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7화
때로는 전투보다 그것을 수습하는 일이 더 큰 일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었다.
대단히 애석하게도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뒷수습이라…. 그래요. 아무래도 이것저것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으니까요.”
“놈이 저지른 짓을 수습하기가 쉽진 않아 보이더군.”
태백 길드를 막후에서부터 타락시켰던 장본인은 숨을 거뒀지만.
놈이 흩뿌렸던 타락과 불화의 씨앗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것을 너무도 잘 아는 강태백과 신지현 두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어두워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박양환을 포함한 다른 산군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무리일세.”
“맞아요. 우리 쪽을 지지하거나 중도를 택했던 이들은 모두….”
어두운 낯빛의 신지현은 그녀답지 않게 침통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굳이 신지현이 설명을 해주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들이 어떤 운명을 맞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죽지도 살지도 못한 몰골이 되어, 푸줏간의 고기처럼 ‘도살장’에 걸려있었던 이들뿐만 아니라.
우리를 공격해왔던 강마병들의 소체 또한 너무도 낯익은 이들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신 팀장과 인사팀을 무사히 구출한 것은 참으로 다행이네만, 다른 이들을 미처 구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가슴이 아프군….”
“가슴뿐만 아니라, 현실도 아파요. 이렇다 할 증거가 없는 상황이니. 놈들에겐 물어뜯기 좋은 명분이 될 거에요.”
애석하게도 지금의 본사 건물 내부엔 마족과 관련된 증거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
죽음을 맞이한 마족들과 몬스터들의 시신은 어째선지 깨끗이 증발해버린 상황이었고.
몸에 깃든 마의 기운이 사라진 강마병들의 시신은 어째서인지 평범한 헌터들의 시신처럼 멀끔하게 변해 있었다.
“이래서야. 오히려 우리 쪽이 테러를 저지른 것처럼 보이는군. 그래.”
그렇기에, 얼핏 보기엔 길드의 결정에 불만을 품은 ‘전’ 길드장 일당이 끔찍한 테러를 저질러 버린 상황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야말로 신지현이 말한 것처럼, 우리를 음해하려는 세력에겐 좋은 명분이 될 만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길드장님 표정을 보아하니, 다른 길드에선 입을 싹 닫아버린 상태인 것 같네요. 맞죠?”
사건이 끝난 직후, 강태백은 이곳저곳에 연락을 취해 도움을 구하려는 듯 했지만.
일이 잘 안 풀렸던 모양인지, 신지현이 지적한 것처럼 강태백의 얼굴엔 짙은 음영이 드리워진 상태였다.
“…안타깝게도. 자네의 말을 부정하지 못하겠군.”
신지현과 시선이 마주친 강태백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가만히 고개를 떨구었다.
음영이 드리운 그의 입가는 분노를 머금고 미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오행 길드도 망했겠다. 태백 길드는 분열되었겠다. 오랫동안 군림해온 대형 길드 사이의 균형이 무너진 상황이니. 이권을 노린 하이에나들도 몰려들겠네요. 에휴. 정말이지 아~주 희망적인 상황이야.”
마족들의 농간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질서를 유지하던 5대 길드 간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상황이 되어버렸다.
다른 3대 대형 길드를 포함해, 그간 대형 길드의 등쌀에 짓눌려진 중소형 길드들까지. 태백과 오행이 차지하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아귀다툼을 할 것이 분명하니만큼.
수세에 몰린 강태백이 도움을 청할 곳은 어디에도 없어 보이는 상황이었다.
“남부연합에 도움을 청하는 건…. 아니야. 형님께 폐를 끼칠 순 없지. 그쪽도 아직 완전히 세를 회복하진 못했을 테니 말일세.”
“그분들 성격으론 연락하기 무섭게 무리를 해서라도 한달음에 달려오겠지만…. 그리 큰 도움이 되진 않을 거예요. 아니, 오히려 그분들이 참전하면. 그것을 명분으로 삼아 지방의 다른 길드들도 이쪽으로 진출하려 들겠죠.”
내가 생각하기에도 현 상황에서 도움을 구할만한 세력은 남부연합이 유일했다.
하지만, 섣불리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큰 리스크를 안고 있었다.
조금 전 신지현이 말한 것처럼, 남부연합이 강태백을 돕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는 것을 빌미로 다른 지방의 길드들이 수도권 쪽에 대놓고 야욕을 드러낼 가능성이 농후했으니까….
“그렇다면 오닉스 길드는…. 아니지, 그들이 나를 도와줄 리가 없지. 오히려 이참에 먼젓번에 맺은 ‘계약’을 파기하려 들 테니 말일세.”
황윤형을 위시한 휘하의 팬텀 사파이어 공격대야 강태백과 내게 호의를 품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오닉스 길드의 길드장 황태용은 우리에게 그리 유쾌한 관계가 아니었다.
내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기도 했고, 강태백의 협박으로 달갑지 않은 계약을 맺기도 했으니.
오히려 이것을 기회로 삼아, 강태백을 말살하려고 들 가능성이 농후했다.
“…계약이요?”
“약간의 협박과 약간의 공갈이 섞인 계약이라. 그쪽 길드장 입장에선 아니꼬울 만한 것이 있어요.”
“갑작스레 오닉스 길드 쪽으로 쳐들어가서 뭘 하셨나 했더니…. 으으.”
신지현은 ‘계약’이라는 말에 반응해, 의아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것도 잠시, 내게서 대강의 설명을 들은 그녀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찌푸려진 미간을 신경질적으로 꾹꾹 누르는 신지현의 입에선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천지사방에 도움을 요청할 만한 곳이 없다는 소리네요?”
“…뭐, 어떻게보면 그런 상황이 되어버렸다고 할 수 있겠지.”“대놓고 우리의 목숨을 노리는 ‘전’ 태백 길드 산군 나으리들부터, 무슨 짓을 저지를지 짐작조차 안가는 다른 길드까지…. 진작 사표 쓰고 튈 걸 그랬어요.”
신지현과 강태백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무겁게 고개를 떨구었다.
세상이 끝나버리기라도 했는지. 계속해서 한숨을 푹푹 내쉬는 꼴이 적잖이 궁상맞아 보였다.
“뭘 그리 궁상맞게 시무룩해 있습니까? 길드장님도. 매니저님도.”
“궁상맞다뇨. 어둡디 어두운 현실에 잠시 푸념 좀 해본 것뿐인데.”
“…무슨 묘안이라도 있는 겐가?”
나를 바라보는 신지현과 강태백의 얼굴엔 우습게도 똑같은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기분 나쁜 말을 들은 것에 대한 반발과 내가 뭔가 묘안을 내놓을 것이라는 기대가 그들의 얼굴에 깃들어 있었다.
묘안은 무슨. 헌터들의 세계에서 이런 식의 위기를 탈출할 방법은 단 한 가지지.
“복잡하게 생각할 것 있습니까? 두 분 모두, 헌터들의 세계에서 뭐가 가장 중요한지 잊으셨어요?”
두 사람의 얼굴에 깃든 표정이 의아함을 품기 시작하자.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사납게 이를 드러내어 호전적인 미소를 지었다.
콰악 움켜쥔 어둠달에 시커먼 내력과 암녹색 마력이 휘몰아치며, 흉흉한 살기를 흩뿌렸다.
화안금정의 효과로 황금빛으로 번들거리는 두 눈에서 광폭한 안광이 새어 나왔다.
“힘.”
아무리 그럴싸한 미사여구를 덧붙여 봐야.
전투와 전투 속에서 살아가는 헌터들을 지배하는 가장 근본적인 법칙은 바로, 힘의 논리였다.
강태백이 모두에게 버림받은 이유 역시, 근본적으로는 너무도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바로, 그가 자랑하던 태백 ‘길드’라는 거대한 힘을 잃어버렸다는 것.
“까놓고 말해서. 지금 길드장님이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버린 이유가 뭐겠습니까. 놈들이 길드장님을 만만하게 봐서 그런 거 아닙니까.”
“허, 헌터님. 가, 갑자기 그게 무슨 무례한….”
“…정확하네. 놈들이 시건방지게 나를 버린 것도 내가 놈들에게 얕보였기 때문이겠지.”
내 입에서 갑자기 터져 나온 직설적인 발언에 신지현은 크게 당황하여 허둥거렸지만.
그녀의 호들갑스러운 반응엔 상관없이 강태백은 쓰게 웃으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의 수작질에 당해, 요 몇 년간 현장을 떠나 있었더니. 길드 내부에서도 퇴물이 되었다는 소리가 심심찮게 나왔으니 말일세. 헌터라는 족속들은 다 그런 게지.”
아스모데우스가 공급한 마력향에 중독된 강태백은 놈들의 의도한 대로.
그동안 헌터의 삶에서 한참을 벗어나, 탐욕과 권력에 취한 삶을 살아왔었다.
덕분에, 다른 산군들에게 얕보일만큼 태백 안에서 그의 위상과 권위는 이미 추락할 대로 추락해버린 상황이었다.
굴욕적인 과거를 떠올린 강태백의 눈에 푸르스름한 귀화가 어슴푸레 이글거렸다.
“그렇죠. 그렇잖아도 퇴물에 불과한 양반이 지지세력까지 전부 잃어버렸는데…. 그것만큼 만만해 보이는 게 어딨겠습니까. 딱 물어뜯기 좋은 먹잇감이지.”
-까드득!
강태백의 이가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사납게 갈렸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노기 어린 분노가 피어올랐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자. 그것을 지켜보는 신지현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져 갔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말을 좀 가려서 해주지 않겠나?”
“아뇨. 할 말은 해야죠. 그러니까! 이런 문제를 해결할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간단하다고?”
“놈들이 우리를 얕보며 그딴 식으로 이를 드러낸다면. 정면에서 쳐 부숴 주면 그만!”
-콰아앙!
강태백에게 일갈한 나는 마력과 내력이 소용돌이치는 발로 힘껏 진각을 밟았다.
어마어마한 힘에 의해, 새하얀 대리석에 시커먼 거미줄과도 같은 균열이 쩌적 입을 벌렸다.
바닥을 완전히 박살 낸 나는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강태백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필멸의 영역을 뛰어넘은 마족조차 쓰러뜨린 이들이 바로 우리 아니겠습니까? 유약한 하이에나들이 제아무리 우리를 물어뜯으려 들어봐야. 짓밟아주면 제 주제를 알겠죠.”
다른 대형 길드의 세력이 강력하다곤 하나. 마족들의 위협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마족들과 손을 잡은 다른 산군들이 필멸의 영역을 뛰어넘어, ‘규격 외’의 경지에 도달하긴 했으나. 나 또한 이미 평범한 필멸자의 수준은 아득히 오래전에 뛰어 넘은 지 오래였다.
“규격에서 벗어난 놈들은 규격에서 벗어난 제가 해결할 테니. 길드장님께선 주제를 모르고 기어오르는 놈들만 짓밟아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