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9화
“기대했던 것보단 싱겁게 끝났는데….”
나는 숨이 끊어진 만누하의 시신을 바라보며,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자신을 ‘군주급’이라 자신 있게 칭한 것과는 달리, 놈은 먼젓번에 만났던 다른 ‘군주급’ 마족들과는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약했다.
[싱겁기는! 차마 옆에서 봐주기 민망할 만큼 얻어 터져놓곤. 그게 무슨 오만한 소리인 게야!]
“에이. 무슨 소리십니까. 처음에 ‘조금’ 당해준 건 놈의 수준을 가늠하기 위해서였죠.”
별것도 아닌 상대의 공격을 허용해줬다는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인지.
내 어깨에 걸터앉은 위철용의 얼굴은 불만을 가득 품고,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런 그에게 가볍게 너스레를 떨어봤지만, 그의 찌푸려진 얼굴은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게 다 무공을 게을리 수련해서 그런 것이 아니더냐! 모름지기 환골탈태의 경지를 이룩한 무인이라면! 그리고 본존의 무학을 모조리 습득한 네놈이라면! 상대의 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그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거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도대체 무슨 일을….》
얼굴을 잔뜩 찌푸린 위철용이 본격적으로 잔소리를 쏟아내려던 찰나.
산산이 조각 난 만누하의 시신에서 희끄무레한 영혼이 쑤욱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 역시 다른 마족들처럼 죽음으로 인해, 정신을 옥죄었던 속박에서 벗어난 모양인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는 만누하의 목소리엔 영문을 모르겠다는 의문만이 가득했다.
“네네. ‘진정한’ 무인의 경지에 관련된 어르신의 고견은 나중에 여쭤보기로 하고. 우선은 이 양반부터 도와주자고요.”
만누하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위철용이 잠시 멈칫한 사이.
나는 자신의 시신과 주변을 연신 번갈아 바라보는 만누하의 영혼에 가까이 다가가, 『원혼 제령술』을 발동시켰다.
-파아아앗!
내 손에서 비롯된 따사로운 황금빛이 만누하의 영혼을 천천히 휘감기 시작하자.
영문모를 의문과 혼란이 가득했던 그의 눈빛이 점점 편안하게 진정되었다.
황금빛 광휘에 휩싸인 만누하의 얼굴에 따스하면서도 편안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군. 머릿속의 흐릿한 안개가 드디어 걷혔어….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안식을 얻을 줄은 몰랐네만…. 정말 고맙네. 정말 고마워.》
따스한 빛 속에서 안식을 찾은 만누하는 온화해진 목소리로 내게 감사를 표했다.
아무래도 그 역시, 다른 마족들처럼 『원혼 제령술』의 효과로 자신을 얽매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자네에게 과중한 짐을 지우게 되어 정말 미안하군. 부디. 내 미력한 권능이 자네의 과업에 도움이 되길 빌겠네.》
만누하의 영혼에서 희끄무레한 ‘업’이 딸려 나오자.
황금빛 광휘에 휩싸인 만누하의 몸이 빛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왜인지 씁쓸하면서도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던 그는, 마지막으로 내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려 주곤 안식의 세계로 떠나갔다.
「축하합니다. 낙오자 『하누만』의 영혼을 해방하셨습니다.」
「『잊혀진 자들의 영웅시』에 새로운 영웅시 『하누만』이 등록됩니다.」
『원혼 제령술』의 효과로 만누하, 아니 하누만이 남긴 ‘업’이 내 몸으로 흡수되자.
익숙한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잊혀진 자들의 영웅시』에 새로운 영웅시가 추가되었다.
그 역시 생전에 범상치 않은 존재였는지. 그의 영웅시가 추가됨과 동시에, 엄청난 양의 기억이 내 머릿속에 범람해왔다.
[과연. 이런 식으로 네놈이 낙오자들의 한과 업을 짊어지는 모양인 게로구나. 아직 필멸의 굴레를 벗지 못한 애송이 네놈이, 그들의 한과 업을 감당할 수 있을지….]
일련의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던 위철용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내가 낙오자들의 한과 업을 짊어진다는 것이, 그는 여전히 못내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감당하든 못하든, 지금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죠. 언제까지 이 빌어먹을 순환을 지속시킬 수는 없잖습니까.”
『잊혀진 자들의 영웅시』 속의 기억들은 내게 많은 것들을 속삭여줬다.
‘인과율’이라는 작자의 심심풀이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의 수렁 속으로 빠져버렸는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저주받은 순환을 끊기 위해, 발버둥을 치다 허무하게 몰락해버렸는지.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인과율의 ‘심심풀이’를 멈추기 위해, 염원해 왔는지 등등.
헌터와 게이트, 성좌와 마족이 뒤엉킨 지금의 상황 또한, 수억 번 반복되어 온 ‘순환’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 저주받은 비극을 또다시 되풀이할 순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위철용에게 결연한 미소로 화답을 해 주었다.
*****
“…그건 그렇고. 상황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은 잡았는데. 이거 뒷수습을 어떻게 해야 할 지는 감조차 잡히지 않는데요?”
시커먼 빛 클랜을 통해, 남부 연합에 내분을 일으킨 장본인은 내 손에 목숨을 잃었지만.
하누만이 워낙 오래전부터 남부 연합의 어둠 속에서 암약해왔기 때문에, 현재 상황을 수습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놈이 ‘수집품’으로 거뒀다는 이들부터 구하는 편이 어떻겠느냐?]
“수집품이라…. 그러고 보니. 유독 고위 마족 놈들은 ‘수집품’에 집착하곤 하네요. 놈들 사이에 필멸자를 가둬서 지켜보는 동호회라도 있는 건가.”
주변을 수색한 끝에, 찾던 것을 찾아낸 나는 구석에 처박힌 유리병을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워낙 요란하게 싸운 덕에 혹시나 손상되지 않았을까 싶어, 집어 든 유리병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지만.
하누만의 마력이 깃들어 있어선지, 유리병은 약간의 흠집이 난 것만 빼면 멀쩡해 보였다.
실험실의 표본 같은 꼴이 되어 꿈틀거리는 양소혜과 남부 연합원들 또한, 별다른 상해를 입은 것 같진 않아 보였다.
다행이네 이 정도라면 마하가라의 권능으로 다시 되돌릴 수 있겠어.
다행스럽게도 이들을 어떻게 원래대로 돌릴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먼젓번처럼 시간을 다루는 마하가라의 권능을 사용해, 그들을 ‘권능에 당하기 전’으로 되돌려 주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다짐한 내가 마하가라의 권능을 막 일으키려던 찰나.
-쿠콰콰쾅!
“형님! 제가 왔어요! 용호 형님 곁에서 물러서! 이 못생긴 거북이 놈아!”
별안간 폭음과 함께, 부서진 파편들로 막혀있었던 철문이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그로 인해 발생한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평소보다 유난히 비장한 목소리의 양소룡가 괴이한 안광을 불태우며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라? 그 못생긴 거북이는….”
흉흉한 안광을 뿜어내며, 혀를 날름거리던 양소룡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의문이 서렸다.
폐허로 변해버린 계단을 이리저리 살피는 그의 고개가 갸웃거리듯 살짝 기울어졌다.
선명한 녹색 안광이 번쩍이는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하누만의 행방을 찾았다.
“빨리도 왔다. 그 마족 놈은 당연히 네 형님 되시는 분께서 이미 해치워 버린 지 오래지!”
“네에? 위쪽에 던져두고…. 아, 아니 모셔두고 바로 뛰어온 건데. 벌써요?!”
하누만을 쓰러뜨렸다는 말에 양소룡의 눈에서 안광이 사라지며,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졌다.
거의 어지간한 탱탱볼만큼 커진 그의 눈동자엔 경악과 아쉬운 감정이 혼재되어 있었다.
“진짜 진짜 강한 놈이라는데. 역시 형님이세요! 그렇게 강한 놈을 이렇게나 빨리 쓰러뜨리시다니! …이번엔 정말 도와드리고 싶었는데.”
사무실 전체가 무너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우렁찬 양소룡의 호들갑이 갑자기 뚝 멈췄다.
이번에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리도 미안한지, 그의 표정이 어미 앞에서 사냥에 실패한 새끼 너구리처럼 급속도로 시무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아냐. 적절한 타이밍에 부상자를 데리고 빠져줘서. 내가 전투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어. 충분한 도움이 됐다. 소룡아.”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저도 사내로서 명예로운 전투에 참여하고 싶었는데.”
양소룡의 우람한 어깨가 평소답지 않게 축 처지자.
나는 손을 위쪽으로 쭉 뻗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내 격려를 받은 양소룡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힘없이 웃더니, 이내 눈에서 다시금 형형한 안광을 뿜어내기 시작했다.주인의 결의에 감응한 그의 근육이 활기를 되찾고 흉악하게 꿈틀거렸다.
“맹세의 포즈! 사이드 체스트! 흐아아압!”
양소룡는 맹세의 포즈랍시고 팔을 힘껏 조여, 자신의 근육을 과시하듯 드러냈다.
그의 두 눈에서 이글거리는 횃불 같은 녹색 안광을 마주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혜옥이랑 어울리더니. 정말 놀라울 정도로 닮아가고 있어.
이래서 어린애들은 친구를 잘 사귀는 게 중요하다는 건가?
김혜옥이라도 된 듯, 자신의 다짐을 보디빌딩 형태로 나타내는 양소룡에게서 시선을 뗀 뒤.
나는 집어 들었던 유리병을 열어, 태아 형태로 돌아간 양소혜와 남부 연합원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형님? 그 징그러운 것들은 뭐예요?”
“징그럽다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네 누님에게 못하는 말이 없어.”
“…예? 이게. 아, 아니 누, 누님이 이렇게 되셨다구요?”
태아와 유사한 형태로 꿈틀거리는 괴생명체들의 정체를 들은 양소룡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결의를 되찾고 이글거리던 안광이 다시 그의 눈에서 사라졌다.
어린 송아지와도 같은 순박함을 간직한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다른 분들이 모두 당해버렸다곤 했는데. 설마 이, 이렇게…. 어, 어쩌죠?! 이, 이걸 어떻게든 치료해야….”
패닉에 빠진 양소룡은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하기 시작했다.
점점 정신이 사나워지는 것을 느낀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를 달래 주었다.
“안심해. 내가 해결할테니까. 비슷하게 당한 사람들을 치료해본 적이 있어서 말이지.”
“혀, 형님이요?”
「잊혀진 자들의 영웅시의 효과에 따라, 영웅시 『마하가라』이 잊혀진 영웅의 힘과 권능을 노래합니다.」
「사용자님이 보유한 마력에 따라, 영웅시 『마하가라』의 효과는 『24시간』 동안 지속됩니다.」
히죽 웃으며 양소룡의 앞을 가로막은 나는 즉시, 마하가라의 영웅시를 발동시켰다.
영웅시가 발동되자, 무의식의 저편에서부터 솟아오른 주황색 마력이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투둑! 투두둑!
모든 것을 주황빛으로 물들인 빛의 향연 속에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외골격 뒤편에서 빛을 내뿜는 둥그스름한 고리가 돋아났다.
동시에 금빛 외골격이 주황빛으로 물들며, 어깨죽지에서 거대한 빛의 날개가 자라났다.
그렇게 시간을 조율하는 신, 마하가라의 권능을 두른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남부 연합원들을 향해 손을 뻗으며 시간의 권능을 끌어올렸다.
-키이이이잉!
시간의 권능이 담긴 주황색 마력이 내 몸을 타고 흐르자.
주황빛 마력에 휘감긴 남부 연합원들의 육신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등 뒤에 떠오른 빛의 고리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맹렬히 회전했다.
활짝 펼쳐진 날개가 천천히 펄럭이며, 왜곡된 시간을 바로잡기 시작했다.
-파아아앗!
빼앗겼던 시간을 되찾은 이들의 육신이 순식간에 쑥쑥 자라나,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눈이 멀어버릴 듯, 찬란한 빛 속에서 남자들의 벌거벗은 육신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참으로 성스러우면서도 더럽기 짝이 없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