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1화
“정말요?! 싸부님이랑 ‘같이’ 이 악랄한 악마종자들을 찢고 부순다니…! 끄르르르. 차, 참을 수 없다앗! 설악 아저씨들! 거기 꼼짝말고 있으세욧!”
-쿠콰아아앙!
잔뜩 흥분한 김혜옥은 눈에서 녹색 안광을 번뜩이며 설악 공격대원들을 향해 도약했다.
그녀의 육중한 몸을 받아낸 대리석 바닥이 과자처럼 바스라지며, 무너져내렸다.
갓 생성된 외골격에서 흘러내리는 에메랄드빛 마력이 로비 전체를 녹색으로 물들였다.
“호호홋호-홋호! 병들고 다친 자들의 연약한 육신! 부수고 고친다! 견갑골 크러셔!”
“으아아아악! 혜, 혜옥아. 제발 하다못해 강화 외골격은 좀 벗을 수 있게…. 크아악!”
김혜옥은 자신의 우람한 근육에서 비롯된 압도적인 폭력을 앞세워, 설악 공격대원들의 몸에 아로새겨진 부상과 상처를 멀끔히 치유하기 시작했다.
비명을 내지르는 설악 공격대원들의 몸에서 간혹 괴이한 소리가 울려퍼지거나, 허옇게 눈이 까뒤집어진 그들의 관절이 조금 기이한 방향으로 꺾이긴 했지만 말이야….
“…세상에. 기묘한 방식으로 치유를 한다는 보고는 익히 들었네만. 저런 식으로 ‘치유’를 하는 것이었을 줄이야.”
모범적인 헤드락 자세로 박정욱의 목을 우두둑 꺾는 김혜옥의 모습에 오한을 느낀 탓인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녀의 행위를 관망하던 강태백은 끔찍하다는 듯 가늘게 몸을 떨었다.
“뭐, ‘조금’ 폭력적이긴 하나, 보시는 것처럼. 혜옥이의 치유 효과만큼은 어지간한 치유사보다 월등히 뛰어납니다.”
어느 치유사보다 김혜옥의 치유가 훨씬 더 뛰어나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김혜옥에게 붙잡힌 설악 공격대원들은 허리가 ㄷ자로 접힌다든지, 갈비뼈가 이상한 모양으로 함몰된다든지, 목뼈와 척추가 동시에 있을 수 없는 방향으로 꺾인다든지 하는 수난을 당하긴 했지만.
계속된 격전으로 엉망으로 망가졌던 그들의 육신은 마치 질 좋은 포션을 통째로 들이키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완벽하게 치유되었다.
“환자의 몸에 가한 충격을 치유 에너지로 바꾸는 형식의 치유법이라고 했던가? 크흠…. 굉장히 독특한(?) 방식이긴 하나. 절대로 내 몸으로 직접 겪어보고 싶지는 않군.”
…그러게. 도대체 누가 저런 식으로 상처를 치료하고 싶겠어.
효과가 확실한 건 별개로, 개인적으로 별로 당해보고 싶지 않은 치료법이긴 하지.
불안한 예감을 느낀 것인지, 김혜옥을 바라보는 강태백은 계속해서 가늘게 몸을 떨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시선을 돌려 길드장실과 연결된 엘리베이터 쪽을 바라보았다.
“그것보다. 문제는 길드장실로 향할 방법이 사라졌다는건데….”
먼젓번 건물에서도 그랬듯, 놈들의 수뇌부가 주둔중인 길드장실은 보안상의 문제로 오직 전용 엘리베이터만으로 출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엘리베이터는 간악한 마족 놈들이 설치해둔 온갖 함정 때문에 도저히 써먹을래야 써먹을 수 없는 상태였다.
부서진 엘리베이터의 문에서 시커먼 촉수가 꿈틀거리는 것을 본 나는 머리를 괜시리 벅벅 긁었다.
“아까 미처 이야기를 끝내지 못했는데, 이번에도 비상구 따윈 설치해두지 않으셨겠죠?”
“애석하게도. 미안하지만 그런걸 굳이 설치해두는 성격이 아니라서 말일세.”
유영화에게 빙의했던 아모스의 수작질로 인해, 전성기에 비해 약화되긴 했지만.
그래도 강태백은 한때 대한민국 최강의 자리에 있던 인물이었다.
아마 자신이 기거하는 공간에 비상구 따위를 설치해둔다는 것을 그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겠지.
“…생각해보니 길드장실의 외벽은 유리창으로 되어있지 않습니까? 옥상에서부터 창문을 깨부수고 침투한다면.”
이번에도 길드장실은 모든 것을 굽어볼 수 있는 건물 맨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옥상에서부터 창문을 통해 침입하는 방법을 강태백에게 제시해 봤지만, 씁쓸하게 웃은 그는 대답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가능한 일일세. 먼젓번의 일로 외부의 침입에 대비하여, 외벽과 창문에 충격 반사 마법진을 포함해 온갖 값비싼 방어 시스템을 갖춰 놓았거든. 아마도 침입을 시도함과 동시에, 온갖 험한 꼴을 당하고 튕겨져 나갈 걸세.”
젠장. 자존심 때문에 비상구도 설치 안했다는 인간이 이상한데서 신중하기는.
그렇게 비싼 충격 반사 마법진까지 새겨놓았다니, 맙소사. 도대체 길드장실에 얼마나 돈을 쳐바른거야?
강태백이 새겨놓은 마법진들의 이름을 늘어놓자, 나는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돈지X의 결정체나 다름이 없었다. 지난번 침입 사건이 강태백에게 큰 트라우마를 불러일으켰는지. 늘어놓은 마법진의 가격만 생각해봐도 그는 길드장실의 외벽을 보호하는 데만 최소 수백억을 때려 박은 상태였다.
“유일한 통로인 엘리베이터는 마족놈들의 함정 때문에 길드장님께서 손수 부숴버리셨고. 길드장실에 방어 시스템을 워낙 철저하게 갖춰 놓으셔서 외부에서 침입하는 것도 어려우니. 뭐 답이 없는 상황인데요?”
“…유, 유사시 길드장실을 통째로 대피소로 활용할 생각에 비싼 돈을 들여놨으니, 당연한 거 아니겠나. 물론,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일세.”
땀을 삐질 흘려낸 강태백이 변명처럼 말한 것처럼 유사시 대피소로 활용하려고 했을 만큼, 길드장실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철옹성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참동안 강태백과 머리를 맞대며, 어떻게 침투해야할지 생각을 해봤지만. 딱히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한다…?
-콰아아앙!
“갸아아악!”
강태백과 머리를 맞대고 있으려고 하던 그 순간!
폭음과 함께 설악 공격대원 중 한 명의 구슬픈 비명이 로비에 전체에 울려 퍼졌다.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로비를 향해 시선을 돌려보니….
“세호 아저씨! 그러게 힘 빼지 마시라 했잖아요!”
“…으. 으어어어. 미, 미안해. 어지러워서 그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갑옷을 입은 건장한 체격의 공격대원의 몸이 엘리베이터(였던 것)의 금속 문에 박혀 있었다.
강태백이 부숴버린 길드장실로 통하는 엘리베이터의 옆에 있었던 평범한(?) 엘리베이터마저 덤으로 파괴된 상황에 강태백과 나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래도 둘의 대화로 미뤄보건대, 김혜옥 특유의 ‘치유’ 과정 중 일어난 사소한(?) 헤프닝인 것 같았다.
“그래도 엄청난 충격이 가해진 덕분에 금방 회복하시겠네요! 충격은 곧 치유 에너지가 되는 법!”
“그, 그래. 이, 이제 난 아무렇지도 않단다. 그러니 여기서 좀 빼주지 않으련?”
“넵! 팔 조심하세요!”
-꽈드드득!
김혜옥은 놀라운 괴력을 발휘하여, 엘리베이터의 큼지막한 금속 문과 완전히 하나가 되다시피 한 공격대원의 몸을 함몰된 엘리베이터 문에서부터 꺼내 주었다.
어마어마한 덩치가 금속 문에서 빠져나오자, 텅 빈 엘리베이터 내부의 휑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시커먼 어둠이 꿈틀거리는 공간엔 부서진 철골과 끊어진 전선들이 흉물처럼 흉하게 늘어져 있었다.
…잠깐만? 혹시 저거라면?
“길드장님. 방금 길드장실에 엄청난 보안설비를 설치해 두셨다고 하셨었죠?”
“그렇지. 굉장한 돈을 들여 현존하는 보안설비 중 가장 실한 놈만 해뒀다네. 그러니 지금 자네와 내가 골머리를 썩히는 중이 아니었던가.”
“그렇죠? 그렇다면, 엄청난 마력과 전력을 필요로 하겠네요”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당연히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잠깐.”
내 입에서 ‘전력’이란 말이 흘러나오자.
신경질적인 표정을 지으며, 이맛살을 찌푸리던 강태백의 눈이 순간적으로 크게 떠졌다.
그 역시, 내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뒤늦게나마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래. 값비싼 보안설비를 유지하는 데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 법이지! 자네가 무슨 말을 의도한 것인지 이제야 알겠군!”
강태백은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설악 공격대원이 처박혔던 엘리베이터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곤 그는 튀어나온 전선과 철골 등을 유심히 관찰하더니, 이내 입매를 뒤틀었다.
“역시 놈들도 이런 것까진 생각하지 못했던 게 분명하군. 놈들은 기존의 전력설비를 그대로 사용하는 중일세. 마력원 또한 마찬가지야!”
“그렇다면, 그것들을 여기서 끊어버린다면. 보안설비들은….”
“당연히 제 기능을 못 하겠지! 전력과 마력만 차단한다면. 밖에서부터 돌입하는 것도 별 문제가 되지 않을걸세!”
예상대로였다.
길드장실에 설치된 보안설비들은 엄청난 양의 전력과 마력을 잡아먹는 놈들이었다.
보안설비들이 워낙 어마어마한 양의 에너지를 잡아먹었기에, 강태백은 애초부터 이곳 신축 건물을 설계하며 그것들에게 전력과 마력을 공급하는 동력원을 자체적으로 설치해 둔 상태였다.
…그렇게 방어설비에 동력을 공급하는 것들을 이쪽에서 파괴할 수만 있다면!
“혹시 그것들을 설치해 둔 위치는 기억하고 계십니까?”
“당연하지! 외부의 침입에 대비해, 업체까지 바꿔가며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설치해 둔 놈들일세. 그것들이 어디에 설치되었는지 아는 이는 나 말곤 아무도 없지.”
로비 구석에 비치된 안내 지도로 다가간 강태백은 금속판으로 된 지도를 뜯어냈다.
시퍼런 마력이 주입되어 불꽃이 이글거리는 그의 손가락이 지도의 특정 지점들을 녹여냈다.
“마력원은 지하의 비밀 공간에 설치해 두었네. 전기실의 비밀문을 통해 내려가면 될 거야. 전력원은 3층의 직원 휴게실을 통해 접근하면 되네만….”
“그렇다면, 저는 마력원 쪽을 맡겠습니다. 아무래도 소수로 움직이는 것은 그쪽이 편할 것 같아서요.”
“자네 정도라면 어떤 위험이 있든 능히 뚫고 나올 수 있겠지. 좋아! 전력 쪽은 맡겨두게. 그럼. 다 마무리 짓고 옥상 위에서 보세나!”
계획이 정해졌으니, 이제 움직일 시간이었다.
강태백에게서 동력원들이 매설된 장소를 들은 우리는 인원들을 둘로 갈랐다.
전력 쪽을 맡은 이들은 강태백을 위시한 설악 공격대원들 전원.
마력 쪽을 맡은 이들은 나와 김혜옥 단둘 뿐이었다.
동력원을 설치해 둔 장소가 극비중의 극비인만큼, 놈들이 그것들을 보호하기 위해 인원을 배치해놨을리는 없겠지만.
좁디 좁은 통로에서 싸움이 벌어질 경우, 아무래도 다수의 인원보단 소수로 움직이는 쪽이 더 대등하기 편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김혜옥과 함께, 굳이 지하의 마력원 쪽을 맡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게다가 널찍한 직원 휴게실이라면, 아무래도 지하에 비해 설악 공격대원들과 강태백이 마족들을 상대하는 진형을 짜기도 편할테니까….
“옥상에서 뵙지요. 무운을 빌겠습니다. 길드장님. 서두르자. 혜옥아!”
“…드디어! 옙! 싸부님! 놈들을…. 별모양으로 예쁘게 찢고 부숴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