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0화
“정말 너무하셨어요! 싸부님! 놈들의 피가 무슨 색인지 확인할 절호의 기회였는데!”
구속이 풀려난 김혜옥은 거센 콧김을 쒸익쒸익 뿜어내며, 항의를 표해왔다.
영롱한 에메랄드빛 귀화가 타오르는 두 눈에 광폭한 광기가 섭섭하게 번들거리는 것이 적들을 찢고 부수지 못해 어지간히 아쉬웠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다 너를 생각해서 그런 거야. 애초에 넌 전투 요원으로 따라온 게 아니잖니.”
갈고리 모양으로 오므린 손가락을 위협적으로 치켜든 김혜옥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김혜옥을 강제로 구속까지 해가면서 전투의 현장에서 떨어뜨린 이유는 간단했다.
아무리 그녀가 인간을 초월한 박력을 보여주긴 하나, 냉정히 말해서 김혜옥은 아직 외골격조차 형성하지 못한 초짜 중의 생 초짜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나치게 강해진 설악 공격대원들의 활약 속에 너무 쉽게 토벌되었긴 하나.
마족들이 이곳에 풀어둔 전력은 어지간한 상위 공격대조차 버거울 정도로 강력했으니까….
“그래도 전…! 무고한 사람들을 해친 놈들에게 정의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단 말이에욧!”
글쎄….
어째 정의가 살아있다는 게 아니라, 폭력이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하는 눈치인데?
김혜옥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연신 자신의 손가락을 꺾어 우두둑 소리를 내었다.
강마병들과 몬스터들의 시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엔 눈앞에서 먹잇감을 도둑맞은 불곰의 그것과도 같은 분노와 아쉬움이 듬뿍 묻어나오고 있었다.
“네가 아무리 평범한 사람들보다 강하다곤 해도, 아직 네가 외골격을 형성하지 못한 상황이니만큼 스승된 입장으로서 나는 혜옥이, 널 아직 놈들과의 전투에 내보낼 순 없단다.”
얌전히 내 타이름을 듣는 김혜옥은 고개를 돌려, 강마병들의 시신이 산처럼 켜켜이 쌓인 로비 중앙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녀의 시선은 산처럼 쌓인 시신 사이를 누비는 설악 공격대원들을 향해 있었다.
“치료사 일을 하며 남들을 치유하다 보면, 자연히 레벨이 오르고 성장을 할 수 있….”
“알겠어요. 싸부님. 그럼. 싸부님 말씀대로 지금 제가 ‘해야 할 일’을 해야겠네요.”
설악 공격대원들을 바라보는 김혜옥의 눈이 한순간 가늘게 좁혀졌다.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내게 고개를 한번 꾸벅 숙이더니….
강마병과 몬스터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있는 설악 공격대원을 향해, 힘차게 도약했다.
-쿠와앙!
거의 2층 천장에 닿을락 말락 높이 도약한 김혜옥의 육중한 거구가 뚝 떨어져 내리자.
로비 바닥에 깔린 질 좋은 대리석 바닥이 마치 과자처럼 바사삭 부서졌다.
어지간한 몬스터 이상의 박력을 온몸으로 내뿜는 그녀의 등장에, 김혜옥과 정면으로 마주한 설악 공격대원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혜, 혜옥이었구나. 휘유. 나, 난 또 놈들이 다시 나타난 줄 알았지 뭐니.”
“종필이 아저씨! 의사 쌤이. 아니! 제가 뭐라 그랬어요! 아직 몸이 완전하지 않으니 무리하지 말라고 그랬죠!”
-콰아악!
설악 공격대원, 홍종필의 눈앞에 떨어져 내린 김혜옥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발을 솥뚜껑만 한 손으로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오닉스 길드제 『강화 외골격』을 착용한 덕에, 홍종필의 덩치도 그리 작은 편이 아니었지만.
김혜옥은 그런 홍종필의 오른발을 붙잡아,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는 것처럼 거꾸로 들어 올렸다.
“으, 으어어억! 혜, 혜옥아! 다리! 다리!”
“그래요! 보세요! 이 다리! 부러지셨잖아요! 제가 그렇게 조심하시라 경고했는데!”
『강화 외골격』의 무식한 출력을 견뎌내지 못해 부러진 탓인지.
김혜옥에게 붙잡힌 홍종필의 왼쪽 다리는 그녀의 말대로 기이한 방향으로 덜렁거리고 있었다.
안쓰러운 눈빛으로 잠시 그의 부러진 다리를 바라본 김혜옥은 화를 벌컥 내더니, 이내 어마어마한 힘으로 홍종필의 몸뚱이를 허공으로 휘익 던져 올렸다.
“치유사 말 안 듣는 나쁜 어른이에겐! 상냥한 치료법 따윈 없다구욧! 홋호!”
김혜옥은 불길한 녹색 안광을 피어오르며, 높이 던져진 홍종필의 몸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그녀는 자세를 틀어 주먹을 꽈악 움켜쥐더니, 큼지막한 주먹으로 떨어져 내리는 그의 왼쪽 다리를 사정없이 난타하기 시작했다.
-빠각! 빠그작! 빠드득!
어지간한 흉기보다 더욱 위력적인 김혜옥의 주먹이 홍종필의 다리를 후려칠 때마다, 뼈가 아작나고 으스러지는 소리가 연속으로 들려왔다.
어찌나 강한 힘으로 후려치는지, 치유를 가장한 무지막지한 폭력에 노출된 홍종필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푸콰쾅!
굉음과 함께,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되었던 홍종필의 육신이 바닥에 뚝 떨어졌다.
육중한 『강화 외골격』 탓에 바닥을 부수고 쳐박힌 그의 몸 곳곳에선 알 수 없는 괴이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파츠츠츠츠.
녹색 빛이 홍종필의 몸을 포근하게 감싸자, 부러져서 덜렁거리던 왼쪽 다리부터 낙하의 충격으로 입었던 타박상까지 그가 입었던 모든 부상이 완벽하게 치유되었다.
“끄…. 끄으으 고, 고맙다 혜옥아.”
“아녜요! 저는 치유사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에요! 다음부턴 다치지 않게 몸조심하세요!”
그렇게 몸이 치유된 홍종필은 간신히 후들거리는 몸을 일으켜, 김혜옥에게 감사를 표했다.
몸을 조금 부들부들 떨긴 했지만, 그는 부러졌던 왼쪽 다리로 멀쩡히 바닥을 딛고 있었다.
홍종필로부터 감사 인사를 받은 김혜옥은 생긋 웃으며, 무자비한 폭력을 선사한 손을 탁탁 털었다.
“어멋? 벌써 레벨업이네? 고마워요 종필이 아저씨! 흐으읍!”
-찌지직!
김혜옥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레벨업’을 언급한 순간. 그녀의 거대한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옷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김혜옥의 신장이 어림잡아 5cm는 너끈히 쭈욱 자라났다.
근섬유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와 함께, 몸을 뒤덮은 근육이 더욱 크고 아름다워졌다.
“흐응. 흐응. 『전투성장』은 이제 끝까지 다 찍었고. 싸부님이 말씀하셨던 외골격까진 조금 남았네.”
『전투성장』이라고? 어쩐지 이상하다 했더니. 계속해서 ‘커진’ 이유가 다 특성 때문이었어?
육신을 저렇게까지 살벌하게 키워내는 특성이 있다니, 도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특성 트리냐!
…아니, 그것보다 외골격까지 ‘조금’ 남았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김혜옥에 눈앞에서 보여준 극적인 변화와 그녀가 중얼거린 혼잣말에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혼란이 찾아왔다.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입을 꾹 닫았기에, 혼잣말이 밖으로 새어나가진 않았지만. 당황과 황당의 감정을 품은 독백이 머릿속을 꽉꽉 채워버렸다.
“마침 ‘경험치’ 역을 해줄 분들도 많으니까. 힘내야겠어! 홋호! 잡았다! 경험치…. 아니 부상자!”
몸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성장에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 김혜옥은 혀를 내밀어 섬뜩하게 입술을 핥았다.
그리곤 그녀는 다짜고짜 아름드리 통나무와도 같은 두 팔을 휘둘러, 지나가던 설악 공격대원을 포획하였다.
“호호호홋호. 상처…. 상처를 보자!”
“으아아. 혜옥아! 나, 난 다치지 않았…. 으어어어!”
김혜옥에게 붙잡힌 설악 공격대원은 바들바들 몸을 떨며, 자신의 상처를 가렸지만.
김혜옥은 연신 혀를 날름거리며, 솥뚜껑보다 큰 손으로 우악스럽게 설악 공격대원의 연약한(?) 팔을 붙잡았다.
녹색 안광이 이글거리는 그녀의 눈이 설악 공격대원의 훤히 드러난 상처를 훑었다.
“발견했다! 상처! ‘치료’ 한다앗!”
“으아아아!”
-꾸꽈꽈꽝!
비명을 내지른 설악 공격대원에게 김혜옥은 문답무용으로 거대한 주먹을 휘둘렀다.
ㄱ자 모양으로 꺾인 설악 공격대원의 입에서 피와 타액이 골고루 섞인 액체가 푸확 뿜어졌다.
희생자(?)를 무자비하게 난타하는 김혜옥의 눈에서 녹색 광채가 더욱 더 강렬해졌다.
치료를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설악 공격대원의 육신을 완전히 결딴내고 싶은건지.
길게 빼문 혀를 음험하게 날름거리는 김혜옥의 얼굴에선 광기마저 느껴졌다.
“아으으읏! 아, 안돼에에엣!”
“홋호! 고통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상처! 파괴한다아앗!”
…파괴라니. 그게 치료사가 할 말이냐?
희생자(?)를 치유한 김혜옥은 그야말로 비호와 같이 몸을 놀리며 계속해서 설악 공격대원들을 포획해, 그녀 특유의 무자비한 ‘치료’를 시행했다.
설악 공격대원들의 비명과 함께, 영롱한 에메랄드빛이 로비를 녹색으로 화려하게 물들였다.
김혜옥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괴이쩍은 파열음이 고요한 로비를 시끄럽게 채워갔다.
“…또다시 레벨어!”
얼마나 많은 설악 공격대원들이 우악스러운 손에 붙잡혀 ‘치료’ 당했을까?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눈을 번쩍인 김혜옥의 입에서 득의양양한 기합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몸이 녹색으로 휘황찬란하게 빛나더니, 김혜옥의 소가죽보다 더 질긴 피부 위에 무언가 반투명한 것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꽈드드득!
김혜옥의 피부 위에 생성된 반투명한 ‘무언가’는 그녀의 크고 아름다운 근육을 그대로 모사한 듯한 갑옷의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두른 에메랄드빛 마력이 번들거리는 반투명한 갑옷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외골격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외골격을 벌써 생성했다고? 이게 말이 돼?”
과거로 회귀한 나 역시 성장속도가 상식을 초월한 수준으로 빠른 편이었지만.
김혜옥의 성장은 그렇게 상식을 초월한 나조차도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각성한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외골격을 형성해버린 그녀의 모습에, 내 입에선 경악이 뒤섞인 혼잣말이 스르륵 흘러나왔다.
“사춘기 소녀는 잠시만 눈을 떼도 무럭무럭 자라나는 법이니까요! 싸부님! 말씀하신대로 외골격인가 뭔가를 만들어 냈으니! 이제 적극적으로 놈들을 찢어도 되겠죠?!”
거대한 근육 형태의 녹색 외골격을 두른 김혜옥은 나를 바라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녹색의 귀화가 강렬하게 이글거리는 그녀의 눈에선 당장이라도 적들을 찢고 부수고 싶다는 투지가 강렬하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뭐, 뭐어. 외골격을 형성했다면. ‘최소한’의 기준을 달성한 셈이니까…. 그, 그래도 위험하니 나와 같이 움직이는게 낫겠다.”
“정말요?! 싸부님과 ‘같이’ 적들을 찢고 부술 수 있다니! 이얏호-오!”
괴성을 터뜨린 김혜옥의 몸에서 괴이한 녹색 마력이 불꽃처럼 화르륵 타올랐다.
로비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린 그녀의 목소리 때문에, 현장을 수습하던 설악 공격대원들의 몸이 순간적으로 휘청거렸다.
…것보다. 같이 찢고 부수겠다는 말은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말이지.
뭐, 저렇게까지 어쩔 수 없나…?
잔뜩 흥분한 김혜옥이 우직 쾅쾅 바닥을 부숴내는 모습에 순간적으로 쓴웃음이 지어졌지만.
저렇게까지 내게 호의를 표해오는 그녀의 모습이 스승된 입장으로서 그다지 싫지만은 않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나는 김혜옥의 어깨를 잡아, 흥분한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래. 나머지 인원들도 다 치료해드리고. 놈들을 찢고…. 부수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