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2화
-할짝.
별안간 무언가 따뜻하고 축축한 것이 내 볼을 부드럽게 간질였다.
동시에, 어린 짐승 특유의 달착지근하면서도 보드라운 냄새가 코끝을 어지럽게 자극해왔다.
귓가에 뜨뜻한 바람이 느껴진다. 싶더니, 이내 헥헥거리며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요란하게 귓가를 두드렸다.
“으으윽….”
예고없이 찾아온 따스하고 보드라운 자극 덕분인지.
그동안 쿨쿨 잠들어 있었던 전신의 감각들이 하나둘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바짝 마른 입에선 메마른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굳어있던 몸에서 뻐근한 고통이 느껴졌다.
혹은 머릿속에 안개가 끼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것이 몽롱하게 느껴졌다.
-킁킁! 킁!
신음을 흘려대며 기지개를 펴려던 그 순간.
요란스레 킁킁거리는 소리와 함께. 차갑고 축축한 무언가가 내 볼을 덮쳐왔다.
갑자기 습격해온 서늘하고 축축한 괴물체에, 가물거리던 눈꺼풀이 한순간에 번쩍 뜨였다.
-헥헥?
“…뭔가 했네. 나를 깨워준 게 너였구나?”
어두웠던 시야가 밝게 물듬과 동시에, 내 눈에 가장 먼저 비친 것은.
강아지 한 마리가 앙증맞은 네 발로 대지를 당당하게 딛고 서 있는 깜찍한 모습이었다.
털이 복슬복슬하여, 전반적으로 동글동글한 생김새의 강아지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귀를 쫑긋 세운 채, 자그마한 분홍빛 혀를 내밀고 있었다.
살아있는 곰 인형과도 같은. 범상치 않은 귀여움에 피식 실없는 웃음을 흘린 뒤.
나는 본격적으로 꼬리를 흔들기 시작하는 녀석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나저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분명….”
그렇게 한참동안 강아지의 부드러운 털을 욕심껏 쓰다듬고 있으려니.
마치 잠에서 덜 깬 것처럼, 몽롱하기만 하던 정신이 조금씩 조금씩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어느정도 정신을 수습한 나는 상황파악을 위해. 머릿속을 뒤적여, 의식을 잃기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맞아. 한중식에게 건네받았던 그 신물이란 놈을 흡수했었지. 그게 내 몸에 파고들어선.”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신물이 거침없이 파고들었던 손가락에서 희미한 고통이 느껴졌다.
어지간한 볼펜 굵기의 길쭉한 바늘이 선사해주었던, 잊지못할 추억이 머릿속을 스치자.
괜시리 등허리가 시큰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좁쌀 같은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끄응…. 고통이야 그렇다 쳐도.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이미 바알제불의 신물을 흡수한 경험이 있었기에.
생살과 뼈를 꿰뚫고 신경계를 죄다 꼬아버리는 고통 정도는 어느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다짜고짜 그녀가 ‘안배해둔’ 공간으로 끌려오는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솔직히 먼젓번에 바알제불이 그랬던 것처럼, 나중에 그녀의 타락한 ‘껍데기’를 처치했을 때나.
이런 식의 만남이 성사될 줄 알았는데 말이지
“뭐, 어찌되었든 이미 저질러진 일이니까. 괜히 이런데서 궁상 떠는 것보다야. 직접 부딪혀보는게 훨씬 낫지.”
-끄으응?
“자자. 착하지? 잠시만, 잠깐만 비켜줄래?”
생각을 정리한 나는 정신없이 꼬리를 흔들며, 내 손을 핥아대는 강아지에게 양해를 구한 뒤.
계속 내게 들러 붙으려는 털뭉치를 옆으로 밀어내며, 조심스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것보다. 사교도의 성좌가 만들어낸 공간에 왜 강아지 따위가 돌아다니는지 모르겠네.
딱히 비범하거나 사악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진 않아보이는데. 그냥 재미삼아 풀어놓은 걸까?
순간적으로 내 신발을 탐닉하는 강아지의 정체에 대한 의문이 들었지만.
녀석에게선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악하기 짝이없는 사교도의 성좌치곤 귀여운 취미를 가졌다는 실없는 생각이 들자.
나는 휘휘 머리를 가로저어, 머릿속에 차오르는 잡념들을 털어냈다.
“하긴. 강아지가 무슨 상관이겠어. 우선 어디서 그녀를 만나야…. 으엉?”
탁 트인 곳까지 걸어나가 주변의 풍경을 확인하려던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괴이쩍은 장면에 나는 그만 헛바람을 집어삼키고야 말았다.
-사르륵. 사르르륵
어쩐지 아까부터 뭔가 길쭉한 풀떼기들만 보인다 싶더니.
이곳은 광활한 갈대밭이 끝없이 펼쳐진 구조로 꾸며진 공간이었다.
잔잔하게 흔들리는 갈대의 향연은 황금빛 물결을 자아내고 있었고.
흔들리는 황금빛 물결 위에서 새하얀 갈대꽃들이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풀줄기들보다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왈! 왈왈!
-아우우. 아우우우….
어째선지 갈대밭을 배경으로 의문의 개판이 펼쳐져 있다는 것이었다.
잔잔하게 흔들리는 황금빛 물결과 은은하게 흩날리는 새하얀 꽃잎을 배경삼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숫자의 강아지들이 무리지어 뛰놀고 있었다.
껑충하게 큰 갈대들이 흔들릴 때마다, 강아지들의 복슬복슬한 털이 언뜻언뜻 내비쳤다.
바람에 흔들린 갈대가 바스락 소리를 낼 때마다. 강아지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끄으응?
갈대밭을 누비며, 활달하게 뛰어노는 강아지들의 천진만한 모습과
내 바짓단에 매달려,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강아지의 해맑은 모습에.
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내게 뭔가 중요한 것을 전해주기 위해, 임시적으로 만들어낸 공간 아니었어?”
그동안 초월적인 존재들이 만들어낸 아공간을 몇 번이나 방문해봤지만.
지금처럼 쓸데없는데(?) 공을 들인 케이스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강아지라는 생명체에 병적인 집착을 보이는 성좌인가?
설마. 마지막 순간까지 귀여운 강아지들에게 둘러 싸인 채로 소멸할 생각인가?
눈앞에 펼쳐진 정체를 알 수 없는 개들의 향연에 혼란을 겪고 있으려니.
누군가가 바짓단을 강하게 잡아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내려 아래를 바라보니, 계속해서 내 옆을 지키고 있었던 강아지가 묘한 신호를 보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따라오라고?”
-왕!
*****
유난히 신이 난 강아지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곳은 반쯤 폐허 상태인 신전 앞이었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흉가까지 나를 안내한 강아지는 임무를 완수했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똘망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녀석의 작고 둥글둥글한 얼굴에 떠오른 표정과 마주하자. 어째서인지 마치 어디선가 똑같은 표정을 본 것 같은 강렬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묘하게 어디선가 본 것 같은 표정이란 말이지.
-왕! 왕왕!
작별 인사라도 하듯, 녀석은 나를 똑바로 바라본 채로 기운차게 짖었다.
그리곤 미처 답해준 새도 없이, 무성하게 우거진 갈대숲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매정하긴. 작별 인사로 턱이라도 몇 번 긁어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실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신전의 문 앞에 다가간 나는, 흉물스럽게 녹슬어 있는 문을 힘주어 열었다.
『그렇군요. 그런 일이 있었다니…. 당신도 그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런 선택을….』
“허. 요 꼬맹이 놈이 감히 은근슬쩍 본존을 ‘당신’이라 불러? 울면서 언니들이나 찾아대던 철부지가 제법 건방지게 변했구나.”
낡은 신전에 들어서자, 안쪽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인의 목소리는 영 익숙지 않았지만. 남자 쪽의 목소리는 어째 굉장히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뭐지? 설마….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에 기함한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목소리의 진원지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기묘하게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후후후. 부끄러우실 때마다. 괜히 성난 척,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시는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시네요.』
“크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크흐흠.”
…어르신이 왜 여기서 나오시는데요?
놀랍게도 여인과 대화를 나누던 이의 정체는 정말로, 위철용이었다.
그답지 않게 경박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는 굉장히 들뜬 모습이었다.
“본존이 꼬맹이 너와 엮여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오랜만에 추억에 잠기는 것도 좋겠지만…. 여기까지 할게요. 손님이 오셨거든요.』
“…어르신?”
“어떤 사특한 낙오자 놈의 수작질인가 싶어. 개입했더니. …반가운 이와 만났지 뭐냐.”
“원칙대로라면 맞다. 나는 애송이 네놈을 회귀시키며 존재 자체가 사라진 몸이니까.”
『하지만 저랑 어르신. 모두 ‘성좌’의 자리에서 영락해버린 상태니까요.』
“…크흠.”
『본의 아니게 비밀을 듣긴 했지만. 상관은 없을거에요. 저는 곧 소멸할 테니까.』
심기가 불편해진 모양인지. 위철용은 연신 특유의 어색한 헛기침을 해댔다.
『어르신. 덕분에 잠시나마 저는 파편에 불과하답니다.』
“껍데기만 남은 제 육신엔 ‘신물’이 들어있어요.”
그렇겠지. 아무래도
“….”
“…꼬맹이 너.”
『항상 가르쳐 주셨잖아요? 일을 저지를 거면.』
『제 육신은 오염된 신력으로 가득찬 폭탄이나 마찬가지가 되겠죠. 것들.』
마족들은 아트로포스의 정기를 빨아먹으며, 사탕을 받아먹는 것마냥 기뻐했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놈들이 받은 것은 시퍼런 살기가 줄줄 흐르는 독약 덩어리였다.
…실로 엄청난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자신의 육신을
…부서진 물레의 ‘노파’라며?
“그러니까. 당신이 부서진 물레의 노파인가…요?”
어째선지 위철용이 도끼눈을 시퍼렇게 뜬 채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장이라도 허튼 소리를 했다간. 이족보행을 포기시켜 주겠다는 광기가 느껴졌다.
『반갑습니다. 낙오자들의 왕이시여. 저는 아트로포스. 닉스의 자식이자. 운명을 관장하는 세 자매. 모이라이의 막내입니다.』
“괜찮다. 내 모습을 보고 느낀게 없느냐?”
“심상세계.”
“그래. 이곳은 네 심상세계의 일부를 빌린 것이니라.”
『원래는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누구 작품인지 알겠군.
위철용의 소행이었다.
“바알제불 그 냄새나는 파리 자식은 원래부터 쳐죽일 놈이었고.”
근데 이렇게까지 살가운 사이였나?
『당신의 동의없이 그를 끌어들인 것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시간의 강을 거슬러 온 존재라니.』
아트로포스는 처연하게 웃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게냐. 꼬맹아.”
처연하게 웃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라도 좋다. 속 시원히 털어놔 봐.”
『이거 봐. 하신다니까.』
희미하게 웃는 그녀의 몸이 희미해졌다.
심상세계 속에 덧씌워졌던 그녀의 영역이 조금씩 무너져갔다.
황금색 물결을 자아내던 갈대들이 시들어갔다.
새하얀 갈대꽃잎이 봄날의 벛꽃처럼 덧없이 흩날렸다.
-컹! 컹! 컹!
자유롭게 뛰놀던 강아지들. 아니, 신도들의 사념이 광장으로 모였다.
『언니들이 낙오자로 영락했을 때부터. 오랫동안 바래왔던 일이랍니다.』
“선물이라뇨?”
“선물이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
아트로포스의 입에서 알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오자.
나와 위철용은 동시에 의문을 표했지만.
아트로포스는 우리의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때가 대면 자연히 아시게 될겁니다. 그럼.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