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4화
-화르륵!
암룡출동의 파괴력에 직격당한 라가하마가 멍하니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힘껏 도약한 나는 어둠달의 창날을 아래쪽으로 내리찍으며, 놈의 머리통을 노렸다.
모든 것을 살라 먹을 듯 광포하게 날뛰는 불꽃과 성난 벌떼처럼 사납게 날뛰는 내력이 라가하마의 머리통을 부수려는 그 순간!
-텁.
아래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던 라가하마가 별안간 두 손가락을 들어, 내 공격을 막아냈다.
아무런 예비 동작 없이, 그저 가볍게 들어 올린 손가락에 벼락처럼 내리꽂히던 창날이 단숨에 붙잡혔다.
그렇게 창날을 막아낸 라가하마는 창날을 붙잡은 손가락을 벌레 쫓듯 옆으로 가볍게 휘둘렀다,
-콰쾅!
라가하마가 그저 가볍게 손가락을 털어낸 것만으로도 엄청난 충격파가 발생했다.
전신을 감싼 외골격에 내력을 주입해, 충격을 상당량 상쇄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렇게 날아가 벽과 강렬하게 부딪힌 순간, 속에서 비릿한 핏물이 왈칵 솟구쳤다.
“…크읏!”
어찌나 강렬했는지. 순간적으로 시야가 흐릿해졌다. 의식이 아찔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실로 군주급 마족의 지위에 걸맞게 무식한 괴력이 아닐 수 없었다.
가까스로 흐릿해지던 의식을 수습한 나는 황금빛 안광을 불태우며, 라가하마를 향해 다시 어둠달을 겨누었다.
《…아깝네. 정말 아끼던 옷이었는데 말이야.》
나를 날려보낸 라가하마는 아쉬운 표정으로 찢어진 정장을 내려 보고 있었다.
서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라가하마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불쾌한 감정이 서렸다.
시종일관 능글맞은 표정을 짓고 있던 얼굴이 살짝 굳어있었다. 비웃듯 비틀려 있던 부리가 불쾌한 감정을 품고 뒤틀렸다.
《인간종 주제에 내 몸에 상처를 낸 것은, 제법 기특한 일이지만…. 내가 아끼는 옷을 이따위로 망쳐놓은 것은 선을 넘었지. 조금은 훈계가 필요할 것 같네.》
-부우욱!
으스스한 목소리로 뇌까린 라가하마는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진 정장을 손으로 찢어버렸다.
오만하게 떠든 것과는 달리 암룡출동에 제법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은 모양인지. 찢어진 정장 아래에 드러난 놈의 상반신엔 암룡출동의 여파로 인한 상처들이 가득했다.
“훈계? 할 수 있으면 해보시던가! 지금 옷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라가하마가 뿜어낸 심상치 않은 기운에 순간적으로 위축되었지만.
놈의 몸뚱이에 상처가 가득한 것을 확인한 순간,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몸뚱어리에 상처가 아직 싱싱하게 남아있는 것으로 미뤄보건대. 불행 중 다행으로 놈은 다른 마족들보다 재생력이 현저하게 뒤떨어지는 타입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깔맞춤이 발동된 시간 동안, 어떻게든 급소를 노려봐야겠어!
-두근! 두근! 두근!
생각을 정리한 순간,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맹렬하게 뛰었다.
어둠달에 박힌 검은 심장이 거센 심장 박동에 공명하며, 주변의 마력을 게걸스레 빨아들였다.
내력이 주입된 전신의 근육에서 고래 심줄보다 질긴 힘줄이 투두둑 튀어나왔다.
『깔맞춤』 스킬의 영향으로 필멸의 영역을 벗어난 인지력이 다시 한번 미래를 예지하기 시작했다.
《조금 따끔할 거야. 나도 오랜만에 좀 화가 났거든.》
노릿하게 눈을 빛낸 라가하마는 주변을 가득 메운 주황색 마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끈적하게 뭉친 농밀한 마력이 놈의 팔뚝을 휘감더니, 칼날의 형태로 응결되었다.
양손에 칼날을 휘감은 라가하마가 여유로운 몸짓으로 내 쪽을 바라보려던 그 순간!
-투콰아앙!
마력이 칼날로 응결되는 그 찰나의 틈을 미리 예지한 나는 즉시 라가하마에게 달려들었다.
투석기에서 발사된 탄환처럼 맹렬하게 놈에게 쇄도한 나는 어둠달을 가로로 휘둘렀다.
어둠과 불꽃이 너울거리는 창날이 공간을 단숨에 반으로 양분해갔다.
《…!》
갑자기 쇄도해온 내 공격에 눈을 크게 뜬 라가하마가 황급히 칼날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필멸의 영역을 뛰어넘은 인지력으로 미래를 본 나는 놈의 움직임을 진즉 예측한 상태였다.
라가하마가 칼날을 들어 올리려는 찰나, 날아든 창날은 기이하게 꺾이며 놈의 손길을 피했다.
-콰직! 콰직!
기이하게 꺾인 창날은 라가하마의 손등을 정확하게 관통했다.
손등의 뼈가 우지끈 부러지자. 칼날 형태로 응집된 마력이 순간적으로 흐릿해졌다.
순간적으로 공격을 허용한 라가하마의 얼굴에 고통과 당황이 골고루 뒤섞인 표정이 떠올랐다.
《으윽! 제법….》
“크허어엉!”
-후웅! 후웅! 후웅!
라가하마는 인상을 찌푸리며, 내게 뭐라 말하려 들었지만.
입에서 포효하듯 우렁찬 사자후를 토해낸 나는 계속해서 신들린 듯 어둠달을 휘둘렀다.
광포하게 허공을 찢어발긴 창날이 파천 복룡창의 묘리에 따라 일곱 마리 용의 형상을 빚어냈다.
어둠과 불꽃을 머금은 일곱 마리 용은 라가하마를 향해 커다란 아가리를 쩌억 벌렸다.
《필멸의 시간을 살아가는 족속답게, 성질 하난 더럽게 급하네! 운 좋게 기습은 성공했지만. 이까짓 공격쯤은…. 흐윽?!》
-파차-앙!
자신을 향해 짓쳐오는 용의 군무를 바라본 라가하마는 여유롭게 웃으며 칼날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주홍빛 마력이 일렁거리는 칼날이 어둠과 불꽃에 휘감긴 용과 맞부딪히자.
라가하마의 손에 맺힌 칼날은 마치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산산히 흩어져버렸다.
《…그 찰나의 순간에 마력의 핵을 정확하게 노렸어?》
조금 전 내가 라가하마의 손등을 꿰뚫은 이유였다.
필멸의 영역을 초월한 인지력의 힘으로 미래를 예지한 나는 절묘하게 힘을 배분.
마력의 핵을 공격해 적절한 타이밍에 놈의 응결된 마력이 ‘저절로’ 흩어지도록 설계했다.
-콰득! 콰득! 콰드득!
라가하마의 얼굴에 경악과 감탄의 표정이 떠오름과 동시에.
놈을 향해 날아든 일곱 마리의 용은 라가하마의 헐벗은 육신을 게걸스럽게 물어뜯었다.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주황색 피와 노르스름한 살점이 사방으로 정신없이 흩날렸다.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악취와 비릿한 피비린내가 좁다란 공간을 순식간에 가득 메웠다.
-파스스스.
어둠달의 창날이 라가하마의 살점을 도려내는 동안, 나는 다음 수를 준비했다.
시커먼 내력을 머금은 외골격이 허옇게 물들며, 또다시 재가 되어 천장으로 흩날렸다.
하늘하늘 흩날리며 솟구친 외골격의 파편들은 주변을 붉게 물들이며, 먹장구름을 생성했다.
《크으으읏! 귀엽게 봐줬더니. 시건방진 짓을 하려고 들….》
마침내 부리를 쩌억 벌린 라가하마에게서 성난 포효가 터져 나왔다.
파천 복룡창의 첫 번째 초식에게 처참히 유린당한 놈의 육신이 살점과 핏덩이를 흩뿌렸다.
처음으로 평정을 잃은 놈은 자신의 광포한 격노를 내게 쏟아내려고 들었지만….
-콰르르릉!
애석하게도 내 공격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라가하마가 포효를 터뜨림과 동시에, 마치 호응이라도 하듯 하늘에서 굉음이 터졌다.
대기를 찢어발기는 우레와 함께, 순간적으로 좁다란 계단 전체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동시에 천장을 뒤덮은 시커먼 먹구름에서 새하얀 백색의 번개가 라가하마를 향해 뚝 떨어져 내렸다.
-파차차차창!
그렇게 파천 복룡창의 다섯 번째 초식. 광룡광림이 본격적으로 발동되자.
먹구름 속에서 증폭된 내력이 번개의 형태가 되어 라가하마의 육신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불태우는 뜨끈한 극양의 기운이 놈의 몸뚱이를 화끈하게 불태웠다.
《크, 크으윽. 이, 이새끼가….》
부리를 허무하게 뻐끔거리는 라가하마의 육신은 완전히 새카맣게 타들어 간 상태였다.
금방이라도 사그라들 듯한 놈의 목소리처럼 주변을 둘러싼 주황색 마력이 점점 희미해졌다.
노릿하게 타오르던 눈에서 빛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깔맞춤』의 지속시간이 만료되었습니다. 재사용 대기까지 앞으로 『12시간』 남았습니다.」
굳건하게 대지를 디뎠던 라가하마의 역관절 다리가 꺾여짐과 동시에 『깔맞춤』 스킬의 종료를 알리는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필멸의 영역을 벗어났던 인지력이 원래대로 되돌아오며,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듯 무력한 탈력감이 찾아왔다.
당장이라도 몸을 누이고 싶은 피곤한 충동이 내 몸을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마무리는 해야지.”
하지만 아직 안심할 때가 아니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모락모락 연기를 뿜어내는 라가하마의 육신에선 아직 미세한 호흡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아무리 『깔맞춤』 스킬의 힘으로 순간의 허점을 노려, 놈을 쓰러뜨리는 데 성공했다지만.
강인하기 짝이 없는 마족 중에서도 정점에 이른 군주급 마족의 질긴 생명력을 쉬이 얕볼 수는 없었다.
-카드득!
조심스레 숯덩이가 된 라가하마에게 다가간 나는 어둠달을 들어 올렸다.
어둠과 불꽃이 광포하게 너울거리는 창날이 흉흉한 살기를 흩뿌렸다.
거세게 쿵쿵 맥동하는 검은 심장이 라가하마의 마력을 게걸스레 빨아먹으며, 놈의 육신을 계속해서 불태웠다.
그렇게 라가하마에게 마무리 일격을 날리려는 그 순간!
《…인정할게. 일 회전은 내 패배야.》
쓰러진 라가하마의 육신에서 다시 한번 특유의 사념파가 들려왔다.
섬뜩한 기분을 느낌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압박감이 찾아왔다.
몸을 으스러뜨릴 듯 강하게 옥죄는 압박감에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
단순히 압박감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현상이 눈앞에서 다시 한번 재현된 것이었다.
…어째선지 모든 것의 시간이 통쨰로 얼어붙어 있었다.
-째깍! 째깍! 째깍!
정지된 시간 속에서 어디선가 희미하게 시곗바늘 소리가 들려왔다.
귀에 거슬리는 시곗바늘 소리와 함께, 세상의 시간이 거꾸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드드드득!
내 육신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이전의 움직임을 역순으로 재현했다.
파괴되었던 지형지물이 시간을 거슬러가며, 다시 원래대로 복구되었다.
부서졌던 난간도, 무너졌던 계단도 다시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인간종 따위를 상대하는데. 이 정도 권능을 쓸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정지된 시간 속에서 히죽 웃는 라가하마의 육신이 완벽하게 재생되었다.
검은 심장에 흡수되었던 마력들이 시간을 거슬러, 놈의 육신에 다시금 깃들었다
《그럼…. 2회전을 시작해볼까? 기대해. 이번엔 그렇게 어이없이 당하진 않을 테니까.》
노릿한 안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라가하마는 서늘하게 웃었다.
다시 번듯한 정장을 차려입은 놈의 육신에서 광포한 살기가 아지랑이처럼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