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0화
“우리 용호 씨가. 댁 같은 족속들. 그러니까, 사교도들의 희망이라고요? 이건 또 무슨 참신한 X 소리죠?”
어이가 없다는 듯 잔뜩 눈살을 찌푸린 이세영의 입에선 영 곱지 못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빙그르르 회전하는 단검이 주인의 불편한 심기를 잔뜩 반영하여, 섬찟한 빛을 흩뿌렸다.
가늘게 뜬 눈에선 당장이라도 불경한 소리를 지껄인 한중식의 멱을 따버리겠다는 욕구가 흘러나왔다.
“일단. 뭐라 지껄이는지 들어나 보죠. 적어도 살려달라 목숨을 구걸하는 것 같진 않으니.”
갑자기 튀어나온 뚱딴지같은 소리에, 어이가 사라진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연신 피를 토하면서도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한중식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기에.
흉흉한 살기를 뿜어내는 이세영을 진정시킨 나는 쓰러진 한중식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모든 것은 네가 섬기는 성좌 나으리의 뜻대로였다고?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마족들을 추앙하며, 덤벼들었던 주제에 갑자기 무슨 헛소리지?”
“가, 가장 낮고 어두우신 분. 운명의 물레를 굽어살피시는 그분께서 저희에게 비밀리에 속삭이셨습니다. 지, 진정한 미래를 위해선 가, 간악한 낙오자들을 속여야 한다고….”
…부서진 물레의 노파의 뜻에 따라, 마족들을 속여야 했다고?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동안 거짓된 성좌를 섬겼느니, 새로운 주인님의 명령이 어쩌니 소리쳐 놓고서는.
한중식의 입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온 기이한 소리에 피식 웃으며, 어둠달을 휘두르려 했지만.
단순히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치부하기엔 그의 표정과 눈빛이 너무도 진중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한중식의 진중한 얼굴에선 조금 전까지 보여주던 탐욕스러우면서도 천박했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진실.』
게다가 한중식의 태도가 변했을 때부터, 화안금정의 권능에 의해 그의 머리 위에 떠 오른 글자는 계속해서 『진실』만을 나타내고 있었다.
한중식의 진중한 표정과 너무도 찬란하게 빛나는 『진실』이란 두 글자에, 나는 그에게 겨누었떤 어둠달의 창날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을 홀리던 ‘전직’ 사교도답게, 혀 놀리는 것이 상당히 요망하네요. 힘드시면 제가 대신 처리해드릴까요?”
그렇게 내가 말없이 치켜들었던 창날을 거두자.
계속해서 한중식을 노려보던 이세영이 섬뜩한 살기를 흩뿌리며 앞으로 나섰다.
단숨에 그의 목숨을 결딴낼 생각인지, 허공을 가르는 두 자루의 단검엔 시퍼런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서늘하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용호 씨?”
“들어볼 가치는 있을 것 같아서요. 강수희가 일러주었던 ‘계시’가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요.”
“…그러고 보니. 그 ‘전직’ 교주가 계시랍시고 비슷한 말을 했다고 하신 것 같긴 하네요”
이세영을 막아 세운 뒤, 그녀에게 강수희의 ‘계시’를 언급하자.
광기와 살기가 교대로 번들거리던 그녀의 눈빛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정보를 다루는 데 능숙한 그녀답게, 이성이 살기를 단숨에 억누른 듯한 모양새였다.
“그럼.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보죠. …들었지? 그 잘난 성좌가 뭘 꾸민 건지 지껄여봐.”
차가운 목소리로 한중식에게 쏘아붙인 이세영은 품속에서 녹음기를 꺼내 스위치를 눌렀다.
한중식의 숨소리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듯. 녹음기를 든 채로 그를 바라보는 이세영의 눈빛은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었다.
”모, 모든 것은 당신과 접촉하기 위한 그분의 안배였습니다. 그분을 배신한 척, 낙오자 놈들에게 거짓 충성을 맹세한 것도…. 놈들의 충실한 수족이 되어. 당신을 습격한 것도 모두….“
“…오로지 나와 접촉하기 위해. 마족 놈들에게 붙은 척. 일을 꾸민 것이었다? 수하들까지 모조리 희생시키면서?”
한중식의 충격적인 발언에 그의 말을 기록하던 이세영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어졌다.
거기에 더하여, 불신을 가득 담아 그를 노려보는 내 목소리엔 빈정거림이 가득했지만.
우리를 바라본 한중식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리 위에 떠 있는 글자는 여전히 『진실』이었다.
…뭐야. 진짜로. 내게 접촉하기 위해. 자신과 신도들 전체를 마족들에게 넙죽 바친 거였어?
이건 또 무슨 정신 나간 스케일이지?
“그렇습니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은 모두. 지금 이 짧은 만남을 위해서였습니다.”
“…미친.”
처참하게 망가진 육신이 빠른 속도로 생기를 잃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중식의 깊게 가라앉은 눈빛에선 사교도 특유의 광신에 절은 결의가 느껴졌다.
단순한 이유로 모두를 희생한 것이 진실이었노라, 담담하게 인정하는 그의 모습에 이세영의 입이 순간적으로 떡 벌어졌다.
그녀답지 않게 떡 벌어진 입에선 여러 가지 감정을 품은 욕설이 흘러나왔다.
“그 정도로 이 만남에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건가? 이 정도의 희생을 치러야 할 만큼?”
“미, 미천한 저희는 그분의 의지를 헤아리지 못합니다. 하, 하지만 그분의 마지막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서라면…. 저, 저희의 미천한 목숨 정도는 얼마든지….”
성좌의 지시에 따라, 단체로 배신자라는 오명과 희생을 자처할 정도라니.
…하.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진짜배기’ 사교도인지 모르겠네.
회귀한 이후, 수많은 사교도와 맞닥뜨려봤지만.
지금 뒤틀린 운명 클랜 놈들만큼 ‘진짜배기’ 광기를 보여준 족속은 굉장히 드물었다.
한중식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광기 어린 결의와. 화안금정에 비친 ‘진실’이란 두 글자 덕분에 지끈거리는 두통이 찾아왔다.
“…그래서. 그 위대하신 분께서 내게 무엇을 전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거창한 방법으로 이런 자리를 마련하라 지시한 거지?”
“그것은 끄, 끄흐으읍!”
-뿌드드득!
이를 악 문 한중식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더듬었다.
곧이어 섬뜩한 소리와 함께, 그의 손가락이 부러진 갈비뼈 속으로 파고들었다.
담담한 표정으로 고통을 감내하며, 가슴 속을 뒤지던 한중식은 이내 피에 절은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건…?”
“크, 크윽! 그, 그분께서 세상에 남겨두신 또 하나의 시, 신물입니다. 그분께서 이르시길. 업과 한을 짊어진 ‘그릇’에 신물을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그러면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알 수 있을지니….”
놀랍게도 한중식의 손에 들린 것은 뾰족한 바늘 형태의 ‘신물’이었다.
그의 피를 머금은 바늘 형태의 ‘신물’에선 성좌의 힘과 권능이 희미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릇에 신물을 담으라니. 그녀도 바알제불과 비슷한 것을 안배해둔 건가?
…아니야. 그렇다기보단 바알제불이 맞이한 운명이 그녀에게 ‘새로운’ 영감을 제공한 것이 분명하군.
한중식에게서 ‘부서진 물레의 노파’의 전언을 들은 순간. 그동안 아귀가 맞지 않았던 사고의 퍼즐이 저절로 철컥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그동안 뒤틀린 운명 클랜이 지금의 만남을 위해, 그런 희생을 감수했는지.
나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신물을 내게 물려주는 ‘안배’를 통해 그녀가 무엇을 의도한 것인지.
한중식과 대화하며, 도통 이해할 수 없었던 모든 것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신도들에게 ‘배신’ 당한 척. 스스로 영락의 길을 선택한 것이었군.”
바알제불이 남긴 기억에 의하면, 사교도들의 성좌들은 모두 인과율의 속박에 사로잡혀. 인류와 대적하는 ‘악역’을 강제로 수행하는 중이었다.
그중에서도 ‘부서진 물레의 노파’는 유독, 자신이 부여받은 역할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성좌였다.
신도들의 배신으로 바알제불이 맞이했던 비참한 운명은, 그녀에겐 역설적으로 저주받은 속박에서 달아날 수 있는 영감으로 다가왔던 모양이었다.
“그,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어둡고 낮은 그분의 염원대로였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한중식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생기가 거의 다 빠져나가, 창백해진 그의 얼굴엔 어째선지 모든 것을 이룬 듯 만족스러운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꼭두각시 같은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니.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로군. 그것만으론 당신들이 그토록 필사적으로 그녀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행동하진 않았을 테니까.”
‘부서진 물레의 노파’의 목적은 단순히 마족들 손에 몰락하여, 뒤틀린 안식을 찾기 위함뿐만이 아니었다.
미래를 엿보는 예지의 권능을 지닌 그녀답게, 그녀는 나, ‘설용호’라는 가능성에 이 뒤틀린 세계 전체의 미래를 맡긴 것이었다.
…성좌인 그녀가 마족들 손에 껍데기만 남은 채로 몰락해야지만.
『잊혀진 자들의 영웅시』를 통해, 그녀의 한과 업을 내가 짊어질 수 있을 테니까.
“…모든 것은 그분의 뜻대로.”
한중식은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오른 것을 마지막으로 그의 눈에서 생명의 빛이 완전히 꺼졌다.
그것을 신호로 광신과 의지만으로 버티고 있던 한중식의 육신이 먼지로 변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믿는 성좌에 대한 충심만으로 내게 기묘한 방식으로 접근한 사교도의 기묘한 최후였다.
“…녹음해서 기록으로 남겨두긴 했는데. 이건. 남들에게 좀 보여주기 그러네요. 으으. 용호 씨에게 사교도의 성좌가 이런 식으로 접촉하다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아할지….”
먼지로 변한 한중식의 육신이 완전히 분해되어 사라지자.
그의 말을 녹음하던 이세영은 머리가 아프다는듯 자신의 관자놀이를 쿡쿡 찔렀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불신과 신뢰가 공존하는 듯, 혼란스러운 눈빛이었다.
“….”
하지만 나는 한가롭게 이세영의 혼란스러운 눈빛 따위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파츠츠츠.
손에 들린 뒤틀린 운명 클랜의 신물이 희미한 빛을 발하며, 내 손으로 파고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영혼을 쥐어 짜내는 듯한 고통이 손가락에서 느껴졌다. 신체가 내 제어에서 완전히 벗어나버린 듯.
엄청난 고통 속에서 나는 입조차 벌릴 수 없었다.
“…용호 씨?”
의문이 가득한 이세영의 마지막 말을 마지막으로, 세상이 온통 시커멓게 물들었다.
의식이 빠른 속도로 저 깊은 심연으로 끌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