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6화
기나긴 밤이 끝나고 이제 막 뜨기 시작한 태양이 어둠을 서서히 몰아내기 시작했다.
폐허로 변한 길드장실의 부서진 창문을 통해 태양 빛이 새어 들어왔다.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길드장실에서 신지현은 털썩 무릎을 꿇은 채,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래도 인사팀 식구들은 무사하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
그다지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은 신지현의 모습에, 괜히 걱정이 치밀었다.
말이나 걸어볼 요량으로 그녀의 옆에 쪼그려 앉아, 대화를 시도했지만….
말없이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는 신지현의 눈빛은 여전히 흐리멍덩하니 초점이 맞지 않았다.
지나치게 쪽팔렸던 건지. 아니면 아스모데우스에게 육체를 빼앗긴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인지. 아무래도 반쯤 정신을 놓아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것보다. 진짜예요? 소싯적에 은평구의 성난 햄스터라고 불렸다는 거.”
신지현의 상태가 영 좋아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분위기를 환기할 겸, 농담 삼아 그녀의 흑역사 스위치를 살짝 건드려주었다.
“…!”
그것이 상당히 굉장한 효과를 발휘한 것인지. 흐릿하게 풀린 눈에 빛이 되돌아왔다.호흡이 거칠어지며 신지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잘 익은 홍시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그, 그건! 사, 사람이 말이에요! 살짝 맛이 간 상태에선 마음에도 없는 헛소리를 좀 할 수도 있지!”
얼굴이 완전히 새빨개진 신지현은 한 마리 성난 햄스터처럼 빼액 고함을 내질렀다.
덕분에 주변을 정리하던 설악 공격대원들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그녀에게 모아지자.
신지현의 얼굴에서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열기가 후끈하게 느껴졌다.
“이이익! 아, 아무튼 너, 너무 하신 거 아녜요?! 내가 그동안 무슨 짓을 당했는데! 괜찮냐느니. 다친 데는 없냐느니…. 그, 그런 안부 정도는 물어봐 줄 수도 있는 거잖아요!”
신지현은 순간적으로 집중된 시선으로부터 몸을 숨기듯 내게 달려들었다.
멱살을 붙잡은 채, 거의 대롱대롱 매달리다시피 한 상태로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에선 서운하다는 감정이 듬뿍 묻어나오고 있었다.
얼마나 서운했는지, 악을 써대는 그녀의 벌겋게 달아오른 눈가엔 눈물까지 한 방울 맺혀 있었다.
“크으으윽! 쓰읍! 갑자기 눈에 먼지가….”
감정이 지나치게 고조되었던 탓일까?
신지현은 먼지가 들어갔다며 변명을 하려 들었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도,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계속해서 주르륵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애써 태연한 척, 괜찮은 척하려고는 했지만.
아무래도 그녀도 평범한 사람인 이상, 그동안 쌓였던 두려움과 공포가 평범한 수준 일리가 없지.
마족들에게 납치되어 험한 꼴을 본 것도 모자라, 육체까지 장악당했으니.
어떻게 보면 신지현이 그동안 그토록 두려워했던 공포가 현실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감정의 둑이 터져버린 탓인지, 뜨거운 눈물을 흘려내는 그녀는 더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코를 훌쩍이며, 먼지가 눌어붙은 소매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말없이 닦을 뿐이었다.
“….”
“왜. 왜 이래요! 미쳤어요?”
나는 말 없이 신지현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엉겁결에 품에 안긴 듯한 모양새가 되어서인지. 그녀의 입에선 샐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몸을 버둥거리는 것이 보통 창피한 게 아닌 모양이었지만, 등을 타고 퍼진 온기에 신지현은 내 멱살을 틀어쥔 그 상태 그대로 내 가슴팍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고생하셨어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죄송합니다.”
무정한 가죽 갑옷을 타고 신지현이 흘린 눈물이 계속해서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가녀린 어깨가 다양한 감정을 품고 쉴새 없이 들썩거렸다. 흐느끼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처음으로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녀의 등을 나는 계속해서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
“끄아아악! 죄, 죄송합니다아아아!”
얼굴을 붉힌 신지현이 강태백과 뒷수습에 관해 이야기하겠다며, 도망치듯 사라지고 난 뒤.
완전히 밝아진 페허 속에서 난데없이 해괴한 비명들이 들려왔다.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소리래니?
“…여러분들을 믿었는데. 이런 식으로 제 믿음을 배신하시다니! 용서할 수 없-어-욧!”
어째선지 폐허가 된 길드장실 구석엔 때아닌 육체의 지옥이 활짝 열려있었다.
평소보다 열 배쯤 험악해 보이는 표정을 지은 김혜옥은 괴이한 안광을 빛내며 천둥 같은 고함을 내지르고 있었고.
풀려난 인사팀 직원들은 그런 그녀의 앞에서 스쿼트 자세를 취하며 다채로운 비명을 토해내고 있었다.
“끄아아악! 그, 그건 마, 마족의 정신장악이었…”
“변명 따윈 셧업! 이건 다 여러분의 정신과 육신이 건강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 뿐! 변명 따윌 내뱉으셨으니 5세트 더 추가!”
“갸아아악! 아, 안 돼! 몸이 부, 부서질 것 같아아앗!”
고위급 마족의 정신장악은 정신계 내성 특성을 보유한 헌터들마저 저항하기 힘든 것이었지만.
지금의 김혜옥에겐 그런 ‘사소한’ 사실 따윈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렇게나 열심히 단련시켜 드렸는데. 육체의 아름다움에 대해 그리도 열심히 알려드렸는데…. 흐흑…. 고작 마족 따위의 정신 장악에 그렇게 쉽게 넘어가시다니….”
열심히 단련시킨 인사팀 직원들이 마족 따위의 정신장악에 홀라당 넘어갔었다는 사실이 그리도 분했던지, 살벌한 안광이 일렁이던 김혜옥의 눈가엔 어느새 한줄기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태백의 ‘치유사’로서! 다시는…! 다시는 그따위 수작질에 넘어가지 않도록 단련시켜 드리겠어요! 머슬 앤 마인드 리프레쉬 크러시!”
-우두두둑!!
오랫동안 고초를 겪었던 인사팀 직원들의 몸이 스쿼트가 주는 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안쓰럽게 떨리자.
눈물을 훔친 김혜옥은 마력이 흉험하게 일렁이는 손길로 그런 그들에게 ‘상냥한’ 마사지를 해주기 시작했다.
“꺼으으어걱!”
우악스러운 김혜옥의 손길에 의해, 인사팀 직원들의 몸이 신묘한 각도로 구부러졌다.
얼핏 보기엔 고전 회화풍의 지옥 그 자체처럼 보일 정도로 해괴한 광경이었지만.
그들의 몸은 김혜옥이 지닌 권능에 의해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여러분들이 납치되고 고난을 겪은 것은! 너님들이 나약해서입니다. 맞습니까!”
“으아아아 맞습니다!”
‘치료’를 마친 김혜옥은불교 탱화 속의 금강역사를 방불케 하는 엄격한 표정으로 모두를 노려보았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한 인사팀 직원들의 표정이 밥그릇을 빼앗긴 강아지와 비슷한 표정으로 시무룩해졌다.
“다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여러분의 나약한 정신과 육체를 개조시켜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끄아!”
“아, 알겠습니다아아!”
그렇게 모두를 매섭게 노려보던 김혜옥은 인사팀 직원들과 때아닌 ‘단련’을 시작했다.
전장 특유의 피비린내만이 가득했던 폐허에 시큼한 땀 냄새와 후끈한 열기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흐음. 수련에 매진하는 젊음이라…. 그것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는 법이지. 자네 생각은 어떤가? 아름답지 않나?”
눈 앞에 펼쳐진 학대의 현장을 멍하니 살펴보고 있으려니.
뒷수습을 얼추 마무리 지은 박정욱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수련과 단련에 매진하길 좋아하는 박정욱답게 그는 상당히 독특한(?) 시선으로 인사팀 직원들의 수난을 바라보고 있는 듯 했다.
…도대체 저 학대의 현장을 어떤 식으로 봐야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서류와 씨름하는 저들조차 앞으로의 일전을 대비해 열심히 수련하는 지금! 일선에서 마족 놈들과 맞붙을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순 없지!”
“맞습니다!”
내가 박정욱의 괴이한 미적 감각에 뭐라 의견을 표할 새도 없이.
알 수 없는 함성을 내지른 박정욱과 설악 공격대원들은 자연스럽게 땀과 눈물로 그려진 지옥도에 합류했다.
부리부리하게 뜬 눈에서 안광을 뿜어내던 김혜옥조차, 그들의 등장에 살짝 놀란 듯했다.
“으하하하! 사무직들이 이렇게 땀을 흘리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아저씨들…?”
호탕하게 웃은 박정욱은 어떠냐는 듯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김혜옥을 바라보았다.
박정욱과 설악 공격대원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감동을 받기라도 한 건지, 그들을 바라보는 김혜옥의 눈빛이 일순 촉촉해졌다.
그렇게 그 두 거인의 뜨거운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김혜옥과 박정욱의 얼굴에 훈훈한 미소가 떠 올랐다.
“우어어어! 수련! 단련! 훈려언!”
“강력한 근육은 강렬한 고통에서 비롯되나니!”
피와 오물에 찌든 강화 외골격을 벗어던진 박정욱과 설악 공격대원들은 인사팀 직원들과 함께 뜨거운 땀을 사방으로 흩뿌리기 시작했다.
‘…미치려거든 지들끼리만 미치지. 도대체 우리는 왜.’
‘정신 나갈 것 같아….’
갑작스런 괴인들의 난입으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잔뜩 구져져 있던 인사팀 직원들의 표정이 더욱더 괴이쩍게 뒤틀려갔다.
하지만 인사팀 직원들의 속마음 따윈 안중에도 없는 모양인지.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는 김혜옥과 설악 공격대원들의 얼굴에선 훈훈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시큼하게 흩날리는 땀방울 속에서 그들의 근육과 우애는 더욱 굳건해져만 가는 모양이었다.
“…저들은 왜 또 저기에 자연스레 합류해 있는 건가?”
꿉꿉한 냄새 속에서 조금씩 정신줄이 놓아지며, 내 정신이 어디론가 막 떠나려던 찰나.
옆에서 들려온 강태백의 아연한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다시 불러들였다.
“혜옥 양이 별난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박정욱. 저 친구는….”
“저러고도 남을 위인이라는 것을 잘 아시잖아요? 뭘 또 새삼스럽게. 똑같은 인간들이 만나서 똑같은 짓을 하는 것뿐인데요.”
어느 정도 정신을 수습한 모양인지, 신지현은 특유의 새침한 태도와 표정을 회복한 상태였다.
못 말리겠다는 듯 근육의 향연을 바라본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아 맞다! 가장 중요한 사람을 잊고 있었네! 팀장님! 팀장님도 어서 여기와서 몸을 좀 움직이세요!”
“…아, 아뇨. 치유사님 저, 저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해야해서….”
김혜옥은 흉흉한 안광이 줄기줄기 흘러나오는 눈으로 신지현을 노려보았다.
그 살벌한 시선과 눈이 마주친 신지현의 얼굴색이 점점 허옇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어허 씁! 어딜 또 도망가시려고! 가장 나약한 모습을 보여준 분이 누군데!”
김혜옥은 이글거리는 시선과 뜨거운 콧김을 뿜어내며 신지현에게 조금씩 다가왔다.
거대한 덩치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그것에 비례하여, 신지현은 몸을 가늘게 떨었다.
“후우…. 혜옥 양. 나약한 이를 올바른 길로 선도하는 것도 물론 좋은 일이네만. 지금은 급한일이 있으니 조금 봐 주겠나?”
혀가 완전히 굳어버린 듯 말도 제대로 못하는 신지현의 모습에, 한숨을 내쉰 강태백은 살짝 손을 들어 김혜옥을 막아 세웠다.
“…뭐. 길드장님꼐서 그렇게 말하신다면 어쩔 수 없죠. 일 다 끝나고 다시 봐요. 팀장님!”
잠시 강태백과 신지현, 그리고 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김혜옥은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몸을 돌린 김혜옥이 설악 공격대원 쪽으로 완전히 합류하자, 신지현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 나왔다.
“뭐. 그건 그렇고…. 자네도 지금 당장 급한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겠지?”
“알고 말구요. 지금은 뒷수습에 신경을 써야할 순간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