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3화
“시, 시간의 군주?”
《애석하게도 그렇게 거창한 칭호와는 달리, 할 수 있는 건 제한되어 있지만 말이야.》
수탉 머리 마족, 라가하마는 부리를 뒤틀어 묘하게 미소를 짓는 듯한 모양새를 취했다.
팔짱을 낀 채, 휘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놈의 말투에선 강자의 여유가 듬뿍 묻어나왔다.
굳이 오만하게 자신의 권능까지 일일이 설명해주는 모습이, 라가하마는 나를 그저 새롭게 손에 넣은 장난감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까불고 있어. 이 설명충 닭대가리 놈이!
-까드득!
순간적으로 치밀어오른 치욕감에 나는 이가 부러져라. 까득 깨물었다.
그리곤 휘청거리는 몸에 내력을 불어 넣으며, 가물가물해진 의식을 단단히 붙잡았다.
의식과 시야가 동시에 또렷해진 그 순간, 내 의지에 따라 흉포하게 울부짖던 용 한 마리가 시커먼 먹장구름 속에서 먹잇감을 향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꽈르르르릉!
귀가 먹먹해질 듯한 굉음과 함께, 모든 것을 새하얗게 물들이는 빛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모든 것을 하얗게 백열시킨 난폭한 빛의 향연은 자신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난폭하게 부쉈다.
금속으로 된 난간이 엿가락처럼 휘었다.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이뤄진 튼튼한 계단이 과자처럼 산산이 박살 났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거창한 권능은 쓰지 못하지만. 이런 식으로 시간을 가속시켜 공격을 피해내는 것쯤은 할 수 있거든.》
모든 것을 집어삼킨 빛의 향연 속에서 라가하마의 목소리가 광룡광림에 직격당한 정면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속삭이듯 들려왔다.
자신의 능력을 내게 과시하고 싶어선지. 놈은 여유가 가득한 목소리로 능글맞게 웃어대며 자신이 지닌 권능에 관련된 설명을 늘어놓았다.
“치잇!”
-번-쩍!
침음성을 삼킨 나는 라가하마의 목소리를 엉뚱한 방향에서 들려온 것을 감지하자마자, 놈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재빨리 암룡출동을 시전했다.
시커멓게 물든 외골격의 손 부위가 내력의 폭풍을 품고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인간종치곤 제법 깜찍한 움직이지만, 조금 더 노력이 필요하겠어. 잘 좀 맞춰 보라구.》
하지만 이번에도 라가하마의 느물느물한 목소리는 또다시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니. 계단의 잔해에 몸을 기댄 놈은 여전히 팔짱을 풀지 않은 채, 마치 장난감을 갖고 노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차. 내가 몸의 노화를 너무 가속시켰나? 조금 풀어줄 필요가 있겠네.》
연기하듯 과장된 움직임으로 자신의 이마를 ‘탁’ 친 라가하마는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깃털에 뒤덮인 놈의 손가락이 내 몸을 향하자, 미처 저항할 새도 없이 주변을 뒤덮은 주황색 마력이 요동치며 내게 빨려들어왔다.
-꾸드드득!
힘이 빠져나갔던 몸이 다시 활력을 되찾았다. 내력이 다시 충만하게 차올랐다.
당장이라도 부러질 듯 요란스레 후들거리던 다리가 굳건하게 땅을 디뎠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던 피부와 근육이 다시 탄력과 힘을 되찾았다.
《어때? 다시 젊어지니 좋지? 이런 식으로 네게 허락된 시간을 내가 원하는 대로 다루는 것도 가능한 것이 내 권능이야. 조금 시시하지만.》
…시간을 다루는 능력이라. 거 참 빌어먹을 정도로 까다로운 권능이로군.
재수 없는 눈웃음을 흘려대는 라가하마는 그 오만한 여유를 증명하듯 상당한 강자였다.
흩뿌리는 마력은 라크슈마를 가뿐히 능가하는 수준이었고, 시간을 다루는 권능은 회귀 전후를 통틀어 내가 상대해본 마족 중 순위권에 들 정도로 까다로운 것이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영웅시 『니리르티』의 남은 재사용 대기시간은 앞으로 『12시간』입니다.」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영웅시 『라크슈마』의 남은 재사용 대기시간은 앞으로 『13시간』입니다.」
일전의 전투로 『잊혀진 자들의 영웅시』 특성의 영웅시 중, 강력한 권능을 지닌 이들의 영웅시들이 모두 재사용대기시간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필멸의 영역을 벗어던진 둘의 영웅시에 비해, 다른 영웅시들이 지닌 힘과 권능은 지금 내 수준과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 수준이었다.
《뭘 그리 머리를 굴리고 있어. 육체까지 다시 젊게 해줬는데. 빨리빨리 덤벼봐. 아니면…. 혹시 내게 덤벼들 동기가 부족한건가?》
어둠달을 꽈악 움켜쥔 상태로, 신중히 앞으로의 전투를 구상하고 있자.
라가하마는 부리를 불만스럽게 딱 부딪히며, 투정어린 목소리로 불만을 토해냈다.
그러면서 잠시 머리를 갸웃 기울인 놈은 품 속을 뒤적여 무언가를 꺼냈다.
《인간종은 동료애에 약하다지? 이게 뭔지 알겠어?》
라가하마가 품 속에서 꺼낸 것은 자그마한 크기의 유리병이었다.
놈이 꺼낸 유리병 속엔 인간의 태아와 유사하게 생긴 것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동료애라고? 설마. 이 새끼…!
《표정을 보아하니, 눈치챈 모양이네? 그래. 조금 전에 나와 놀아줬던 네 동료들이야. 얘네들도 제법 귀엽길래 이렇게 소장하기 쉽게 크기를 좀 줄여봤지.》
유리병 속에 들어있는 태아들의 정체는 바로, 강태백과 설악 공격대원들이었다.
굳이 친절하게 설명을 늘어놓는 라가하마의 작태에, 내 얼굴은 저절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내 표정이 변한 것을 확인한 놈의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었다. 부리의 끝부분이 비웃듯 위쪽으로 치켜 올라갔다.
-탁.
《여기에 고이 모셔둘테니까. 이들을 구하고 싶으면 나를 쓰러뜨려봐! 앗차차. 이런 대사는 너무 진부한가?》
비웃음을 흘려낸 라가하마는 강태백과 설악 공격대원들이 담긴 유리병을 구석에 내려놓았다.
여유롭게 웃으며 어떠냐는 식으로 나를 바라보는 놈의 눈빛이 이루 형용할 수 없을만큼 역겹게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허옇게 태울만큼의 분노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지금은 분노에 휘둘릴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후우우….”
마음을 다스리며 길게 심호흡을 내쉰 나는 단단히 어둠달을 틀어쥐었다.
그러면서 은밀히 검은 심장으로 내보내, 주변을 가득 채운 주황색 마력을 빨아들였다.
거세게 맥동하는 검은 심장이 빨아들인 마력을 내력으로 바꿔, 내 몸 속으로 불어넣었다.
충만하게 일어난 시커먼 내력이 난폭하게 소용돌이치며, 외골격을 감싸기 시작했다.
-피슛! 피슛! 피슛!
시커먼 와류에 휩싸인 어둠달이 벼락처럼 내찔러졌다.
눈에 보이지 않을만큼 빠르게 움직인 창날이 순식간에 일곱 갈래로 갈라졌다.
광포하게 포효하는 일곱 마리의 용이 라가하마의 숨통을 노리고 짓쳐들어갔다.
《그래도 진부한만큼 효과는 확실하네. 좋아! 다시 놀아보자구!》
으스스한 목소리를 토해낸 라가하마의 몸에서 주황색 마력이 더욱 강렬히 뿜어졌다.
동시에 단정한 정장을 차려입은 놈의 몸이 순간적으로 흐릿해지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위치사수』 스킬이 발동되었습니다. 자리를 지킨 시간에 비례하여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깔맞춤』 스킬이 발동되었습니다. 종료까지 남은 시간은 『5분』입니다.」
파천복룡창 일식 연포를 흩뿌려낸 나는 나의 비장의 카드 중 하나인 『위치사수』와 『깔맞춤』 스킬을 발동해둔 상태였다.
『깔맞춤』 스킬의 힘으로 순간적으로 필멸의 영역을 초월한 인지력이, 주변의 정보를 토대로 미래를 읽었다.
『위치사수』 스킬의 힘으로 상승한 능력치가 내 육신에 놀라운 힘을 새로이 불어넣었다.
-콰드득!
《아얏!》
필멸의 영역을 초월한 인지력은 주변의 정보를 취합해, 거의 예지나 다름없는 힘을 발휘했다.
그것의 정보를 토대로 라가하마이 움직임을 미리 예지한 나는 망설임없이 독룡아로 놈의 육신을 꿰뚫었다.
오만하게 웃던 놈의 부리가 뻐끔 열리며, 처음으로 비명이 새어나왔다.
《아파라…. 시간을 가속시켰는데. 그걸 꿰뚫어 본거야? 생각보다 제법 솜씨가 괜찮은 친구네! 그 노인네들이 괜히 눈독들인게 아니었어!》
충분한 힘과 내력을 실었지만, 애석하게도 라가하마의 육신을 완전히 꿰뚫지는 못했다.
어깨의 상처를 새삼스레 어루만지는 놈의 얼굴엔 여전히 여유가 가득했다. 비명을 질렀던 부리는 다시 굳건히 닫힌채 오만한 미소를 흘렸다.
-콰쾅! 콰콰콰쾅!
하지만 내겐 라가하마와 담소 따위를 나눌 여유따윈 없었다.
『깔맞춤』 스킬의 힘으로 상승한 인지력이 낳은 결과를 확인한 나는 다시 한번 놈을 향해 암룡출동을 날렸다.
시커멓게 달아오른 외골격이 산산히 부서지며, 내력의 폭풍이 라가하마의 육신을 휩쓸었다.
흩날리는 외골격 파편 속에서 염룡등천의 묘리로 일어난 시뻘건 불길이 놈의 육신을 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