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 잘생겼다!-247화 (247/309)

제247화

“…시커먼 빛 클랜 놈들이 남부 연합에 상당히 오래전부터 미리 침투해 있었나 본데요?”

추하게 발버둥 치다, 허무하게 사망한 박철심의 시신에 『원혼 제령술』을 사용하자.

이 풍진 세상에 미련이 그리도 많은 모양인지. 엄청난 양의 한 맺힌 기억이, 내게 흡수되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낯선 기억들을 훑어본 나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 그렇겠지. 아무리 정신조작에 능한 놈들이라고 한들, 남부 연합 전원의 정신을 조작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 당연히 오래전부터 준비해왔지 않았겠느냐?]

“이놈 기억을 살펴보니. 그 정도가 아니라서요.”

[그 정도가 아니라고?]

머릿속을 가득 채운 박철심의 기억에 의하면.

시커먼 빛 클랜은 놀랍게도 남부 연합이 창설된 시기부터 수뇌부에 침투해 있었던 상태였다.

지금 내 눈앞에 죽어 나자빠진 박철심만 해도, 양석필의 측근까진 아니었지만.

남부 연합의 전체적인 보급을 감독할 만큼 높은 자리에 있었던 자였다.

“…고위직 임원들 다수, 심지어 양석필의 여섯 의형제 중 세 명까지 시커먼 빛 클랜 소속의 고위 사교도였다니.”

여기가 남부 연합인지, 아니면 시커먼 빛 클랜의 본단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박철심 외에도 시커먼 빛 클랜의 수많은 사교도가 남부 연합의 고위직을 꿰차고 있었으며.

양석필이 가장 신뢰하고 아꼈던 여섯 명의 의형제 중 세 명도, 그를 기만하기 위해. 남부 연합에 침투한 사교도였다.

잠깐만. 남부 연합의 고위직 대부분이 시커먼 빛 클랜에게 잠식된 상황이라면.

지금 밖에서 들리는 비명은 도대체….

“…빌어먹을!”

그제야 뒤늦게 상황을 눈치챈, 나는 즉시 어둠달을 움켜쥐곤 튕기듯 밖으로 뛰쳐나갔다.

[갑자기 무슨 호들갑인 게냐?]

“그동안 너무 안일하게, 아니. 상황을 정반대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밖에서 들렸던 비명은 사교도 놈들의 것이 아니었어요.”

위철용에게 간단히 설명해주며, 황급히 관리실 밖으로 빠져나오자.

광기와 폭력이 넘실거리는 살육의 현장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어느새 무리를 지은 시커먼 빛 클랜의 사교도들이 세뇌에서 벗어난 남부 연합원들을 일방적으로 사냥하고 있었다.

-으아아악! 대, 대장님? 어, 어째서….

-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어, 어떻게 된 거지!

믿었던 동료, 상관 등이 갑자기 무기를 휘둘러 대는 것에 당황하기도 했거니와.

주둔지 전체에 깔린 『평화역장』의 영향으로 인해. 놈들에게 학살당하는 남부 연합원들은 제대로 된 반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까득!

눈 앞에 펼쳐진 일방적인 살육의 현장에 까득 이를 깨문 나는, 즉시 사교도 놈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저벅. 저벅!

그런 전투의 광기 속에서, 갑자기 유난히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물기를 머금은 단단한 전투화 굽이 계단을 규칙적으로 밟고 내려오는 소리, 갑옷을 착용한 헌터 특유의 육중한 발소리였다.

“…!”

발소리의 주인공은 역시나, 검은 갑옷을 걸친 헌터였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이곳에 들어선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랐다.

“사, 사람이다…. 살아있는 사람이야!”

넋 나간 듯 맥빠진 목소리로 멍하니 중얼거리는 헌터의 눈가에 영문모를 물기가 어렸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엔 환희인지 무엇인지 도통 짐작할 수 없는, 울음 섞인 미소가 맺혔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의 그는 생존자를 발견한 사실 자체에 기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 대장! 대자앙! 여기, 여기 생활관 쪽에 생존자가 남아 있습니다! 생존자라고요!”

후다닥 밖으로 다시 뛰어나간 헌터는 목청이 터져라. 큰 목소리로 외쳤다.

희열로 덜덜 떨리는 목소리엔 숨길 수 없는 죄책감이 은연중에 숨어있었다.

“흐흑, 흐흐흑. 감사합니다. 성좌들이시여. 정말 감사합니다.”

-털썩.

계단에 소리를 지르고 돌아온 헌터의 다리가 풀렸다.

그렇게 그는 허물어지듯 바닥에 주저앉곤 얼굴을 감싸 쥔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도대체 저놈은 왜 저렇게 괴이쩍은 반응을 보이는 게냐? 생존자?]

허우대 멀쩡한 사내놈이 갑작스레 흐느끼는 모습이 언짢아서일까?

그를 바라보는 위철용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아마도 그건…. 자신이 무고한 이들을 죽였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겠죠.’

그렇게 답변한 나는 주저앉은 채로 흐느끼고 있는 헌터의 복장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의 행적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헌터의 검은 갑옷은 완전히 피로 흠뻑 젖어있었다.

들썩이는 갑옷의 등판에 새겨진 산양 문양으로 미뤄보건대, 그는 남부 연합 소속이었다.

대충 그의 말로 추론해보면, 아마도 눈앞의 남부 연합원은 이성을 잃은 자신이 무고한 생명을 해쳤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들로선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의 손에 피가 흥건한 상태였을 테니까요.’

뭐…. 전후 사정을 자세히 모르고서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나 박창현 그 양반 휘하의 순진하기 짝이 없는 공격대원들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흥. 칼밥 먹고 사는 놈이 나약하기는. 쯧!]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의 위철용은 콧방귀를 뀌며 거하게 혀를 찼다.

물론, 말로는 그렇게 책망해도 남부 연합원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안타까움이 슬쩍 내비치고 있었다.

…정말이지 솔직하지 못한 양반이라니까.

이상한 곳으로 새침데기 기질을 발휘하는 위철용의 솔직하지 못한 모습에 괜히 쓴웃음이 지어졌다.

“저기….”

남부 연합원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그에게 다가가려던 순간….

-쿠와아앙!

잠금 상태인 엘리베이터에서 폭음이 터졌다.

보통 육중한 충격이 가해진 게 아닌 듯, 단단하게 닫힌 엘리베이터 문이 우르릉 흔들렸다.

연막탄이라도 터진 양, 엘리베이터의 문틈 사이로 먼지가 마치 연기처럼 비어져 나왔다.

-꽈드드득!

엘리베이터 문틈 사이로 큼직한 손가락이 쑤욱 튀어나왔다.

그리곤 닫힌 철문을 무시무시한 힘으로 열어젖히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마치 골판지로 만든 상자처럼 간단히 우그러졌다.

그렇게 열린 문 사이로 거인이 몸을 일으켰다.

“…생존자라고 했나?”

어지간한 성인 남성보다 머리 두 개는 큰,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장대한 체구.

부리부리한 눈, 사내답게 굵게 뻗은 눈썹, 고집스러움을 가득 담은 입매.

남부 연합의 공격대장, 산군 ‘철옹성’ 박창현이었다.

어찌나 급했는지, 그는 계단을 놔두고 그대로 엘리베이터 위로 뛰어내려 이곳에 등장했다.

‘생존자’라는 단어를 주억거리는 박창현 역시, 흥분으로 붉게 물들었으면서도 동시에 죄책감으로 딱딱하게 굳어있는 표정이었다.

“정말이군. 생존자야. 다행히 살아남은 이가 있었어…. 저희를 굽어살피시는 성좌들이시여 정말 감사합니다. ”

나와 시선을 마주한 박창현이 맥이 탁 풀린 목소리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평소에 잘 찾지도 않는 성좌에게 감사 인사를 올릴 만큼, 그 역시 마음고생이 심한 것 같았다.

“자네가 누군지는 잘 모르겠네만. 고맙네. 살아있어 줘서 정말 고마워.”

“살아있어 줘서 다행이라니, 영문을 모를 말씀이시군요. 박창현 선배님.”

박창현의 갑작스러운 감사 인사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곤 몸을 일으켜 당당하게 그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헌터…? 갑옷의 생김새로 보아하니, 우리 태백 소속이로군. 우리 설악에 새로운 인원이 충원된다는 말은 듣지 못했네만. 자네는 누군가? 어떻게 들어온 거지?”

그제야 내 복장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는지, 박창현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원리원칙을 심히 따지는 그의 성격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내 복장을 확인한 그의 말투엔 책망하듯 깐깐하게 날이 서 있었다.

“설용호입니다. 선배님 사교도를 추적하는 중이었죠.”

“설용호…? 허어. 안종훈을 거꾸러뜨린 젊은 산군이 자네였는가? 하긴. 자네처럼 잘생긴 헌터가 또 있을 리가 없지. 미처 알아보지 못해 미안하군.”

내 이름을 들은 박창현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굳이 신분까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는 내 이름만 듣고도 바로 내가 새로운 산군임을 인지하였다.

고지식한 성격답게 박창현은 즉시, 나를 미리 알아보지 못했노라 고개를 꾸벅 숙여 사과했다.

“그나저나, 사교도라니? 역시, 이곳에 그 간악한 종자들이 숨어들어 있었다는 건가?”

다시 고개를 든 박창현의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씹어뱉듯 사교도에 관해 물어보는 그의 목소리는 짐승의 그르렁거림 같았다.

성난 불곰처럼 광폭한 살기가 곰처럼 거대한 그의 몸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역시라니, 뭔가 짐작 가는 일이라도 있으셨나 보군요.”

‘짐작 가는 일’이라는 말에 박창현의 얼굴이 다시 한번 침중해졌다.

활화산처럼 들끓었던 분노가 씻은 듯 사라졌다. 음울한 죄책감이 그의 얼굴에 퍼져나갔다.

“…내가, 우리 식구들이…. 무고한 이들을 살해했다네.”

힘이 없어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로 박창현은 내게 고해하듯 자신이 저지른 일을 털어놓았다.

짙은 죄책감에 쩔어있는 그의 목소리엔 회한의 감정이 듬뿍 묻어나오고 있었다.

회식하던 도중 의식을 잃었더니 퀴퀴한 지하실에서 정신을 차린 것부터 시작해서, 이틀 동안 지하실에 갖혀 있다가 별안간 광기에 사로잡혀 게이트 관리소의 직원을 모조리 살해했다는 것까지.

그동안 겪었던 일들을 숨김없이 털어놓는 박창현의 목소리엔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과 원흉에 대한 증오가 공존하고 있었다.

회개소 안의 신부에게 고해하듯 모든 것을 털어놓은 그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평생을 고집스러울 정도로 선량하게 살아온 남자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런 일 있으셨군요. 헌데…. 선배님께선 과연 그들이 ‘무고한’ 이들이라 확신하실 수 있으십니까?”

“뭐…?”

박창현은 나의 말에 고개를 힐끗 들었다.

의아한 듯 묻는 그의 목소리는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실낱같은 희망을 갈구하고 있었다.

“제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이곳은 이미 사교도의 손에 완전히 넘어간 뒤였습니다.”

“그, 그럴 리가. 이곳의 직원들은 모두 나와 친분이….”

“그렇겠죠. 그렇게 친분을 쌓고 방심한 틈을 타, 잠입하는 것이 놈들의 수법이니까요. 혹시…. 이 남자를 아십니까?”

아연한 표정의 박창현 앞에 기절한 박철심을 질질 끌어다 놓았다.

박철심의 처참한 몰골에 잠시 얼굴을 찌푸린 박창현의 눈이 이내, 왕방울만 하게 변했다.

“보급을 담당하는 박철심이 아닌가! 한 달 전 인사이동 때부터 성실히 일하던 친구였거늘….”

박철심의 얼굴을 알아본 박창현이 한숨 쉬듯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박철심이란 인물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 덕분에 대충 사건의 전모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달 전이라….

이서초 게이트 사건의 여파로 발생한 인사이동이 공교롭게도 시커먼 빛 클랜 놈들에게 힘을 실어준 것 같았다.

역시, 역사가 변해버린 이유는 역시 내가 체체파리 클랜과 엮였기 때문일까?

“이 자가 바로,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의 원흉입니다.”

고개를 흔들어 의문을 털어낸 나는 기절한 박철심을 번쩍 들어 박창현의 눈앞에 가까이 들이대었다.

“뭐라고?”

다시 한번 찢어져라. 눈을 크게 치켜뜬 박창현에게 나는 내가 추론한 사건의 전모에 대해 상세히 말해줬다.

“평화역장이라니…. 확실히 갇혀 있는 동안 기이한 기분이긴 했네만. 그렇게 무서운 것이 있었다니….”

남부 연합가 허망하게 당해버린 평화역장에 관련된 이야기 역시 빠뜨리지 않았다.

박창현의 위치가 위치인 데다. 그가 직접 평화역장의 무서운 위력을 겪었으니만큼. 그에게 약간의 정보를 알려주는 것도 일종의 투자였다.

워낙 고지식한 박창현이기에, 평화역장에 관해 알려줌으로써 그에게 마음의 빚을 지우기도 좋고, 훗날 내가 평화역장의 위험에 대해 역설할 때, 그를 증인으로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겠지.

“그러니, 선배님께선 잘못한게 없으십니다. 이미 이곳은 간악한 사교도 놈들의 손아귀에 떨어진 뒤였거든요.”

침중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박창현에게 나는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넸다.

사실은 다른 이유라기 보단, 나는 우선 박창현의 죄책감을 풀어주고 싶었다.

회귀 전 역사에선 사교도들의 수작질에 당해 허망하게 몬스터로 변해버리긴 했지만, 그는 태백에서 유일한 양심 소리를 들었을 만큼 선량한 인물이었다.

언제나 자신의 사리사욕보다는 타인의 안위를 걱정한 인물이 바로 박창현이었고, 그를 따르는 남부 연합원들도 그와 비슷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나 역시 그에게 진 빚이 적지 않았으니까.

“그렇군…. 그런 것이었어. 맹주님께서 신종 게이트의 위험성에 대한 자료를 보내주긴 했네만, 사교도 놈들이 그것을 이용해 우리를 몬스터로 바꾸려 들었을 줄은 몰랐군.”

박창현은 소름이 다 끼친다는 듯한 표정으로 혼잣말하듯 멍하니 중얼거렸다.

표정은 침중했지만, 그의 목소리에선 점차 괴로운 죄책감이 가시고 있었다.

무고한 이를 살해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에서 그는 조금씩 벗어나는 듯 했다.

“그렇다면, 다른 식구들에게도 전해줘야겠군. 그들 역시 마음 고생이 만만치 않을테니 말일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