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2화
“하필 지하실이라니…. 어둡고 좁은 곳은 무서워서 싫은데….”
지하로 향하는 계단은 조명 하나 없이 어두컴컴한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어째선지 어둠을 마주한 김혜옥은 듬직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소심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녀답지 않게, 커다란 눈망울엔 그 나이대 어린애와 같은 순진하면서도 순수한 공포심이 깃들어 있었다.
-콰드득!
그리고 그 순진하면서도 순수한 공포는 무식한 완력이 되어 내게 엄습해 왔다.
알 수 없는 공포에 질린 김혜옥이 마치 유일한 생명줄처럼 내 팔을 꽈악 틀어쥐자.
팔이 통째로 짜부라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근육과 뼈가 동시에 비명을 질러댔다.
“그, 그래? 네게도 무서운 게 다 있다니 별일이네. 괜찮니? 계속 갈 수 있겠어?”
순간적으로 덮쳐온 강렬한 고통에 욕지기가 확 치밀어 올랐으나.
진짜로 겁에 질린 듯한 김혜옥의 모습에 나는 가까스로 치밀어오른 욕지기를 속으로 억눌러 참았다.
그리곤 나는 애써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덜덜 떠는 김혜옥을 달래주기 시작했다.
…얘가 진짜로 뭔가를 무서워하는 건 또 처음이네.
겉으로 보기엔 어두운 곳이든 좁은 곳이든 ‘핫하! 걸리적거린다!’라면서 다 때려 부술 것처럼 생겼는데 말이지.
“해, 해볼게요. 조금 무섭긴 해도. 조금만 어둠에 눈이 익숙해진다면….”
“아냐, 무리할 거 없어. 그렇게 어둡고 좁은 곳이 무섭다면, 지금이라도 길드장님 쪽으로 합류하는 게 어때? 아무래도 전력 쪽은 구조가 워낙 복잡하기도 하고 여기저기 설치되어 있어서 손도 많이 필요하니까. 추가적인 도움의 손길은 절대 마다하지 않을 거야.”
강태백이 ‘만일’을 대비해 비상 전력망을 이곳저곳에 꼼꼼히 설치해 뒀기에, 전력을 차단하는 작업은 비상 전력망의 위치에 대한 지식과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마력원을 차단하는 작업은 지하의 마력로를 파괴하면 그만이었기에, 나 혼자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알 수 없는 공포에 시달리는 김혜옥이 계속해서 덜덜 떨며 강한 척을 내보이자, 나는 넌지시 그녀에게 강태백 쪽으로 합류할 것을 권했다.
…뭐, 강태백은 혹시나 하는 심정에 ‘만일’을 대비해서 김혜옥을 내게 굳이 붙여줬지만.
마력원을 파괴하는 것쯤은 나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이렇게 무서워하는 애를 데리고 가는 것보단 나 혼자 가는 편이 더 낫겠지.
“아녜요! 공포 따위에 굴복해서 제가 그쪽으로 빠진다면! 싸부님은 또 혼자서 외롭게 저 어둡고 음울한 장소에 가셔야 하잖아요! 싸부님은 제가 반드시 지켜낼 거에요!”
김혜옥은 아랫입술을 까득 깨물곤, 공포에 위축되어 구부정해졌던 허리를 곧게 폈다.
그리곤 그녀는 마치 공포를 육체적인 괴력으로 몰아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온몸의 근육을 위협적으로 불뚝이기 시작했다.
-꽈드드득!
어마어마한 힘이 김혜옥의 몸에 퍼져나가자, 고래 심줄보다 질기고 나무뿌리보다 억센 힘줄이 그녀의 근육 곳곳에서 툭툭 솟아 나왔다.
에메랄드 빛으로 번들거리는 외골격이 위협적인 근육 위에 갑옷처럼 둘러졌다.
전신을 퍼져나간 파괴적인 괴력에 흡족해진 듯, 그녀는 자신의 근육과 외골격을 이리저리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 팔을 있는 힘껏 틀어쥔 상태에서 말이다.
“크, 크헉! 그, 그럼 날 지키겠다고 떠들기 전에 이거부터 좀 놓아주지 않겠니?”
그렇지 않아도 강하게 틀어쥔 손아귀에 괴력이 더해지니, 김혜옥에게 붙잡힌 팔뚝 언저리에서 서서히 감각이 사라져갔다.
괴상한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얼얼하면서도 저릿했던 통증도 이젠 느껴지지 않는 것이 어째 영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머나! 죄송해요!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근육의 아름다움에 너무 심취하다 보니 그만….”
김혜옥은 내 지적에 즉시 붙잡은 팔을 놔주곤 멋쩍은 표정으로 헤헤 웃었다.
그녀의 멋쩍은 웃음에 마주 쓰게 웃어주며, 시선을 내려 그녀에게 붙잡혔던 팔뚝을 바라보자.
손바닥 모양으로 시퍼렇게 멍이 든 채, 퉁퉁 부어있는 비참한 무언가가 내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세게 틀어쥔 거야.
이 정도면 거의 어지간한 위험도 2급 이상의 몬스터와 필적할 수준의 완력인데?
“충격을 치유 에너지로 바꾸는 걸 깜빡했네요! 가만히 계세요! 금방 ‘치유’ 해드릴게요!”
“아냐. 괜찮아. 이 정도면 금방 낫는단…. 허윽!”
미처 뭐라 만류할 사이도 없었다.
김혜옥은 자신이 틀어쥐었던 내 팔뚝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자마자.
양 눈에서 심상치 않은 녹색 안광을 번뜩인 그녀는 손바닥을 곧게 세운 수도로 번개보다 빠르게, 폭풍보다 거세게 내 팔뚝을 가격해버렸다.
-우둑!
무식한 힘이 담긴 김혜옥의 수도에 제대로 적중당한 팔뚝은 수수깡처럼 허무하게 부러졌다.
그리고 고통이 머리에 채 찾아오기도 전에, 내 팔뚝 전체가 녹색으로 물들더니.
고통과 상처가 서서히 씻은 듯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세상에.”
상처가 멀끔히 나은 팔뚝을 멍하니 바라보는 내 입에선 경악이 섞인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단순히 김혜옥이 지닌 ‘치유’ 스킬의 대단한 위력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내 팔뚝을 자비 없이 후려갈길 때, 김혜옥이 보여준 순발력이 상식을 초월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악의가 없었다곤 해도. 내가 혜옥이의 움직임을 순간적으로나마 놓쳐 버렸다고?
회귀 후 얻어 낸 화안금정의 권능 때문에, 별 의미가 없어지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내 눈은 수없이 겪은 전투의 경험으로 인해, 극도로 단련된 상태였다.
그렇기에 아무리 재빠른 몬스터라 할지라도 어지간하면 내 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조금 전, 김혜옥이 보여준 움직임은 그 ‘어지간한’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아무리 혜옥이가 타고난 ‘무골’에, 괴상망측한 능력을 지닌 특성 트리를 지녔다곤 해도.
이 정도의 신체 능력은 상식을 벗어나도 한참이나 벗어난 수준인데….
“싸부님?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기셨나요?”
김혜옥이 선보인 압도적인 신체 능력에 의구심이 치밀어 올라, 미간을 찌푸리고 있자.
갑자기 우뚝 멈춰선 내 모습에 걱정이 된 것인지. 김혜옥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녀의 순진무구한 시선과 마주하자, 나는 치밀어오른 의구심을 잠시 구석으로 치워버린 채 일부러 과장된 몸짓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저 내 팔뚝이 원래 이런 모습이었나 감상하던 중이었단다. 조금 더 잘생겼던 것 같기도 한데. 어째 옆으로 휜 것 같기도….”
“무슨 소리세요! 제 치유는 완벽하다구요! 그리고! 싸부님은 여전히 잘생기셨어요!”
내 입에서 괴이한 소리가 튀어나오자. 김혜옥은 펄펄 날뛰며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리곤 찾아온 민망한 부끄러움이 공포를 이겨낸 모양인지, 얼굴을 붉힌 그녀는 홱 고개를 돌려 성큼성큼 어둠에 잠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위철용이 정신을 차리면, 그 ‘무골’이라는 게 뭔지 제대로 물어봐야겠어.
전부터 생각해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김혜옥의 신체 능력은 상식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수준이야.
조금씩 멀어지는 김혜옥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노려보았다.
그러면서 화안금정을 발동시키자, 시야가 조금씩 황금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
캄캄한 어둠을 더듬어, 제법 길게 이어진 계단을 따라 얼마간 걸어 내려가자.
우리는 이전까지의 흐릿한 어둠이 귀여워 보일 정도로 더욱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지하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 걱정했었는데. 아무 일도 없었네요? 그럼 지금이라도 조명을 좀….”
더욱 시커먼 어둠이 드리운 지하실의 풍경에, 김혜옥은 덜덜 떨리는 손길로 품속을 뒤져 스마트폰을 꺼내려고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품속에서 스마트폰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의 두툼한 근육질 팔을 붙들었다.
“…아무래도. 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에 불편함을 느낀 분들이 계신 모양이다.”
어둠이 일렁거리는 지하실에선 역시나, 먼저 온 손님들이 살기를 흩뿌리고 있었다.
자욱한 어둠 너머로 살을 에는 듯한 강렬한 살기가 느껴졌다.
김혜옥의 앞으로 나선 나는 어둠 속에 숨어 다가오는 놈들을 향해, 조용히 어둠달을 빼 들었다.
《키에에엑!》
고막을 그대로 찢어발길 듯한 날카로운 괴성!
괴성 속에 깃들어 있는 노릿한 살기와 역겨운 짐승 냄새!
괴성 사이사이에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쯧쯧 혀 차는 소리!
내가 어둠달을 겨눈 것을 신호로 삼은 모양일까?
정적이 내려앉은 지하실에 때아닌 괴성이 울려 퍼지며, 어둠을 틈타 몬스터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피슛! 피슛! 피슛!
그렇게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쇄도해오는 것을 감지한 순간!
시커먼 내력이 어둠달의 창날을 타고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그와 동시에 어둠달을 움켜쥔 손이 번개처럼 움직여, 마치 바느질하듯 어둠을 꿰어 내었다.
《키르륵!》
무언가를 꿰뚫은 어둠달을 타고 질척한 피와 무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리곤 귀에 거슬리는 단말마와 함께, 전신이 북실북실한 털에 휘감긴 무언가가 바닥에 거칠게 나뒹구는 소리가 들려왔다.
“웨어배트라. 상당히 희귀한 놈들인데. 잘도 어디서 이렇게나 공수해오셨군!”
어둠 속에서 우리를 습격해온 몬스터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웨어배트’라는 놈이었다.
박쥐와 인간을 적절히 섞어 넣은 듯한 외형을 자랑하는 놈들은, 생긴 것에 걸맞게 어둠 속의 습격에 특화된 족속들이었다.
“혜옥아! 놈들의 발톱을 조심해! 아마 네 눈부터 노릴 거다!”
“누, 눈이요?”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청각으로 인해, 본능적으로 어둠을 이용할 줄 아는 웨어배트들은 언제나 가장 먼저 사냥감의 눈을 노리곤 했었다.
김혜옥에게 대강 놈들의 특성을 말해주며 경고한 나는 본격적인 전투에 대비하며, 황금빛 외골격을 끌어올렸다.
“싸부님? 조명은 안된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작전 변경이야! 놈들은 어차피 시각이 없거든!”
우리가 줄곧 조명 하나 없이 어둠 속을 걸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몬스터들과 마족들에게 굳이 우리의 위치를 광고해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웨어배트들과 접촉한 데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놈들에겐 시각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굳이 우리가 스스로 패널티를 고집할 필요가 사라진 상태였다.
“진짜요?! 진작 말씀하시지!”
내게서 조명을 켜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김혜옥은 굉장히 들뜬 목소리로 자신의 근육을 불끈 부풀렸다.
그녀의 우람한 굉배근이 아우성치며, 어둠 속에서 자신의 강렬한 존재감을 피력했다.
차돌 같은 이두와 삼두가 포효하듯 거칠게 꿈틀거리며 심상치 않은 기운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번-쩍!
갑자기 묘한 포즈를 취하며, 근육을 자랑하는 김혜옥의 기행에 의문을 느낄 새도 없었다.
그러한 의문이 머릿속에서 채 빠져나가기도 전에, 그녀의 외골격에서부터 에메랄드빛이 현란하게 번쩍이며 어둠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제야 좀 뭔가 보이네! 각오해! 이 못생긴 박쥐 놈들아!”
온몸에 휘황찬란한 녹색 빛을 휘감은 김혜옥은 웨어배트들을 바라보며 사납게 웃었다.
녹색으로 물든 새하얀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섬뜩하게 걸렸다.
위협적으로 부풀어 오른 근육에서 심상치 않은 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