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6화
품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녹색 광채가 뿜어져 나옴과 동시에, 엄청난 고통이 엄습해왔다.
마치 산 채로 갈비뼈를 뽑아내는 듯 강렬하기 짝이 없는 고통에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고통 속에 이성이 뚝 끊긴 듯 마비되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의 사고가 일순간 정지했다.
-뿌드드득!
뼈가 박살 나는 소리, 근육이 끊어지는 소리, 피부가 찢어지는 소리!
가슴팍에서 울려 퍼진 섬뜩한 소리가 정지되었던 사고를 다시 현실로 불러왔다.
갈비뼈가 안쪽으로 우지끈 부러져 함몰되더니, 주먹 크기만 한 구슬이 지나갈 길을 만들었다.
그 길을 타고 품속에 고이 넣어뒀던 체체파리 클랜의 신물, 『부패와 타락의 오브』가 휘황한 빛을 내며 심장 속으로 파고들었다.
-두근! 두-근!
펄떡이는 심장이 『부패와 타락의 오브』와 융합하기 시작했다.
오브와 융합된 심장이 느릿하게 맥동할 때마다, 암녹색 광채가 주변을 암울하게 물들였다.
음울하게 뻗어 나간 마력이 주변을 잠식한 라가하마의 주황색 마력을 제멋대로 뒤틀었다.
《…뭐, 뭐야?! 어째서 시간이 내 의지를….》
주황색 마력이 완전히 뒤틀리자, 시간을 주무르던 라가하마의 권능이 놈의 제어를 벗어났다.
가학적인 표정으로 오만하게 나를 응시하던 놈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의 감정이 번졌다.
시간을 멋대로 주무르던 자칭 시간의 군주가 우습게도 폭주한 자신의 권능 속에 갇혀버렸다.
움직임을 완전히 멈춘 라가하마의 눈동자가 불안한 의구심을 품고 데굴거렸다.
-파지지직!
뒤틀린 시간 속에서 심장과 완벽하게 융합된 『부패와 타락의 오브』가 녹색 전하를 내뿜었다.
그것을 신호로 삼아, 허공에서 희끄무레한 형체의 무언가가 소환되기 시작했다.
녹색의 안개를 구름처럼 휘감은 두 개의 형체엔 어마어마한 마력이 아지랑이처럼 너울거리고 있었다.
“…이건?”
내 눈앞에 소환된 형체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체체파리 클랜의 나머지 두 신물이었다.
원시적인 날붙이의 형태를 띤 채, 섬찟한 악의를 머금은 『원한과 증오의 전쟁 검』.
주술적인 제사용 거울의 형태를 띤 채, 흐릿한 안개를 머금은 『회한과 몰락의 거울』.
가상의 공간 속에서 체체파리 클랜의 주인, 바알제불에게 양도받았던 두 개의 신물이 어째선지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내 눈앞에 나타났다.
-뿌드드득!
소환된 두 개의 신물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별안간 내 심장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투박하기 짝이 없는 날붙이가 갈비뼈를 반으로 쪼개며, 거침없이 심장으로 틀어박혔다.
둥그스름한 의식용 거울이 근육과 살점을 엉망으로 짓뭉개며, 심장 속으로 흡수되었다.
-두근! 두근! 두근!
세 개의 신물을 모두 흡수한 심장이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세차게 맥동했다.
심장이 한번 맥동할 때마다, 온몸의 혈관을 타고 음울한 녹색 마력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필멸의 영역을 초월한 마력의 소용돌이 속에 활짝 열린 가슴팍을 포함한 전신의 상처들이 순식간에 재생되었다.
-투두둑!
아니, 그저 단순히 상처가 재생된 수준이 아니었다.
곤충이 낡은 껍데기를 버리고 전혀 다른 존재로 우화하듯, 극적인 변화가 내 몸에 일어났다.
내 몸을 타고 흐르던 시커먼 내력과 심장에 퍼져나간 암녹색 마력이 나선 형태로 꼬아졌다.
나선 형태로 꼬인 마력과 내력이 근육, 살점, 뼈, 세포 하나하나에 농밀하게 깃들었다.
마력과 내력을 머금은 뼈가 쭉쭉 자라나, 전투와 투쟁에 가장 적합한 새롭게 자리를 잡았다.
근육이 압도적인 파괴력을 머금고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덜어내듯 가늘게 압축되었다.
곤충이 허물을 벗듯, 낡은 피부가 주르륵 벗겨지며 뽀얗고 강인한 피부가 새로이 돋아났다.
위철용이 계속해서 찬양해온 궁극의 경지, 무인이라면 누구나 꿈꾼다는 전설의 경지.
『환골탈태』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 내 육신을 빌어 현실에 재림한 것이었다.
낡은 태를 벗어던진 육신을 타고 어마어마한 힘이 폭발하듯 꿈틀거렸다.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찢고 부술 수 있을 듯한 파괴적인 자신감이 팽배해졌다.
-띠릭!
온몸에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힘의 폭풍을 만끽하고 있으려니.
갑작스럽게 시야가 정신없이 깜빡이며, 시스템 메시지가 폭주하듯 주르륵 출력되었다.
「『잊혀진 자들의 영웅시』에 새로운 영웅시 『바알제불』이 등록됩니다.」
…결국은 그도 낙오자 취급인가?
눈앞을 물들인 시스템 메시지의 내용은 새로운 영웅시 『바알제불』이 습득되었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마족들에게 힘과 권능을 상당수 빼앗긴 탓인지, 한때 성좌였던 바알제불은 다른 영웅시처럼 몰락해버린 ‘잊혀진 자’로 취급되는 듯했다.
「축하합니다! 잊혀진 자, 『바알제불』이 남긴 파편을 모두 획득하셨습니다.」
「영웅시 『바알제불』와의 결속이 대폭 강화됩니다.」
바알제불이 이 세상에 남긴 세 가지 신물들을 모조리 흡수해서일까?
새로운 영웅시를 습득했다는 메시지에 더불어, 생전 처음 보는 내용이 출력되었다.
바알제불이 남긴 파편을 모두 흡수하여, 그의 영웅시와의 결속이 대폭 강화되었다는 것.
하지만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의문을 떠올릴 새도 없이, 새로이 습득한 영웅시 『바알제불』의 지식과 기억이 무의식의 저편에서부터 폭발하듯 터져 나와, 내 머릿속을 암녹색으로 물들였다.
「잊혀진 자들의 영웅시의 효과에 따라, 영웅시 『바알제불』이 잊혀진 영웅의 힘과 권능을 노래합니다.」
「강화된 결속에 따라, 영웅시 『바알제불』의 효과는 영구적으로 지속됩니다.」
…그렇군. 결속이 강화되었다는 것은 이런 것이었나.
바알제불의 기억이 머릿속에 떠오름과 동시에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영웅시가 발동되었다.
영웅시의 힘으로 바알제불의 기억과 지식을 모조리 습득한 데다, 그가 남긴 신물을 구성하던 암녹색 마력이 완전히 내 몸의 일부가 되었기에.
영웅시가 발동했음에도 지금의 내 몸뚱어리엔 어떠한 변화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원래 그러했던 것처럼 바알제불의 권능을 자연스럽게 쓸 수 있을 뿐이었다.
-콰차창!
유리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꼐, 별안간 뒤틀린 시간이 다시 순리대로 흐르기 시작했다.
시간의 군주라는 위엄에 걸맞게, 라가하마는 마력을 수복하여 자신을 가뒀던 시간을 통째로 부숴버린 모양이었다.
《머리가 그렇게나 길다니…. 무슨 잔재주를 부려서 나를 그토록 오래 봉인했는지 모르겠는데. 마지막 발악치곤 꽤 괜찮았어. 뭐, 그것도 이젠 별 의미가 없겠지만.》
뒤틀린 시간에서 탈출한 라가하마는 손을 툭툭 털어내며, 비웃듯 부리를 고약하게 뒤틀었다.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눈에 살기가 어렸다. 주황색 마력이 포효하듯 흉포하게 꿈틀거렸다.
놈이 들어 올린 뾰족한 손톱에 시간을 조율하는 권능이 아스라이 맺히기 시작했다.
“….”
그 광경을 느릿하게 바라본 나는 말 없이 손을 들어 올렸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무력하게 손을 들어 올린 행위에 지나지 않아 보였지만.
그 속엔 마력과 내력이 얽히고 얽힌 나선형의 소용돌이가 흉포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바알제불이 지닌 힘과 권능이 어둠을 흩뿌리며, 암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이제 변수 따윈 없다!》
쩌렁쩌렁한 고함과 함께, 라가하마의 손가락에서 농밀한 주황색 마력이 내게 폭사되었다.
시간을 다루는 권능이 담긴 마력이 주변의 시간을 엉망으로 왜곡하며 내게 날아들었다.
그렇게 놈이 발사한 시간의 권능이 내 육신을 제멋대로 다루려는 그 순간!
-빠직.
슬쩍 들어 올렸던 손에서 암녹색 빛이 번쩍였다.
부패와 타락의 권능을 품은 마력이 무겁게 용틀임하며 전방을 어둡게 물들였다.
나를 향해 살벌하게 날아들던 주황색 마력이, 삽시간에 암녹색 마력에 잡아먹혔다.
어둠 속에서 시간을 제멋대로 주무르던 라가하마의 마력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버렸다.
《…너, 너 그, 그것은 설마!》
“네 짐작대로다. 모든 것을 부패시키고 타락시키는 그의 권능은 시간을 다루는 권능마저 집어삼키기 마련이지….”
바알제불이 지닌 권능 중 ‘타락’의 권능은 실로 무서운 효과를 지닌 것이었다.
지능과 기억을 잃어버린 그는 단순히 그것을 육신을 뒤틀고 왜곡시키는 데에 할애했지만.
타락의 진정한 권능은 바로, 모든 것을 ‘비틀고 왜곡시키는’ 것에 있었다.
암녹색 타락의 권능에 집어 삼켜진 라가하마의 마력은 뒤틀리고 왜곡되어 허무하게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마, 말도 안 돼. 놈은! 그 저주받은 파리놈은! 분명히 우리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채로 비참하게 영락했단 말이다!》
라가하마는 발작하듯 고개를 흔들며, 현실을 부정하려 들었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영혼은, 정신은 영웅시에 깃든 바알제불의 편린을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내게서 바알제불이 지녔던 권능을 읽어낸 라가하마의 몸이 공포에 질려, 바르르 떨렸다.
“그러고 보니. 너였군. 그를 유독 두려워하여 핍박했던 자가.
공포에 질린 라가하마의 눈빛을 바라본 순간. 바알제불의 기억 속에 화인처럼 틀어박힌 응어리가 내 머릿속에 천천히 떠올랐다.
바알제불의 힘과 권능을 흡수했던 마족 중에서도, 특히나 그를 두려워했었던 라가하마는 유독 지독하게 바알제불을 학대하고 조롱했었다.
머릿속에 활화산처럼 난폭하게 들끓어 오르는 바알제불의 울분을 음미한 나는 이를 드러내며 차갑게 웃었다.
“영락하기 전에도 네놈은 그를 유독 두려워했었지. 그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영락해버린 뒤로도 과거의 공포에선 벗어나지 못했던 모양이야.”
모든 것을 뒤틀고 왜곡시키는 타락의 권능에 비하자면.
불멸의 시간을 살아가는 성좌들의 입장에선 시간을 다루는 것 따윈 하찮은 잡기에 불과했다.
때문에, 라가하마, 아니 영락하기 전 ‘마하가라’라는 이름의 성좌로 불렸던 시절에도 놈은 유난히 바알제불의 권능을 지나칠 정도로 경계하며 두려워했었다.
바알제불이 다른 마족들보다 라가하마에게 유난히 울분을 느끼는 이유 또한, 몰락의 순간 뒤늦게 떠올랐던 과거의 기억 때문이었다.
과거에 자기 앞에서 유난히 설설 기며 비굴하게 조아리던 놈에게 그런 수모를 겪었으니 말이지.
《무, 무슨 헛소리를! 어디서 운 좋게 놈의 편린을 주워 먹은 모양이지만! 필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네놈이 그 강대한 권능을 얼마나 다룰 수 있겠느냐!》
라가하마는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두려움을 외면하기라도 하듯, 난폭하게 포효를 내질렀다.
주황색 마력이 정신없이 꿈틀거리며, 놈의 의지에 따라 주변의 시간을 비틀기 시작했다.
비틀린 시간이 순리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가속되었다. 느려졌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모조리 뒤섞여, 뒤틀린 시간이 정신없이 소용돌이쳤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모두 나의 지배하에 있나니! 어찌 필멸자 따위가 내 공격을 받아내리오!》
진정한 권능을 드러낸 라가하마는 그렇게 생겨난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 자신의 몸을 숨겼다.
놈이 몸을 숨긴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많은 라가하마들이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콰자자작!
시간이 통째로 부서져 나가는 소리와 함꼐, 비틀린 시간 속에서 거대한 발톱이 날아들었다.
미래와 과거, 현재의 시간대에서 수많은 라가하마들이 동시에, 해당 시간대의 나를 향해 발톱을 휘둘렀다.
시간의 군주라는 위엄을 온 힘을 다해 증명하기라도 하듯, 예전의 나였다면 절대로 막을 수 없는 초현실적인 공격이 과거와 현재, 미래에서 내 목숨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하지만….
-부와아악!
《크, 크아아악!》
내 목숨을 취하기 위해 휘둘러졌던 거대한 발톱들은 엉뚱하게도 주인의 목을 후벼팠다.
제멋대로 왜곡되어가는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 다른 시간대에 속한 라가하마가 동시에 비명을 내질렀다.
“그렇게 요란하게 시간을 뒤틀어봤자. 네놈의 본질이 어디 가는건 아니지.”
어느새 모든 시간대에 속한 ‘나’의 육신엔 암녹색으로 번들거리는 외골격이 덧씌워져 있었다.
고통 섞인 비명을 질러대는 라가하마를 향해, 모든 시간대의 나는 동시에 히죽 비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