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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 잘생겼다!-208화 (208/309)

제208화

『일어나게. 언제까지 잘 생각인가?』

정신이 아득히 멀어짐과 동시에 찾아온 무의식 속에서, 갑자기 인자하면서도 근엄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둔중하게 울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리자, 어째선지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동시에 무의식의 깊은 곳까지 침잠했던 의식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여긴….”

시야에 들어온 주변의 풍경은 굉장히 익숙하면서도 묘하게 이질적이었다.

어째선지 나는 고풍스러운 조각상이 가득한 고대 그리스 로마 양식의 신전 내부에 서 있었다.

거대한 돔 형태를 띤 신전의 천장엔 성좌들을 암시하는 별자리가 빼곡하게 음각되어 있었다.

규칙적으로 박혀있는 거대한 기둥 하나하나엔 손을 꼭 모아쥔 채, 간절히 기도하는 신도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에잉. 껍데기만 남았긴 하나, 모처럼 이 몸의 육신을 소멸시킨 필멸자라 해서 기대했거늘. 저리 어벙하게 행동하는 꼬라지는 도대체 무언지 모르겠군.』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신전의 풍경을 잠시 둘러보고 있으려니.

무의식 속에서 내 의식을 깨웠던 예의 그 목소리가 다시 한번 머릿속에서 웅웅 울렸다.

『위쪽일세. 도대체 어디를 그리 두리번거리는 건가?』

연이어 일어난 기묘한 일들의 연속에 내력을 끌어올리며, 주변을 경계하고 있으려니.

다시 한번 머릿속에 묘하게 꼬장꼬장한 감정을 품은 목소리가 울려왔다.

목소리의 지시에 따라, 고개를 들어 신전의 천장으로 시선을 옮기자.

“…쇠락한 고성의 파리 군주?”

『그냥 편히 바알제불이라 불러주게. 이제 그렇게 오글거리는 이름 따위로 불릴 이유가 없어졌으니 말일세.』

천장의 중앙엔, 쇠락한 고성의 파리 군주를 암시하는 별자리가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희미한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머릿속에 씁쓸한 목소리가 울릴 때마다, 그의 별자리가 서글프게 깜빡이며 점멸했다.

『아차. 이거 미안하군. 오랜만에 손님을 맞이하다 보니, 인간의 필멸의 어떤 구조인지 깜빡했지 뭔가. 불편하더라도 잠시 기다려주게.』

고개를 위로 치켜든 상태로 바알제불의 별자리를 바라보고 있자.

어쩐지 미안한 감정이 묻어있는 목소리가 머릿속에 웅웅 울렸다.

곧이어 희미하게 빛나는 별자리에서 녹색 빛이 순간적으로 강렬하게 번쩍이더니, 천장에서부터 하나의 인영이 이쪽을 향해 사뿐히 내려왔다.

“필멸의 육신을 오랜만에 취했기에, 격식에 벗어난 모습일지도 모르겠네만. 이해해주게. 내게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거든.”

천장의 별자리에서부터 내려온 남자, 바알제불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내게 양해를 구했다.

현대풍의 어두운 암녹색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머리를 올백으로 단정하게 빗어넘긴 중년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비록 내게 양해를 구하며, 살짝 고개를 숙이긴 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비굴함이 없이 신사다운 중후한 매력이 가득했다.

“아무튼, 필멸의 세계에서 우리가 그리 유쾌한 관계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네만. 그런 사소한 것과는 상관없이, 고마운 것은 고맙다고 말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라서 말일세.”

입가에 중후한 미소를 띤 바알제불은 다시 한번 우아한 몸짓으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동작은 마치 연극 속의 배우처럼 과장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바알제불의 목소리엔 진심어린 감사의 감정이 듬뿍 묻어나왔다.

“고맙네. 자네가 치욕스럽게 영락해버린 나를 구원해줬어.”

“그리 달갑진 않았지만, 당신 또한 인과율의 장난질에 희생당한 장기 말에 불과했으니까.”

내 입에서 ‘인과율’이란 단어가 언급되자, 바알제불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입가에 깃든 미소는 지독히도 허무하면서도 서글픈 회한이 가득했다.

“장기 말이라…. 그래. 결국은 그런 셈이로군. 최후의 순간까지 ‘그분’의 손에 놀아난 격이었으니 말일세. 우습군. 모든 것을 초월한 초월자로 자부하던 성좌라는 족속들도 결국은 장기 말에 불과한 것이었어.”

회한의 감정 속에 풍화되어버린 듯한 바알제불의 죽은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놀랍게도 그는 『잊혀진 자들의 영웅시』의 낙오자들처럼, 세계의 진실을 어느 정도 깨달은 모양이었다.

“헌데. 용케도 자네는 ‘그분’의 속박에서 벗어난 모양이로군. 나조차 최후의 순간에 깨달은 진실을 알고 있는 모양이니 말일세.”

“당신들이 낙오자라고 불렀던 이들이 내게 짐 덩이를 떠맡겼거든.”

“…그랬군. 그들의 말이 사실이었어. 그래서 내가 무의식적으로 자네를 제거하라 적대했던 모양이야. ‘그분’의 뜻에 따라 내게 할양된 역할은 ‘악역’이었으니 말일세.”

굳이 자세한 설명을 곁들이진 않았지만, 바알제불은 내 간단한 대답만으로도 무언가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어째선지 회한이 가득했던 그의 얼굴이 일순간 후련한 감정을 품고 편안히 풀어졌다.

서글픈 눈물을 섧게 흘려내던 바알제불의 주름진 눈이 묘한 웃음기를 머금고 부드럽게 휘어졌다.

“낙오자들 사이에서의 실없는 뜬 소문인 줄 알았거늘. 진짜로 ‘그분’의 속박에서 벗어난 존재가 나타날 줄이야….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마지막에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일세. 모처럼 유쾌한 기분이로군.”

-파스스스.

바알제불이 빙그레 미소를 지은 것과 동시에 고풍스럽게 꾸며진 신전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굳건히 천장을 지지하던 거대한 기둥들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돔 형의 천장에 박혀있던 별자리들이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바스러지며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이것 보게 ‘그분’의 개입이야. 남은 존재력을 박박 긁어모아 어렵게 마련한 시간이거늘. ‘그분’께서 어지간히 불편하셨던 모양일세.”

먼젓번 나슈리크와의 만남이 인과율의 개입으로 도중에 뚝 끊겨버렸듯.

세계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인과율이란 존재에겐 굉장히 꺼림칙한 일인 모양이었다.

지난번처럼 이번에도 주변의 풍경이 마구 일그러지며, 강압적인 붕괴가 시작되었다.

껄껄 웃는 바알제불의 일시적인 육신이 조금씩 조금씩 바스러지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시간을! 자네와의 마지막 만남을! 이렇게 허무하게 끝낼 순 없지!”

왜소한 중년의 형태를 띤 바알제불의 육신에서 순간적으로 엄청난 힘과 위압감이 느껴졌다.

쩌렁쩌렁한 포효를 터뜨리며, 사납게 이를 드러낸 그의 전신에서 눈이 멀어버릴 듯한 녹색 빛이 휘황찬란하게 뿜어져 나왔다.

-끼기기긱!

바알제불의 육신에서 녹색 빛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붕괴가 순간적으로 멎었다.

아니, 마치 강물처럼 흘러가는 시간을 강제로 멈춰 세우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것이 움직임을 뚝 멈췄다.

-우두둑!

무서운 힘을 발휘하여, 강제로 인과율의 개입을 멈춰 낸 바알제불은 뾰족하게 세운 손가락으로 자신의 몸속에서 무언가를 비틀어 꺼냈다.

“받게! 받아주게! 내가! 이 바알제불이 이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흔적일세!”

녹색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바알제불의 손엔, 한때 그의 자유를 구속했던 두 개의 신물이 들려 있었다.

세상에 마지막 단말마를 남기기라도 하듯, 바알제불은 이글거리는 안광을 흘러내며 자신의 몸속에서 꺼낸 두 개의 신물을 내 손에 쥐여주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네만! 애석하게도! 우리의 만남은 여기까지인가 보군! 부디 이 웃기지도 않은 세상을 끝내주게!”

호탕하게 웃어대는 바알제불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를 마지막으로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흘렀다.

무의식을 가득히 채웠던 신전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다시 내 의식은 암흑 속으로 침잠했다.

*****

-콰앙! 콰아앙! 콰앙!

당장이라도 귀가 멀어버릴 듯한 굉음과 함께, 둔중한 충격이 몸에 느껴졌다.

덕분에 암흑 속으로 침잠했던 의식이 강제로 인양되듯 우두둑 끌려나왔다.

…혜옥이?

“싸부님! 싸부님! 어떡해! 어떡해! 아직도 반응이 없어!”

김혜옥이 엄청난 기세로 ‘치료’를 해댄 통에 내 몸의 부상은 깔끔히 완치되었지만.

두 초월자의 마력을 무리하게 끌어쓴 탓인지,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덕분에 나는 걱정스레 나를 쥐고 흔드는 김혜옥에게 어떠한 반응도 보여줄 수 없었다.

“그래! 그때처럼 CPR을 시도한다면! 싸부님…. 제가 꼭 살려드릴게요! 갈비뼈를…. 부순다!”

…어째 이거 지난번에 겪어본 상황 같은데?

내 불길한 예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마치 데자뷔와 같은 상황이 일어났다.

뜨거운 눈물을 주르륵 흘러내린 김혜옥은 우렁찬 함성을 내지른 뒤 주먹을 번쩍 치켜들었다.

지난번처럼 당장이라도 천하를 쥘 듯, 하늘 위로 번쩍 들린 김혜옥의 주먹에서 흉흉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꿈틀!

다급한 마음에 내력을 돌려 심장을 자극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버쩍 말라버린 내력은 굳어버린 돌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잘 마른 북어처럼 굳어버린 몸은 내 의지를 거부하며,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으어어어. 아, 안돼!

-꽈아아앙!

김혜옥의 거대한 주먹이 내 갈비뼈를 향해 무자비하게 내리꽂혔다.

폭탄이 스무 개는 동시에 터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내 육신이 크게 들썩거렸다.

갈비뼈 한쪽이 부러지다 못해, 아예 모조리 으스러지며, 가루가 되어버렸다.

머릿속이 허옇게 변할 듯한 고통에도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번-쩍!

어마어마한 충격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눈이 멀어버릴 듯한 에메랄드빛이 온 시야를 밝게 물들였다.

움푹 꺼진 갈비뼈에서부터 시작해, 온몸이 괴이한 녹색 광채를 뿜어내며 저절로 치유되기 시작했다.

가뭄철의 논바닥처럼 버쩍 말라버린 내력이 순식간에 차올랐다.

“흐허헉! 커헉! 카학!”

내력이 차오름과 동시에 나는 뒤늦은 비명을 질러낼 수 있었다.

기침하듯 비명을 토해낸 몸이 갓 건져낸 생선처럼 거칠게 퍼덕거리자.

김혜옥은 있는 힘껏 내 몸을 꽈악 안아들었다.

“싸부니이이임!”

아나콘다에게 포식당하는 사냥감과 같은 압박감이 찾아오며, 내 가슴팍이 김혜옥의 눈물로 후두둑 젖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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