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5화
-후왕! 후와아앙!
부리를 비웃듯 비튼 라가하마는 마력으로 생성한 칼날을 휘두르며, 내게 쇄도해왔다.
칼날에 맺혀 살벌한 위세를 풍기는 마력과는 달리, 라가하마의 움직임은 평범한 수준이었다.
어지간한 중급 마족보다 훨씬 느린 데다, 단순하기까지 한 공격에, 나는 어둠달을 들어 올려 놈의 공격을 막아 냈다.
…아니, 막아 내려고 했다.
《건방지게 이 몸의 공격을 막으려고 들어? 어림도 없지.》
-뚜둑!
라가하마의 움직임은 단순하기 짝이 없었지만, 나는 놈의 공격에 대응할 수 없었다.
어둠달을 들어 올리기 무섭게. 라가하마의 부리에서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과 동시에, 놈이 지껄인 대로 내 육신에 흐르던 시간이 별안간 뚝 멈춰 버렸다.
아무리 용을 써도 정지된 시간 속에서 나는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흐음. 어디부터 괴롭혀야 잘 괴롭힌다고 소문이 날까? 잘생긴 얼굴? 아니야…. 잘못하면 싱겁게 죽어버릴 수 있으니. 우선 다리부터!》
-부와아악!
히죽거리며 내게 다가온 라가하마는 제멋대로 떠들며 장난치듯 칼날을 휘둘렀다.
끈적한 주황빛 마력이 응결된 칼날이 내 다리의 외골격을 가볍게 훑자.
단단한 내구도를 지닌 외골격이 단숨에 쩍 갈라졌다. 근육과 살점이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쫙 갈라진 다리의 상처 부위에 시뻘건 선혈이 몽글몽글 맺혔다.
마지막으로 내 다리를 걷어찬 라가하마는 잔혹하게 웃더니, 이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어떤 비명을 질러줄지 기대되는걸?》
-푸화하학!
라가하마가 손가락을 튕김과 동시에, 정지된 시간이 다시 순리대로 흘렀다.
쩍 갈라진 다리의 상처 부위에서 새빨간 핏줄기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듣기 싫은 소음과 함께, 놈이 걷어찬 다리가 기이한 방향으로 우직 꺾였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 머릿속을 허옇게 물들였다.
《흐으응. 인간종 놈들이란 의지가 생각보다 대단하다니까. 역시 다리는 그다지 별로였나 봐.》
치밀어오른 고통과 욕설을 속으로 삼키며, 부러진 다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키자.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었는지, 라가하마는 아쉽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눈을 가늘게 떴다.
잔혹하면서도 천진난만한 광기가 뒤섞인 눈빛이 놈의 눈빛에서 흘러나왔다.
《그럼. 다시 다른 곳을 부숴봐야지. 이번엔 팔을 으깨보는 게 좋겠어.》
-꾸드드득!
라가하마가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튕기기 무섭게, 시간이 거꾸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내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이미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역순으로 재연했다.
찢어지고 부서진 다리가 다시 복구되었다. 갈라진 외골격이 다시 들러붙었다.
어느새 시간은 내가 라가하마의 공격을 막아 내려던 순간으로 돌아가 있었다.
-우지직!
“크으읍!”
이번엔 라가하마의 마력은 칼날의 형태가 아닌, 묵직한 철퇴가 되어 있었다.
정지된 시간 속에서 날아든 놈의 공격은 단숨에 내 오른팔을 짓이겨 버렸다.
엄청난 충격에 균형을 잃은 몸이 < 모양으로 우득 꺾였다. 뼈와 살점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꽉 다문 잇새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호오. 이번엔 꽤 괜찮은 소리를 내잖아?》
머릿속을 탈색시키는 고통과 때마침 들려온 비웃음에 나는 이가 부러져라. 까득 깨물었다.
그리곤 땅을 박차듯 강하게 디뎌, 균형을 잃어버린 몸을 가까스로 지탱했다.
성한 팔로 어둠달을 힘껏 붙잡고는 검은 심장이 흡수한 내력을 박박 긁어모아, 외골격에 불어넣으며 광룡광림을 준비했다.
-푸스스스.
내력이 주입된 외골격이 재가 되어 천장으로 솟구쳤다.
잿가루처럼 흩날리는 외골격의 파편에서 내력이 광포하게 꿈틀거리며 먹장구름을 생성했다.
좁다란 계단 천장에 시퍼런 전하가 번쩍이는 먹장구름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흩뿌렸다.
먹장구름 속에서 새하얀 용 한 마리가 천둥과 우레를 머금고 흉포하게 울부짖었다.
귀가 먹먹해질 듯한 우렛소리를 동반한 빛의 용이 라가하마의 육신으로 내려꽂히려는 그 순간!
《똑같은 수법에 이 몸이 당할 줄 알았어?》
비웃듯 부리를 고약하게 비튼 라가하마는 또다시 시간을 돌려버렸다.
내리꽂히던 빛의 용이 먹장구름 속으로 다시 빨려 들어갔다. 천장 전체를 뒤덮은 먹장구름이 다시 외골격의 파편 형태로 돌아갔다.
-꾸드드득!
내력을 품고 바스러졌던 외골격이 원래대로 돌아오려는 순간.
교활하게 눈을 빛낸 라가하마는 바로 그 시점에서 시간을 멈춰 버렸다.
그렇게 정지된 시간 속에서 내 몸뚱이는 외골격이 분해된 채,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다.
《스스로 외골격을 벗어 던지다니. 그렇게나 고통이 맛보고 싶었나 보지?》
내게 다가온 라가하마의 눈이 음험하게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속삭이듯 이죽거린 놈의 부리가 가학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너울거리는 주황색 마력이 흉악하게 생긴 고문 도구들로 변해, 놈의 주변에 둥둥 떠올랐다.
《그렇다면, 소원대로 극상의 고통을 맛보게 해줄게.》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니, 시간이 애초에 흐르기는 한 걸까?
라가하마는 내 몸뚱이를 도화지로, 고문 도구들을 붓으로 삼았다.
놈은 자신의 가학적인 예술 감각을 내 육신 위에 마음껏 펼쳐냈다.
악취미가 가득한 고문을 이기지 못한 몸뚱이가 몇 번이나 붕괴했지만, 그때마다 놈은 시간을 되돌렸다.
“….”
가학적인 고문 속에서도 나는 놈의 바람대로 순순히 비명을 질러주지 않았다.
몸이 너덜너덜해지는 고통과 영혼이 뽑혀나가는 고통 속에서 나는 계속해서 머리를 굴려 가며,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모색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 상황을 벗어날 만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계속해서 라가하마가 시간을 멋대로 다시 되돌려버렸기에,
재사용 대기시간이 걸린 권능들에 걸린 대기시간은 변할 생각조차 하지 않은 상태였다.다시 돌아오겠다던 김혜옥 또한 무한히 되돌아가는 시간의 미궁 속에 빠져버렸는지,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빌어먹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저 빌어먹을 놈을.
《이야. 이제 비명 지를 때도 된 것 같은데. 인내심이 보통이 아닌걸?》
히죽 웃은 라가하마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문용 집게를 옆으로 휘익 집어던졌다.
놈이 바라는 대로의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인지, 나를 바라보는 라가하마의 눈은 웃고 있었지만,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하기야. 그릇 정도 되는 놈이라면, 비범한 인내심을 지니고 있어도 이상하진 않겠지. 흥미가 떨어졌어. 아무리 고문해봐야 반응이 없으니 재미도 없네.》
투정 어린 불편을 토해낸 라가하마는 부리를 고약하게 비틀더니,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뾰족하게 세운 손가락에선 주황색 마력이 폭풍처럼 불길하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노인네들이 그토록 네놈의 육신을 바라니까. 우선은 여기에 넣기 편하도록 ‘작게’ 만들어야겠지? 알다시피 내가 몸이 좀 허약해서 말이야.》
라가하마는 품속에서 강태백과 설악공격대원들이 태아 상태로 들어있는 유리병을 꺼냈다.
하는 짓으로 봐선, 놈은 나를 그들처럼 태아로 만들어서 유리병에 넣어갈 심산인 것 같았다.
…젠장. 이대로 끝나는 건가?
아무리 용을 써봐도 정지된 시간 속에선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불길한 눈웃음을 띄운 채, 내게 손가락을 들이미는 라가하마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뾰족하게 세워진 손가락에서 주황색 마력이 강렬하게 꿈틀거렸다.
-왜애애앵.
라가하마의 마력이 그렇게 내 몸에 엄습해오려던 그 순간!
수많은 벌레들이 우글거리며, 기어 다니는 듯한 음습한 소리.
셀 수 없이 많은 파리 떼들이 열심히 조막만 한 날개를 요란하게 퍼덕이는 소리!
내 품속에서 별안간 기묘한 소리와 함께, 녹색 광채가 휘황하게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