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9화
“…조금 쉬나 싶었더니.”
시야가 암전된 것과 동시에 익숙하게 황량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나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질 좋은 최고급 소파의 푹신한 쿠션을 만끽하며 휴식을 취할 새도 없이, 아무래도 내 의식은 위철용의 손에 의해 심상세계 속으로 끌려온 모양이었다.
이세영도 그렇고 이 양반도 그렇고 사람이 쉬는 걸 가만히 두고보지 못하는 건가….
“…이 어르신은 기껏 여기까지 불러놓고 코빼기도 안 내비치시네.”
어째선지 기기묘묘하게 꿈틀거리는 회색빛 구름들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쉰 나는 괜시리 주변을 휘감은 회색빛 구름을 어루만졌다.
허무하게 떠돌던 회색빛 구름은 내 손길이 마음에 들었는지, 강아지처럼 내 손을 부드럽게 간질여 주었다.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해본 것도 상당히 오래된 것 같단 말이지.”
오닉스 길드 본사 쪽에 발생했던 왜곡형 게이트부터 시작해서 이세영과의 일까지.
사흘 남짓한 기간 동안, 나는 단 한 순간도 휴식다운 휴식을 취하지 못했었다.
덕분에 육체의 피로와는 상관없이 정신적인 피로가 쌓여도 한참이나 쌓여버린 모양인지, 구름을 어루만지는 내 입에선 연신 불평과 불만이 불퉁하게 흘러나왔다.
“육체적인 피로는 그렇다 쳐도, 정신적인 피로는 환골탈태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야. 천하무적은 무슨….”
그렇게 혼잣말을 실없이 중얼거리며, 구름을 따라 걷고 있자.
바위에 기대어 앉아있는 못생긴 노인의 익숙한 모습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또 무슨 불편한 일이 있었는지, 위철용은 굳은 얼굴로 바위에 걸터앉아 상념에 잠겨있는 모습이었다.
“…어르신?”
이상했다.
굳은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위철용에겐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가슴이 선득해질 만큼 서늘한 살기, 피부가 얼어붙을 만큼 냉랭하게 느껴지는 정체모를 한기.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감정은 명백한 ‘적의’ 였다.
기껏 사람을 불러 와놓고 이 양반은 갑자기 또 왜 이러는 거야?
“아니, 또 무슨 일이십니까아? 어르신?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도….”
보기보다 섬세하면서도 변덕스러운 성격을 자랑하는 이가 바로, 위철용이었다.
속으로 그가 삐졌을 가능성을 점쳐본 나는 넉살좋게 웃으며, 위철용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아니, 그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서걱!
“…?!”
갑자기 감지된 섬찟한 살기에 나는 순간적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내가 멈춰 선 것과 동시에, 내 앞의 공간이 그대로 반으로 부욱 갈라졌다.
피부를 따끔하게 자극하는 서늘한 살기가 느껴졌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무리 삐졌다고 해도 이건 너무한 것 아녜요?!”
“…본존의 움직임을 간파하다니. 역시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모양이로구나.”
위철용은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바위 위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묵직한 위엄을 품은 살기가 허무의 공간을 채워나갔다.
“말해라. 네놈은 도대체 누구지?”
적의에 가득 찬 위철용의 입에서 새어 나온 말은 내가 미처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내용을 품고 있었다.
너무나도 엉뚱한 그의 말에 순간적으로 당황을 뛰어넘어 황당한 감정이 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 양반이 갑자기 노인성 치매에 걸리기라도 한 건가.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소리여?
“갑자기 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접니다! 저! 설용호!”
“숙주의 기억을 벌써 다 잡아먹은 건가? 역시. 파리 새끼 그 놈이 침식체하난 기가 막히게 잘 만들지….”
황당하기 짝이 없는 소리에, 항변하려 들었지만.
위철용은 아예 나를 바알제불이 만들어 낸 침식체의 일종쯤으로 간주하고 있는 듯했다.
창을 단단히 말아쥔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용호! 네 복수는 이 위철용이 이뤄주겠다! 부디 저승에서 지켜봐다오!”
…아니. 저승이 아니라. 지금 댁 눈앞에서. 황당한 광경을 라이브로 관람 중인 뎁쇼.
-빠아아악!
얼이 쏙 빠지는 듯한 황당한 발언의 연속에 머리가 아파지려는 찰나.
별안간 눈앞에 별이 번쩍였다. 곧이어 진짜로 두개골이 움푹 함몰되는 듯한 격통이 이어졌다.
“끄흡!”
“곱게 죽이지는 않겠다! 내 하나뿐인 제자가 느꼈던 그 고통과 원통함을 살점 한올 한올에 새겨 주마!”
내 머리를 강타한 위철용의 눈이 불을 뿜었다.
초승달 모양으로 휜, 그의 눈엔 어째선지 슬픔을 머금은 살기가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납게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입가엔 서글픈 미소가 맺혀 있었다.
“아, 아니 그게 대체 무슨 개소…. 크학!”
“용호야아아아!”
-따아아아악!
뭐라 대꾸할 새도 없이 다시 한번 눈앞에서 별이 번쩍였다.
어찌나 급작스럽게 얻어맞았는지, 이번엔 혀끝이 살짝 잘려나갔다.
비릿한 피 맛이 입에 화악 감돌았다.
“그래! 이거야! 이 복수의 쾌락! 조금만 기다려라. 설용호! 이 악적 놈을 네가 있는 곳으로 보내주겠다!”
창대로 내 머리통을 가격한 위철용의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어쩐지 조용하다 싶었더니, 아무래도 잠깐 못 본 사이 맛이 가도 심하게 맛이 가버린 모양이었다.
“정말이지 이 양반이고 저 양반이고….”
그렇지 않아도 이세영에게 휴식을 방해 받은 것 때문에 짜증이 치밀어 올라 있던 상황이었다.
거기에 더해 위철용까지 정신이 나가버린 모습을 보여주면서 휴식을 또다시 방해하니, 짜증이 치밀어 오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것들아 사람이 쉬는 꼬라지가 그렇게 보기 싫었냐아앗!”
짜증은 곳 분노로 변했다.
내 손을 부드럽게 간질이던 회색빛 구름이 내 의지에 감응하여 어둠달의 형태로 빚어졌다.
손에 묵직하게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에 나는 내력과 마력을 동시에 끌어 올렸다.
그리고 내 짜증과 분노를 듬뿍 담아, 괴상한 표정으로 헛소리를 해대는 위철용에게 분노의 창날을 휘둘렀다.
-콰카카카칵!
“우리 용호의 창법을 이렇게나 완벽하게 흉내내다니! 침식체 주제에 제법이로군!”
“…그러니까. 누가 침식첸데요!”
“닥쳐라! 용호의 목소리로 억울하다는 듯 지껄이지 맛!”
-후와아앙!
공간이 비틀리는 소리와 함께 위철용의 창날에서 시커먼 용 아홉 마리가 흉포하게 포효했다.
파천 복룡창의 제 일식. 연포가 궁극적인 형태로 펼쳐진 것이었다.
…용 대가리를 아홉 개나 꺼내다니. 이 양반이 진짜 해보자는 모양인데.
나는 당장이라도 나를 꿰뚫어버릴 듯 살벌하게 덮쳐오는 창날에 까드득 이를 깨물었다.
그리곤 들끓어 오르는 내력과 솟구치는 마력을 나선형의 형태로 끌어모아, 어둠달에 주입했다.
-후와아앙!
어둠달의 창날이 아홉 마리 용의 형상을 빚어냈다. .
마력과 내력을 머금고 쉴 새 없이 소용돌이치는 아홉 마리의 용이 대가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흉포하게 포효했다.
“…구룡격! 침식체 주제에 숙주의 능력을 벌써 다 장악한 모양이구나!”
똑같이 포효하는 아홉 마리 용의 형상을 본 위철용이 침음성을 삼켰다.
알 수 없는 슬픔을 머금은 그의 눈가에 이슬이 살짝 맺혔다.
“그 멍청한 놈도 끝까지 달성하지 못한 경지이거늘….”
“달성하지 못하기는! 회귀 전에도 여기까진 달성 했었거든요?!”
-콰콰콰쾅!
종잡을 수 없는 대화 속에서 창날과 창날이 거세게 부딪혔다.
열 여덟마리의 용이 사방을 온통 시커멓게 물들이며, 서로의 육신을 맹렬하게 물어뜯었다.
회색빛 구름이 시커먼 용들의 윤무 속에서 거칠게 흩어졌다 모이는 것을 반복했다.
구름 속에서 시커먼 내력과 암록색 마력의 파편이 사납게 흩날렸다.
“이 더러운 암록색 마력! 파리 놈의 역겨운 냄새를 풀풀 풍기는 군!”
-콰지지직!
부서져서 흩날리는 마력과 내력의 파편 속에서 시뻘겋게 충혈된 위철용의 눈이 적의를 품고 붉게 빛났다.
부서져 흩날리는 시커먼 내력의 조각들이 그의 의지를 품고 흉험한 살기를 흩뿌렸다.
파편들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나는 이를 꽉 깨물고 외골격을 끌어올렸다.
암록색 마력과 시커먼 내력이 휘몰아치며, 황금빛 외골격을 어둡게 물들였다.
-콰쾅! 콰콰쾅!
내가 평소에 즐겨쓰던 초식, 약식 암룡출동이 위철용의 손에 펼쳐졌다.
흉험한 파괴력을 품은 내력의 파편들이 내 외골격을 거세게 두드렸다.
“…놈!”
-콰앙!
“큽!”
폭발 속에 기척을 숨기고 다가온 위철용이 시커먼 창날을 벼락처럼 휘둘렀다.
내력을 듬뿍 머금은 창날이 외골격과 맞부딪히며 시뻘건 불꽃을 흩뿌렸다.
순간적으로 세상이 온통 흔들리는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침투해온 위철용의 내력이 내 몸 속으로 파고들자, 비릿하면서도 씁쓸한 무언가가 목구멍에서부터 왈칵 넘어왔다.
이런 식으로 대놓고 내게 살수를 쓴다고?
…진짜 해보자 이거지?
위철용의 공격에 살기가 진득하게 실린 것을 확인한 나는 바알제불의 권능을 끌어올렸다.
신물이 박힌 심장이 쿵쿵 맥동하며, 한때 성좌였던 이의 강대한 권능을 내게 불어넣었다.
-쿠르르르르.
부패와 타락의 권능이 주입된 어둠달이 부르르 떨렸다.
암록색으로 암울하게 물든 창날이 끔찍한 파괴력을 머금었다.
“어디 한번 진짜 해보자고요.”
바알제불의 힘과 권능을 두른 나는 위철용을 바라보며 사납게 웃었다.
부패와 타락의 권능이 거칠게 휘몰아치며, 회색빛 허무의 공간을 암록색으로 물들였다.
하지만….
“…마력의 형태로 미뤄보건대. 이건 침식체 따위가 아니로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바알제불의 권능을 두른 내 모습을 바라본 위철용은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갑자기 창을 내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을 휘감고 있던 투기와 살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침식체 따위가 아니라 저! 설용호 본인이 맞다고!”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 위철용에게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위철용의 얼굴에 떠오른 안도하는 듯한 표정에 나는 그에게 더 짜증을 부리지 못했다.
“걱정했잖느냐…. 말해보거라. 도대체 네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