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0화
“…그래. 그동안 빌어먹을 만큼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그 기물에 담긴 특성이 그렇게 대단한 권능을 지녔을 줄은 꿈에도 몰랐거늘.”
피식 웃으며, 허무의 공간에 생성된 바위에 걸터앉은 위철용은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오죽 나를 걱정했던 모양인지, 그는 굉장한 정신적 피로를 느끼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사람 말을 좀 들으셨으면 오죽 좋았습니까. 다짜고짜 창부터 휘두르시긴.”
“네놈의 영혼에서 몸뚱이에서 파리 자식의 고약한 악취가 그리 진동하는데. 그걸 어찌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있었겠느냐.”
“악취요? 영혼에서도 악취가 나나? 그 파리 양반의 신물을 받아먹은 부작용일지도 모르겠네요.”
위철용의 변명 아닌 변명에, 과장된 움직임으로 몸 이곳저곳의 냄새를 맡는 시늉을 하자.
그의 얼굴에 걸린 멋쩍은 표정이 더욱 볼만하게 일그러졌다.
“그나저나. 그 불측한 이단자가 말했던 ’안배‘가 그딴 식으로 작용 될 줄은 몰랐구나. 낙오자들의 한과 업을 네놈에게 짊어지워 그들의 힘을 빌리다니….”
멋쩍은 표정으로 산발이 된 머리를 긁적이던 위철용은 걱정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강력한 권능을 손에 넣었다는 소식에도 불구, 아무래도 그는 뭔가 걸리는 게 있는 것 같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걱정의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갑자기 뭡니까. 그, 길에서 주운 병든 강아지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은.”
“필멸자의 나약한 육신과 정신으로 초월자들의 한과 업을 짊어진다는 것이. 어디 보통 일인 줄 아느냐? 그런 엄청난 것을 짊어지고도 그저 좋다고 싱글거리기만 하는 네놈은 정말이지….”
아무래도 과거에 성좌였던 탓인지. 위철용은 영락한 성좌들의 한과 업을 짊어진다는 행위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어렴풋하게 눈치챈 모양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어째선지 조금씩 조금씩 촉촉하게 습기를 머금어갔다.
그답지 않게 눈시울이 점점 붉어지는 모습에, 어쩐지 괜스레 숙연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걱정 마십쇼. 어르신. 어차피 회귀 전 허무하게 죽어버린 목숨 아니겠습니까. 한번 스러졌던 목숨이 이렇게 막중한 역할을 떠맡다니. 멋지잖아요?”
“…너란 놈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눈시울을 붉힌 위철용에게 나는 자신감이 넘치는 미소로 화답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도 싱긋 웃는 내 모습에 할 말을 잃어버린 모양인지, 위철용은 붉어진 눈시울을 손으로 어색하게 훔쳤다.
“것보다. 그것 말고도 어르신께서 의식을 잃은 동안. 엄청난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났습죠. 무슨 일이 있었냐면요.”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흐트러진 위엄을 수습하는 위철용에게 오랫동안 얽혀왔던 아모스와의 악연이 끝났다는 것에 관해 이야기했다.
아모스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지. 놈이 바알제불을 포획해 어떤 용도로 사용했는지 등등.
나는 그동안 아모스, 아니 아스모데우스와의 얽힌 모든 일에 관련돈 이야기들을 위철용에게 조잘거렸다.
“놈의 진정한 이름이 아스모데우스라.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다만. 네놈의 말대로라면 본존이 인지조차 하지 못한 과거에 낙오자로 낙오한 작자인가 보군.”
“…정작 그놈은 바알제불과 형제이니 뭐니 했다면서 떠들던데요?”
“원래대로라면 ‘그럴 리 없다!’라고 흥분해야겠지만. 뭐, 인과율이 개입했다면. 성좌들의 기억 정도는 손쉽게 뒤틀어 놨겠지.”
내 이야기를 들은 위철용은 담담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말대로 예전 같았으면, 말이 되니 어쩌니 하며 마구 딴죽을 걸어댔겠지만.
일련의 사건으로 그도 뭔가 깨달은 것이 있는지. 이런 주제엔 아예 달관해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찬탈의 전쟁…. 네놈이 먼젓번에 그런 이야기를 꺼냈을 땐. 그런 일이 벌어졌을 리 없다고 부정했다만. 네놈의 영혼이 속삭이는 이야기를 보아하니. 믿지 않을래야 믿지 않을 수가 없는 노릇이로군.”
“…제 영혼이 속삭이는 이야기요?”
“말했지 않느냐. 내 영혼은 네놈의 영혼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이다. 덕분에 네놈이 흡수한 한과 업이 속삭이는 이야기를 본존도 간접적으로나마 들을 수 있느니라.”
내 영혼에 새겨진 낙오자들의 한과 업이 위철용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모양이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나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어째선지 회한과 허탈함을 품고 있었다.
…바알제불의 영웅시를 발동시키자 마자, 갑자기 표정이 이상해진다 했더니.
아무래도 그들의 기억 중 일부가 어르신에게 흘러들어간 모양이로군.
"…그, 그것보다. 그렇게 다른 놈들의 한과 없을 짊어졌으면서! 뭔가 중요한걸 잊고 있지는 않았더냐? 이 어르신과의 약속 말이다!”
분위기가 살짝 묘해지자, 위철용은 벌게진 표정으로 내게 추궁하듯 이상한 것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약속이요? 제가 어르신과 무슨 약속을 했다고….”
“본존의 기억 말이다 기억! 다른 놈들의 한과 업을 짊어지느라 본존과의 약속은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다만?”
…아 맞다. 그러고보니. 특성 트리에 포인트를 투자하지 않은지도 꽤 됐네.
영웅시 스킬을 습득한 뒤론 특성 트리 자체를 열어본 적이 없지 뭐야.
“그러네요? 그러고보니 요즘 특성 트리 자체를 열어본 적이 없긴 하네요.”
“그럴 줄 알았느니라. 본존이 기억을 온존하게 되찾아야. 네놈의 앞길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을….”
위철용의 불평에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특성 트리를 열었다.
밤하늘처럼 껌껌하게 물들어버린 시야 사이로 알록달록한 별들이 오랜만에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밀조밀하게 떠오른 별들은, 이내 ‘끝없는 고행의 길’ 특성 트리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이래서야 ‘끝없는 고행의 길’의 원래 형태와는 많이 멀어져 버렸네요,”
수많은 이들의 한과 업을 짊어져서 일까?
‘끝없는 고행의 길’ 특성 트리는 회귀 전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라진 형태가 되어 있었다.
수많은 줄기를 사방에 퍼뜨린 나무와도 같이 변해버린 모습에 나는 헛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놈들의 한과 업을 짊어지면서 애송이 네놈의 영혼이 뒤틀렸기 때문이니라. 네놈의 운명 또한 비틀렸으니 이를 어찌해야할지….”
“으음. 뭐, 그건 제가 선택한 길이니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죠. 뭐. 것보다…. 어르신의 기억과 관련된 특성이 어디있더라.”
특성 트리가 원래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에, 나는 위철용의 기억과 관련된 ‘파천 복룡창’의 특성들을 찾는데 상당한 시간을 소모해야만 했다.
한참을 살펴본 끝에, 파천 복룡창과 관련된 특성들을 찾아낸 나는 엄청나게 쌓여있는 특성 포인트를 한꺼번에 투자 해버렸다.
-스파아아앗!
그렇게 무식하게 특성 포인트를 쏟아 부은 그 순간!
파천 복룡창을 상징하는 별들이 완전한 별자리를 그리며 황금색으로 번쩍 빛났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 엄청난 양의 지식들이이 밀물처럼 듯 밀려와 각인되기 시작했다.
파천 복룡창이라는 창술에 대한 전체적인 지식이 한꺼번에 습득되었다.
이번에도 모든 지식들은 머릿속에 각인되기 무섭게 자연스럽게 몸으로도 체득되었다.
“크아아앗!”
지나치게 많은 기억이 몰려와서인지, 위철용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두 눈이 계속해서 허공을 더듬으며, 흘러드는 기억의 편린들을 훑었다.
정신없이 중얼거리는 그의 입이 잊어버린 기억들을 되뇌이며, 망각의 늪에서 건져올려진 기억을 반추했다.
******
-파츠츠츠.
그렇게 파천 복룡창을 포함한 ‘끝없는 고행의 길’ 특성 트리가 완전해지자.
지금 이 시점에서 그렇게까지 큰 의미는 없지만, 나는 회귀 전의 무위를 완전히 되찾았다.
그리고 골똘히 고뇌에 잠긴 표정으로 보아하니, 위철용 역시 잃어버렸던 기억들을 모조리 되찾은 듯 했다.
“그래…. 그랬었군. 어쩐지 석연치 않은 점들이 있더라니.”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위철용은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어쩐지 서글픈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 그는 굉장히 착잡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애송아…. 아무래도 본존의 기억은 누군가에 의해 조작당했던 것 같구나. 아니, 기억 수준이 아니라 자아를 조작당했다고 봐야 옳겠군. 찬탈의 전쟁에 대한 기억이 모조리 지워진 것도, 그리고 낙오자들에게 본존이 맹목적인 적개심을 품었던 것들도 모두….”
…역시 그랬던 건가.
나슈리크가 말해준 ‘찬탈의 전쟁’에 대해 위철용이 유독 격렬하게 반응했던 것.
그리고 먼젓번에 그가 보여준 ‘주입된 자아’로서의 알 수 없는 행동.
마지막으로 위철용이 종종 보여주던 낙오자들에 대한 기이한 적개심은 모조리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반응이었던 모양이었다.
“네놈이 ‘그릇’으로서 각성한 것이 본존에게 영향을 준 모양이야. 어째서인지…. 회귀 전 본존이 성좌였던 시절보다 더욱 더 기억과 자아가 명확해지는 기분이로군.”
내가 ‘그릇’으로 각성하여, 인과율의 굴레에서 벗어난 존재가 되었기 때문인지.
위철용도 기억을 완전히 되찾는 과정에서 인과율의 주박에서 완전히 벗어난 모양이었다.
계속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신의 기억들을 점검해보는 위철용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져갔다.
“빌어먹을…. 그때 그렇게 본존이 네놈을 ‘경극’의 배우로서 좋아했다고 떠들어 댔거늘…. 본존 역시 인과율이란 놈이 짜 놓은 경극의 배우였던 모양이었던 게다.”
“…그럼 ‘천마’로서 가졌던 기억들도 모두 조작된 겁니까?”
“아니! 단언컨대 그건 분명히 실존했던 필멸자 시절의 기억 확실해! 그때 본존이 필멸의 몸으로 경지를 이루었기에 놈에게 ‘성좌’로서 간택 받았던 게지. 우습게도 본존은 스스로 우화등선 했다고 으스댔었지만 말이다.”
위철용이 성좌로 승천했던 것까지 인과율의 수작질에 불과했던 모양인지.
위철용은 허탈한 표정으로 끝없는 허무의 공간을 응시했다.
요동치는 회색빛 구름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점점 묘한 열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애석하게도 이 위철용이란 어르신은 당한 만큼 돌려줘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니. 언젠가는 놈에게 한방 먹여줘야겠지. 하지만 그 전에….”
알 수 없는 결의를 다짐한 위철용은 어깨에 비끄러 맸던 창을 뽑아들었다.
그리곤 굉장히 음험해 보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본존이 갈고 닦았던 ‘진짜’ 무의 세계를 네놈에게 보여줘야 하지 않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