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2화
혜옥이라고?
산산이 부서진 유리창을 뚫고 이쪽으로 난입해온 근육질 몸뚱이.
귀를 쿵쿵 울리는 굉음을 뚫고 우렁차게 들려온 목소리는 분명 김혜옥의 것이었다.
“혜, 혜옥이 네가 어째서?! 분명 내가 아래에서 대기하라고 했잖…?”
“다음엔 반드시 지켜드리겠다고 했잖아요!”
만감이 교차하는 당황 섞인 반응 속에서 내 말을 끊은 김혜옥은 당당히 내 옆으로 다가왔다.
전신에서 에메랄드빛을 뿜어내는 그녀의 눈에선 무엇보다 굳건해 보이는 결의가 느껴졌다.
나를 위해서라면 어떤 공격이라도 받아낼 수 있다는 다짐이 꿈틀거리는 근육에서부터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미치겠군.
날 ‘지켜 주겠다.’는 그녀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지금은 때를 잘못 골랐어. 상대가 좋지 않아도 너무 좋지 않아!
그동안 김혜옥이 보여준 무력은 확실히 ‘평범한’ 헌터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은 것이었다.
치유사 계통이라는 특성 트리가 무색하게, 그녀는 순수하게 강한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육체는 강인했고, 정신 또한 범인의 경지를 훌쩍 뛰어넘을 정도였지만….
상대는 성좌의 ‘격’을 일부나마 다시 손에 넣은 아스모데우스였다.
약간이지만 성좌의 힘을 되찾은 탓에, 놈은 이미 필멸의 영역을 한참이나 초월해버린 상태.
아무리 김혜옥의 뜻과 의지가 대단하다곤 해도, 그녀가 놈을 상대하기란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것과 별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아니, 그런 수준을 넘어. 오히려 내가 놈을 상대하는 데 방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다.
“네 뜻은 잘 알겠지만. 혜옥아 지금의 네겐 무리….”
이를 까득 깨문 나는 어둠달을 들어 올려, 김혜옥의 앞을 막아서려 들었지만.
내가 미처 그녀를 막아서기도 전에 김혜옥은 근육에 뒤덮인 팔을 뻗어 내 어깨를 붙잡았다.
어깨를 붙잡은 그녀의 손에서 강한 의지와 고집이 느껴졌다.
“싫어요. 싸부님. 무리하고 계시는 건 싸부님 쪽도 마찬가지잖아요?”
따뜻한 목소리와 함께, 내 어깨를 붙잡은 김혜옥의 손이 에메랄드빛으로 물들었다.
어쩐지 훈훈해지는 기분이 들며, 미처 재생하지 못했던 상처들이 스르륵 치유되었다.
“어차피 싸부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거리에서 비참하게 죽었을 몸이에요. 그런 제가 마지막 순간이나마 싸부님께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
김혜옥은 해맑게 히죽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순수하게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동자엔 이미, 죽음을 각오한 자 특유의 결의가 굳건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깨를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그녀의 마력에서도 진심이 느껴졌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놓쳐버렸던 전 시대의 파편마저 제 발로 내 앞에 나타날 줄이야. 오늘은 운이 아주 좋군.》
김혜옥의 진심에 뭐라 답변하려던 찰나. 음험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웅웅 울렸다.
때아닌 사제 간의 정을 감상하던 아스모데우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기이한 말을 뇌까렸다.
어째선지 초승달 모양으로 음험하게 휘어진 눈에선 숨길 수 없는 기쁨이 아스라이 느껴졌다.
놈의 비죽 내민 새빨간 혀가 요염하게 움직이며 아랫입술을 퇴폐적으로 핥았다.
《끝없이 이어진 순환 속에서 계속 살해되었던 ‘파편’이 ‘그릇’을 만나 살아남았다니. 그리고 그로 인해 내게 한날한시에 동시에 살해당한다니. 이 또한 얄궂은 운명이로군.》
…혜옥이가 파편이라고? 순환 속에서 계속 살해당해왔어?
아스모데우스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제멋대로 연달아 지껄였다.
도대체 무엇이 놈에게 그리 강렬한 희열을 선사해주는 것인지, 아스모데우스는 계속해서 아랫입술을 핥으며 음침하게 킬킬 웃었다.
‘내가 시선을 끌 테니. 물러서서 놈의 사각을 노려봐.’
‘사각을 노려요? 아무튼, 저 재수 없는 아줌마가 다른 곳을 보는 사이에 공격하란 소리죠?’
‘그래.’
김혜옥이 제멋대로 난입한 이상, 또 되돌려 보내기엔 그녀의 의지가 강력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최대한 그녀의 전력을 어떻게든 써먹는 수밖에.
황홀한 표정으로 얼굴을 감싼 아스모데우스가 혼자서 기이한 열락에 빠진 사이, 나는 은밀하게 김혜옥에게 지시를 내리곤 어둠달을 다시 들어 올렸다.
등 뒤에 돋아난 라크슈마의 팔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어둠달의 창날과 나의 외골격에 필멸의 영역을 뛰어넘은 힘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부우우웅!
-파츠츠츠츠!
네 가지 기운이 나선형으로 소용돌이치는 어둠달이 웅웅 떨리며, 벌떼 우는 소리를 내었다.
네 가지 기운을 구름처럼 휘감은 외골격이 쉴새 없이 점멸하며 강력한 파괴력을 머금었다.
그렇게 라크슈마의 기운을 휘감은 나는 운룡보를 운용하며, 은밀하게 아스모데우스의 배후로 파고들었다.
《안 되겠다. 어서 처리하고 그 영감탱이들의 얼굴이 일그러진 꼬라지를 즐거이 감상해야지.》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채, 킥킥거리며 웃던 아스모데우스가 순간적으로 크게 발을 굴렸다.
-쿠르르릉!
엄청난 충격에 건물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비싼 돈을 투자해 시공한 바닥이 보기 흉하게 쩌적 갈라지며, 시커먼 무언가가 솟구쳤다.
삐걱 고개를 내 쪽으로 기괴하게 꺾은 아스모데우스의 눈이 선명한 붉은 색으로 빛났다.
《우선은 우리 귀여운 그릇부터. 맛봐볼까?》
히죽 웃은 아스모데우스는 천천히 내 쪽을 향해 양손을 들어 올렸다.
기이할 정도로 새하얀 손가락이 마치 교향악단의 지휘자처럼 우아하게 허공을 수놓았다.
그러자 바닥에서 솟구친 시커먼 어둠이 내 몸을 노리고 사방에서 덮쳐오기 시작했다.
-피슛! 피슛! 피슛!
네 개의 기운을 두르고 번개처럼 휘둘러진 어둠달이 순식간에 시커먼 어둠을 꿰뚫었다.
하지만 뭉클거리며 다가온 어둠은 언제 꿰뚫렸냐는 듯, 금방 원래대로 메꿔졌다.
아스모데우스가 불러들인 어둠은 물리적인 법칙을 완전히 무시하며, 지독한 죽음의 기운을 흩뿌렸다.
-콰콰쾅!
맞부딪혀보니 알겠다.
아스모데우스가 불러들인 어둠은 실체를 지닌 죽음의 권능이었다.
단순히 뭉글거리는 마력처럼 보였지만, 밀도부터 시작해서 파괴력 자체가 차원이 달랐다.
정면에서 정직하게 맞선다면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나는 즉시 땅을 박차 하늘로 몸을 띄웠다.
《그따위 단순한 몸놀림으로 내 눈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나? 귀엽군.》
환골탈태의 영향으로 강인해진 신체 능력과 라크슈마의 권능으로 인해.
내 움직임은 순간적으로 음속을 뛰어넘었지만, 아스모데우스는 피식 웃으며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놈의 주변을 망토처럼 휘감은 시커먼 어둠이 나를 쫓아, 하늘로 쭉 솟구쳤다.
솟구쳐 올라온 어둠이 내 목숨을 노리며 막 조여들려던 그 순간!
-콰아아앙!
기회를 엿보던 김혜옥이 번개처럼 달려들어 주먹을 내질렀다.
그녀의 무식한 주먹이 아스모데우스의 머리를 강타하자, 사무실 전체를 우르르 흔들 정도로 커다란 소리가 퍼졌다.
헤실헤실 웃으며 나를 바라보던 아스모데우스의 머리가 순간적으로 우두둑 꺾였다.
《…제법 주먹이 맵군. 아직 미숙하긴 해도 파편은 파편이라는 건가?》
아스모데우스는 피식 웃으며 침을 퉤 뱉으며, 김혜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김혜옥은 그의 감탄에 별달리 반응하지도 동요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녀는 전신의 근육에 힘을 모아, 무자비한 주먹의 세례를 뿌려낼 뿐이었다.
-콰쾅! 콰쾅! 콰콰쾅!
에메랄드빛으로 물든 김혜옥의 주먹이 아스모데우스의 육신을 후려 갈길 때마다.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굉음이 연달아 터졌다.
하지만 그런 폭력적인 주먹의 세례 속에서도 아스모데우스는 상처 하나 없었다.
《하찮군. 너무도 하찮아. 역시 파편의 힘으로 인간을 초월해보았자 인간은 결국 필멸의 영역에서 벗어나질 못했군.》
김혜옥을 바라보며 아스모데우스가 비웃듯 입꼬리를 뒤틀자.
어둠이 그녀의 거대한 육신을 덮쳤다. 사방에서 순식간에 밀려든 죽음이 김혜옥의 목숨을 앗아가기 위해 흉험하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쿠르르릉!
김혜옥이 잠깐 동안 시간을 끌어준 사이.
광룡광림이 그 강력한 파괴력을 뿜어낼 준비를 완료하였다.
김혜옥의 육신을 시커먼 어둠이 뒤덮기 바로 직전! 하늘에서부터 강림한 새하얀 빛의 용이 아스모데우스의 몸뚱이를 집어삼켰다.
-파지직! 파지지직!
라크슈마의 네 가지 권능을 머금은 용의 송곳니와 어금니가 아스모데우스의 육신을 부쉈다.
그렇지 않아도 강력한 광룡광림의 파괴력이 라크슈마의 권능과 맞물려 순간적으로 필멸의 영역을 아득히 뛰어넘은 파괴력을 발휘했다.
-쿠오오오오!
라크슈마가 관장하는 네 가지 권능을 머금고 빛의 용이 광포한 포효를 토해냈다.
신들조차도 두려움에 빠질 듯, 악마들조차 절망을 노래할 듯 파멸의 기운을 머금은 포효가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품고 길드장실 전체를 강타했다.
《….》
엄청난 파괴력의 향연 속에서 오만하게 지껄이던 아스모데우스의 입이 조개처럼 다물어졌다.
하늘이 타올랐다. 땅이 갈라졌다. 바람이 산산히 분해되며 곡소리를 토해냈다.
-꽈아아앙!
곧이어 김혜옥의 거대한 주먹이 아스모데우스의 몸뚱이를 향해 무자비하게 내리꽂혔다.
폭탄이 스무 개는 동시에 터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빛속에서 놈의 육신이 크게 들썩거렸다.
단단한 갈비뼈 한쪽이 부러지다 못해, 아예 모조리 으스러지며, 가루가 되어버렸다.
-번-쩍!
어마어마한 충격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눈이 멀어버릴 듯한 에메랄드빛이 온 시야를 밝게 물들였다.
그동안 타인의 육신을 치유하던 기운이 파괴력을 머금고, 이번엔 철저히 파괴를 행했다.
《흐허헉! 커헉! 카학!》
파괴의 향연에 노출된 아스모데우스의 몸이 정신없이 떨리며, 비명이 토해졌다.
기침하듯 비명을 토해낸 몸이 갓 건져낸 생선처럼 거칠게 퍼덕거리자.
김혜옥은 있는 힘껏 놈의 몸뚱이를 붙잡고 그대로 조여대기 시작했다.
“으르아아아아!”
-우직! 우지지직!
마치 아나콘다가 먹이를 포식하듯, 김혜옥의 눈이 녹색으로 격렬하게 타올랐다.
아스모데우스의 가녀린 육신이 부르르 떨리며, 섬뜩한 소리를 연속해서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