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3화
…혜옥이가 아스모데우스를 몰아넣고 있어?
내가 김혜옥에게 기대했던 것은 아스모데우스의 주의를 잠시나마 끄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폭발을 뚫고 난입한 그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력을 발휘하며, 놈을 일방적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싸부님은. 내가. 지킨다앗!”
귀기 어린 포효를 토해내는 김혜옥의 두 눈에서 녹색 귀화가 폭발하듯 강렬히 불타올랐다.
그에 호응하기라도 하듯 그녀의 몸을 휘감은 에메랄드빛 광채가 점점 더 강렬해졌다.
흉악하게 불끈거리는 김혜옥의 근육이 새로운 힘을 머금고 무서운 힘을 발휘했다.
-뿌드드득!
김혜옥에게 단단히 붙들린 아스모데우스의 몸뚱이로부터, 마치 척추뼈가 통째로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다.
아스모데우스의 입에서 분수처럼 왈칵 솟구친 선홍빛 피가 새하얀 피부를 붉게 물들였다.
고혹적인 미소를 품고 있던 놈의 입이 시뻘건 피를 머금고 고통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콰쾅! 콰콰쾅!
아스모데우스의 허리가 완전히 반으로 접히려는 찰나.
놈의 두 눈이 시커멓게 물들더니, 별안간 김혜옥의 얼굴에서 폭음이 터졌다.
갑자기 터진 폭음에 김혜옥이 움찔하는 사이, 놈은 마치 한 마리 뱀처럼 스스륵 유연하게 움직이며, 강인한 근육의 구속으로부터 빠져 나왔다.
《크하하학! 그사이에 계속해서 성장하다니. 불완전하긴 하나, 역시 파편은 파편이란 것이군! 그 영감탱이들의 경고대로 어떻게든 역사에서 지워버렸어야 했어.》
필멸자 따위의 공격에 잠시나마 위기를 느꼈다는 사실이 수치스럽게 느껴진 모양인지.
근육의 구속으로부터 빠져나온 아스모데우스의 눈에서 살기가 진득하게 흘러나왔다.
반쯤 부러진 허리를 수복한 놈은 또다시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반격을 준비했다.
“엎드려!”
축 늘어졌던 아스모데우스의 손이 허공을 휘젓자. 시커먼 어둠이 불길하게 꿈틀거렸다.
유형화된 죽음이 다시 한번 김혜옥을 노리고 스멀스멀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암룡출동을 시전하며, 김혜옥에게 경고를 날렸다.
-번쩍!
라크슈마의 권능을 머금었던 외골격이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조각난 외골격의 파편들이 생명, 복수, 빛, 심판 네 가지 권능을 품고 거세게 흩날렸다.
나선형으로 꼬인 마력과 내력의 광폭하게 울부짖으며, 김혜옥을 덮쳐가는 어둠을 향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아쉽겠지만. 그래도 순서는 지키셔야지.》
-따악!
라크슈마의 권능을 머금은 암룡출동이 꿈틀거리는 어둠과 대적하려 들자.
비죽 비릿한 비웃음을 흘린 아스모데우스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경쾌한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암룡출동에 노출된 어둠이 갑작스레 시야에서 사라졌다.
《네 순서는 이 건방진 파편을 처리하고 나서다.》
-쿠르르륵!
암룡출동 앞에서 갑작스레 자취를 감췄던 어둠이 김혜옥의 바로 앞에서 다시 생성되었다.음험하게 꿈틀거리는 시커먼 어둠은 내가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김혜옥의 몸뚱이를 덮쳤다.
“아 안돼! 혜옥아!”
《아직 청산되지 못한 옛 시대의 망령이여, 무로 돌아가라!》
-우두둑! 꾸드드득!
내 간절한 외침을 외면하기라도 하듯 시커먼 어둠은 김혜옥의 몸뚱이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곧이어 시야를 뒤덮은 어둠 속에서 뼈와 살점이 뒤틀리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귓가에 들려오는 만족스러운 소리에 흡족함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이름을 부르짖는 내 모습에 만족한 것인지. 아스모데우스는 이를 드러내며 교활하게 웃었다.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아스모데우스의 눈이 승리의 미소를 머금으려는 그 순간!
“싸부님의 가르침대로오! 어둠 따윈 찢고! 부순닷!”
별안간 시커먼 어둠 속에서 김혜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아기가 옹알이하듯 불명확하던 목소리가 점점 커지며, 마지막엔 우레가 되었다.
그것을 신호로 삼아, 꿈틀거리는 어둠 속에서 녹색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녹색 빛 속에서 시커먼 어둠을 비집고 김혜옥의 우람한 두 팔이 튀어나왔다.
-부우우욱!
아스모데우스가 자랑하던 유형화된 죽음이 천조각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반으로 갈라졌다.
반으로 갈라진 어둠 속에서 큼직하게 팽창한 근육으로 인해, 평소보다 덩치가 두 배는 너끈히 됨직하게 커진 김혜옥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식하게 부풀어 오른 그녀의 근육을 위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녹색 광채가 위협적으로 번들거렸다.
《…!》
시커먼 어둠이 무슨 천 쪼가리처럼 허무하게 찢어져 분쇄되자.
그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한 아스모데우스는 할 말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입을 떡 벌렸다.
물론 초 현실적인 광경을 바라보는 내 표정 또한. 아스모데우스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성좌의 권능을 완력으로 찢어 부쉈다고? 뭐야 저거 무서워.
“크르르르…. 못 참겠다. 마족! 오래전부터 너희 족속들을 찢고 싶었어! 간다앗!”
어둠을 뚫고 아스모데우스를 노려보는 김혜옥의 안광이 더욱 강렬해졌다.
이젠 아예 인간으로조차 보이지 않는 거대한 근육질 육신이 부르르 떨리며, 무서운 폭력을 예고했다.
《유, 유형화된 죽음을 부수다니. 이, 이 무슨…!》
당황한 아스모데우스가 반응할 새도 없이, 김혜옥과 놈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흉악한 미소와 함께, 흰 이를 으스스하게 드러낸 김혜옥은 그대로 주먹을 빠르게 휘둘렀다.
-꽈앙! 꽈아앙!
김혜옥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솥뚜껑만 한 주먹이 음속을 돌파하며 폭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주먹에 이글거리는 에메랄드빛 광채가 번개처럼 강렬히 번쩍였다.
어마어마한 폭력에 갑작스레 노출된 아스모데우스의 안면이 순식간에 함몰되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목뼈가 순간적으로 쩍 소리를 내며 이상한 방향으로 꺾였다.
《파, 파편 따위가 성좌의 힘을 이길 순 없…! 크하학!》
“흠!”
완전히 안면의 골격 구조가 바뀌어버린 아스모데우스는 연신 숨을 할딱거리며, 불신에 찬 어조로 무언가를 말하려 들었지만.
김혜옥은 놈이 뭐라 지껄이든 상관하지 않고, 그대로 크게 자신의 머리를 뒤로 젖히더니.
나무 밑동처럼 강인하게 부풀어 오른 목 근육을 이용해 그대로 놈의 안면을 들이받았다.
-꾸꽈앙!
김혜옥의 머리가 아스모데우스의 두개골을 결딴내자, 마치 벼락이 내리꽂는 듯한 소리가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살기가 번들거리던 놈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힘을 잃고 엉뚱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목뼈가 안쪽으로 완전히 함몰되어, 매혹적이었던 외모가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몰골로 거듭나 버렸다.
“끄아아압! 마족! 찢고 부순다앗!”
-뿌좌자자작!
괴상한 포효를 질러대는 김혜옥의 눈동자가 완전히 녹색으로 물들었다.
아스모데우스의 머리와 다리를 동시에 잡고 용을 쓰는 그녀의 몸에서 녹색 광채가 치솟았다.
순식간에 시야를 가득 채운 녹색의 빛무리가 반딧불처럼 하늘하늘 날아와, 내 몸에 닿은 순간!
「영웅시 『라크슈마』가 종료됩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시대의 파편』이 『새로운 시대의 그릇』과 반응합니다.」
「사용자 『김혜옥』에게 깃든 『잃어버린 시대의 파편』을 획득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시대의 파편』에 각인된 기억에 따라, 영웅시 『가네샤』가 잃어버렸던 신성을 일부 되찾습니다.」
갑작스레 라크슈마의 영웅시가 종료 되며, 내 몸에 깃들었던 그녀의 권능이 사라졌다.
곧이어 완벽하게 녹색으로 물든 시야 속에서 알 수 없는 시스템 메시지가 주르륵 출력되었다.
머릿속을 타고 까마득한 고대의 기억이 솟구쳤다. 정체를 모를 힘이 내 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잊혀진 자들의 영웅시의 효과에 따라, 서사시 『가네샤』가 잊혀진 신의 힘과 권능을 노래합니다.」
놀랍게도 튜토리얼 타워에서 획득했던 영웅시 『가네샤』가 전혀 다른 형태로 진화해버렸다.
망각의 사슬에 얽매여, 베일에 싸여있던 위대한 신의 기억이 무의식 속에서 솟구쳤다.
마력, 내력, 차크라 등으로 정의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내 몸 속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우두둑!
강력한 기운이 내 몸을 휘감기 시작하자, 단단한 강화 외골격이 종잇장처럼 힘없이 찢어졌다.
찢어진 강화 외골격 아래로, 김혜옥과 비견할 수 있을 만큼 탄탄한 근육이 모습을 드러냈다.
라크슈마의 힘을 머금었던 외골격이 전혀 새로운 힘을 품고, 새로운 형태로 쭉쭉 자라났다.
《…그릇이 파편의 힘을 흡수했다고?》
여전히 김혜옥의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붙잡혀 있던 아스모데우스의 입에서 탄식이 터졌다.
위협을 느낀 놈의 몸이 자연스레 반응한 것인지, 아스모데우스의 몸에 깃든 신력이 더욱 강렬해졌지만.
내 몸에서 솟구친 빛에 비하면, 그것은 반딧불보다도 못한 수준이었다.
“그랬구나. 그래서 혜옥이가 그렇게 강한 것이었어.”
잊혀진 성좌의 기억, 그중에서도 지혜를 담당했던 가네샤의 기억이 머릿속에 흘러들어오자.
아스모데우스가 주구장창 떠들었던 ‘파편’이 무엇인지,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졌는지 등등의 의문이 모조리 해소되었다.
솟구친 빛 속에서 새로운 힘을 만끽한 나는 아스모데우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자애롭게 웃었다.
“당신들도 이 불합리한 순환 속에서 참으로 많은 준비를 했군. 인과율의 눈을 피해 이렇게나 많은 안배를 해뒀다니. 대단하긴 하단 말이지.”
사방을 휩쓴 자애로운 기운이 점점 세상을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벌벌 떠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스모데우스의 눈도 절망과 두려움을 품고 회색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우리 사이에 아직 청산할 것들이 많이 남아있지?”
두려움에 완전히 회색빛으로 변해버린 아스모데우스를 바라본 나는 너무도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내 몸에서 비롯된 신력이 놈과 김혜옥의 몸뚱이를 가볍게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