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8화
주변을 수색한 끝에, 찾던 것을 찾아낸 나는 구석에 처박힌 유리병을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좁은 계단에서 요란하게 싸운 덕에 혹시나 손상되지 않았을까 싶어, 집어 든 유리병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지만.
갈라진 틈 사이에 절묘하게 끼어있던 탓인지, 유리병은 약간의 기스가 난 것만 빼면 멀쩡해 보였다.
실험실의 표본 같은 꼴이 되어 꿈틀거리는 강태백과 설악 공격대원들 또한, 별다른 상해를 입은 것 같진 않아보였다.
-쿠콰콰쾅!
“싸부님! 제가 왔어요! 우리 싸부님 곁에서 물러서! 이 못생긴 닭대가리 놈아!”
머릿속에 떠오른 마하가라의 지식에 따라, 그들에게 빼앗긴 시간을 되돌려 주려던 찰나.
별안간 폭음과 함께, 부서진 파편들로 막혀있었던 철문이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그로 인해 발생한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평소보다 유난히 비장한 목소리의 김혜옥이 괴이한 안광을 불태우며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라? 그 못생긴 닭대가리는….”
흉흉한 안광을 뿜어내며, 혀를 날름거리던 김혜옥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의문이 서렸다.
폐허로 변해버린 계단을 이리저리 살피는 그녀의 고개가 갸웃거리듯 살짝 기울어졌다.
선명한 녹색 안광이 번쩍이는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마하가라의 행방을 찾았다.
“빨리도 왔다. 그 마족 놈은 당연히 네 스승 되시는 분께서 이미 해치워 버린 지 오래지!”
“네에? 상길이 아저씨 위쪽에 던져두고…. 아, 아니 모셔두고 바로 뛰어온 건데. 벌써요?!”
마하가라를 쓰러뜨렸다는 말에 김혜옥의 눈에서 안광이 사라지며,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졌다.
거의 어지간한 탱탱볼만큼 커진 그녀의 눈동자엔 경악과 아쉬운 감정이 혼재되어 있었다.
마하가라를 쓰러뜨리는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흐른 것으로 기억하는데 말이지.
얘는 갑자기 왜 이렇게 새삼스러운 헛소리를…. 아. 맞다. 시간이 왜곡되어 있었구나.
‘금방’ 뛰어왔다는 김혜옥의 반응에 순간적으로 의문이 뇌리를 스쳤지만.
머릿속을 주황색으로 물들인 마하가라의 기억과 지식이 곧바로 자연스럽게 해답을 내놓았다.
앞선 전투에서 마하가라가 시간을 제멋대로 가지고 왜곡시켜 버렸기에, 내가 체감한 것과 실제 흐른 시간 사이엔 큰 차이가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호들갑을 떠는 김혜옥의 말처럼, 나와 마하가라의 전투는 기껏해야 5분 남짓한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상길이 아저씨 말로는 진짜 진짜 강한 놈이라는데. 역시 싸부님이세요! 그렇게 강한 놈을 이렇게나 빨리 쓰러뜨리시다니! …이번엔 정말 도와드리고 싶었는데.”
계단 전체가 무너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우렁찬 김혜옥의 호들갑이 갑자기 뚝 멈췄다.
이번에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리도 미안한지, 그녀의 표정이 어미 앞에서 사냥에 실패한 새끼 너구리처럼 급속도로 시무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아냐. 적절한 타이밍에 부상자를 데리고 빠져줘서. 내가 전투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어. 충분한 도움이 됐다. 혜옥아.”
“…고마워요. 싸부님. 하지만. 다음엔 정말로! 꼭! 싸부님을 지켜드릴게요!”
김혜옥의 우람한 어깨가 평소답지 않게 축 처지자.
나는 손을 위쪽으로 쭉 뻗어,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내 격려를 받은 김혜옥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힘없이 웃더니, 이내 눈에서 다시금 형형한 녹색 안광을 뿜어내기 시작했다.주인의 결의에 감응한 그녀의 근육이 활기를 되찾고 흉악하게 꿈틀거렸다.
“맹세의 포즈! 사이드 체스트! 흐아아압!”
김혜옥은 맹세의 포즈랍시고 팔을 힘껏 조여, 자신의 근육을 과시하듯 드러냈다.
그녀의 두 눈에서 이글거리는 횃불 같은 녹색 안광을 마주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강인한 아이답게, 회복이 빨라서 좋긴 한데. 가끔은 저러는 게 조금 부담스럽단 말이지.
자신의 다짐을 보디빌딩 형태로 나타내는 김혜옥에게서 시선을 뗀 뒤.
나는 집어 들었던 유리병을 열어, 태아 형태로 돌아간 강태백과 설악 공격대원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싸부님? 그 징그러운 것들은 뭐예요?”
“징그럽다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길드장님께 못하는 말이 없어.”
“…예? 이게. 아, 아니 이분이 길드장님이라구요?”
태아와 유사한 형태로 꿈틀거리는 괴생명체들의 정체를 들은 김혜옥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결의를 되찾고 이글거리던 녹색 안광이 다시 그녀의 눈에서 사라졌다.
어린 송아지와도 같은 순박함을 간직한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사, 상길이 아저씨가. 다른 분들이 모두 당해버렸다곤 했는데. 설마 이, 이렇게…. 어, 어쩌죠?! 이, 이걸 어떻게든 치료해야….”
패닉에 빠진 김혜옥은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하기 시작했다.
그녀 나름대로 ‘치료’를 준비하는 것인지, 김혜옥의 몸 전체가 에메랄드빛으로 물들었다.
당황한 기색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녀의 근육이 흉흉하게 불끈거리기 시작했다.
“안심해. 내가 해결할테니까. 놈과의 전투에서 제법 쓸만한 능력을 손에 넣었거든.”
“싸, 싸부님이요?”
「잊혀진 자들의 영웅시의 효과에 따라, 영웅시 『마하가라』가 잊혀진 영웅의 힘과 권능을 노래합니다.」
「사용자님이 보유한 마력에 따라, 영웅시 『마하가라』의 효과는 『24시간』 동안 지속됩니다.」
히죽 웃으며 김혜옥의 앞을 가로막은 나는 즉시, 마하가라의 영웅시를 발동시켰다.
영웅시가 발동되자, 무의식의 저편에서부터 솟아오른 주황색 마력이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투둑! 투두둑!
모든 것을 주황빛으로 물들인 빛의 향연 속에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외골격 뒤편에서 빛을 내뿜는 둥그스름한 고리가 돋아났다.
동시에 금빛 외골격이 주황빛으로 물들며, 어깨죽지에서 거대한 빛의 날개가 자라났다.
그렇게 시간을 조율하는 신, 마하가라의 권능을 두른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설악 공격대원들을 향해 손을 뻗으며 시간의 권능을 끌어올렸다.
-키이이이잉!
시간의 권능이 담긴 주황색 마력이 내 몸을 타고 흐르자.
주황빛 마력에 휘감긴 설악 공격대원들의 육신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등 뒤에 떠오른 빛의 고리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맹렬히 회전했다.
활짝 펼쳐진 날개가 천천히 펄럭이며, 왜곡된 시간을 바로잡기 시작했다.
-파아아앗!
빼앗겼던 시간을 되찾은 이들의 육신이 순식간에 쑥쑥 자라나,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눈이 멀어버릴 듯, 찬란한 빛 속에서 남자들의 벌거벗은 육신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참으로 성스러우면서도 더럽기 짝이 없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꺄, 꺄아아악!”
시커먼 남정네들의 털이 숭숭난 육신이 민망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자.
경외심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내가 행하는 이적을 바라보던 김혜옥의 입에서 순간적으로 비명이 터졌다.
괄괄한 그녀답지 않게, 이번엔 다분히 소녀의 감성이 잔뜩 묻어있는 목소리가 계단 전체를 우르릉 울렸다.
…아 맞다. 혜옥이 얘, 저래 보여도 섬세한 사춘기 소녀였지.
“도,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허윽?!”
“외설물 척결 펀치!”
순간적으로 섬세하지 못했던 나의 판단을 자책하려던 찰나.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일어난 설악 공격대원의 몸에 김혜옥의 주먹이 틀어박혔다.
-빠각!
뭔가가 심각하게 잘못된 소리가 울려 퍼지며.
기껏 정신을 차린 설악 공격대원의 입에 허연 게거품이 부글부글 올라왔다.
“으아아아! 어떡해! 어떡해애애!”
정적이 찾아온 계단에 서럽게 울부짖는 김혜옥의 목소리가 우렁우렁하게 우렁우렁하게 울려 퍼졌다.
*****
“…면목이 없군. 어째 자네에게 유독 해괴한 꼴을 보이는 것 같네만….”
한바탕의 소란이 지나가고 난 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은 강태백은 민망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평소보다 더욱 왜소해 보이는 그의 몸엔 오닉스 길드에서 강탈해온 강화 외골격 대신, 김혜옥이 어디선가 공수해온 청소용 작업복이 걸쳐져 있었다.
“아닙니다. 상태가 나빴을 뿐이죠.”
…그러게. 어째선지 내가 회귀한 뒤, 유난히 이런 식의 수난을 많이 겪는 것 같군.
민망한 감정 속에서도 아슬아슬하게 수장의 위엄을 지키려는 강태백의 모습은 안쓰럽기 그지 없었다.
그의 안쓰러운 모습에 쓴웃음을 지은 나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강태백에게 위로를 건넸다.
“시간을 다루는 고약한 상대였어. 전력을 끊는 데는 성공했지만. 놈에게 장난감 신세가 되어버렸지 뭔가.”
“예. 정말이지 까다롭기 짝이 없는 상대긴 하더군요.”
“난 괜찮으니. 괜히 겸손한 소리 하지 말게. 그 까다로운 상대를 혼자서 퇴치한 것이 자네 아닌가.”
내 위로에 쓰게 웃은 강태백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돌아온 것을 보니, 마력원 쪽도 해결한 것 같군. 회포를 나누고 싶긴 하나. 지금은 자네도 알다시피 그럴 때가 아닐세.”
“예. 아직 한 놈이 남기도 했고, 그들을 구해야 하니까요.”
이제 남은 것은 길드장실에 도사린 ‘그놈’ 아모스 뿐이었다.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지, 마하가라의 기억에 의하면 놈은 어째선지 혼자서 드넓은 길드장실을 지키고 있는 상태였다.
…거기에. 신지현을 포함한 인사팀원들을 가둬 둔 것은 덤이고 말이지.
아모스가 어째서 신지현을 굳이 길드장실에 가둬놨는지는, 마하가라의 기억으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마하가라와 바알제불의 기억을 아무리 뒤적여봐도, 아모스의 행적 자체가 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악연은 마무리 지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