이 동시에 붉게 달아올랐다.

“크, 크흠. 겸손이 조금 과하시군요. 그럼 계속해서 지켜봐 주시길.”

어째선지 오묘한 표정으로 얼굴을 수줍게 붉힌 김시형은 황급히 내 옆을 지나쳐 갔다.

그리고 그는 평소보다 묘하게 더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다른 이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사내놈이 징그럽게 왜 저러는 건지 원.”

“…글쎄요. 처음엔 저를 과하게 의식하나 싶었는데. 저건 꼭…. 으윽.”

순간 머릿속에 이세영의 얼굴이 모락모락 떠오르며,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알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목덜미를 타고 기어오르자, 나는 말끝을 흐리며 침음성을 삼켰다.

“꼭…?”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다 아니까. 짖궂게 떠보지 마십쇼. 것보다…. 이 게이트는 평범해도 너무 평범한데.”

강태백의 표정이 서서히 짖궂게 변해가기 시작하자.

대화의 화두를 다른 곳으로 돌린 나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하늘에 떠 있는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말 돌리기는. 평범한 것이 무슨 문제인가. 아무튼, 자네의 ‘정보’ 대로 일이 벌어지긴 했네만. ‘평범한’ 게이트라 이게 맞는건가 모르겠군.”

“그렇긴 한데…. 어째 이 ‘평범’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요.”

건곤 길드 본사에 나타난 게이트는 딱히 이렇다할 것 없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발생과 동시에 과부하되어 몬스터가 뛰어나오긴 했지만, 강태백의 말처럼 이 시기엔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일이었고.

뛰어나온 몬스터 역시, 처음보는 놈치곤 제법 강력하긴 하나 그리 특별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예감이 좋지 않은거지?

-쿠르르릉!

강태백이 느긋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두드리려던 그 순간!

한차례 몬스터를 토해냈던 게이트에서 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상감지! 이상감지!”

곧이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뒤흔들렸다.

게이트 안정화 작업에 열중하던 공격대원들의 당황에 찬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헐떡거리며 바리케이트를 치던 방패조 공격대원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즉시 달려왔다.

“뭐지? 무슨일이야?”

지진이 조금씩 사그라들자.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김시형이 게이트 안정화를 담당하던 공격대원에게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패, 패턴이 변했습니다. 내부에서 나오는 파장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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