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7화
영혼과 육신의 왜곡된 관계를 올바르게 바로 잡는 특성 『육체의 영혼』,
그리고 망자들을 안식의 땅으로 인도하는 스킬 『원혼 제령술』이 동시에 발동되자.
고깃덩이가 되어버린 육신에 강제로 붙들려있었던 망자들의 넋이 해방되었다.
《아아. 따스해.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네…. 이제야 안식을 취할 수 있겠군.》
해방된 이들의 영혼은 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내게 감사를 표하더니, 이내 따스한 황금빛 속에서 천천히 성불해갔다.
그들의 영혼이 그렇게 하나둘씩 성불하여 사라진 순간, 해방된 망자들의 영혼이 세상에 남겨둔 한과 미련이 『업』의 형태가 되어 내 몸속으로 흡수되었다.
“…그랬었군. 그런 일이 있었어.”
낯설고 생소한 기억들이 내 머릿속으로 물밀 듯 범람해오기 시작오자.
나는 도축장에 매달려 있던 망자들이 어떤 이들이었는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또 일주일이란 시간동안 이 음침한 본사 건물 내부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등등을 알아낼 수 있었다.
본사에서 열심히 일하던 사원들은 짐승처럼 도축되어 마족들의 간식거리로 전락해렸으며.
본사에 남아있던 헌터들은 노리개가 되어 장난감처럼 희롱당하다 강마병으로 개조당해버린 상태였다.
…마족 놈들이 이곳에서 저지른 만행은 우리가 짐작했던 것보다 더욱 심각했다.
“노, 놀랍군. 이들의 아픔이…. 고통이 더는 느껴지지 않다니.”
“자네도 짐작하지 않았던가. 설용호의 능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말일세. 허 참. 언제나 사람을 다양한 방법으로 놀래키는 재주를 지녔단 말이야.”
박정욱은 할 말을 넋을 잃은 표정으로 안식이 내려앉은 도축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느새 이쪽으로 다가온 강태백은 쓰게 웃으며 그렇게 넋을 잃은 박정욱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리곤 그는 잠시 경외감에 찬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도축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경리과의 조 과장, 청소부 박씨까지…. 엄청난 짓을 저질러 놓았군. 무고한 희생된 이들의 영혼이 부디 안식을 찾기를.”
내부를 살핀 강태백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희생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그들이 이름을 중얼거리곤 명복을 빌어주었다.
침중한 목소리로 명복을 비는 그의 몸에서 시퍼런 불길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지금은 이런 식으로 밖에 자네들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해주게. 모든 일이 끝나면 반드시 제대로 된 장례를 치러주겠네.”
-화르르륵!
엄숙하게 묵념한 강태백은 몸에 두른 불꽃을 부려, 그들의 시신을 모조리 태워버렸다.
강태백의 끓어오르는 분노를 상징하는 것인지, 희생자들의 시신을 태우는 푸른 화염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타올랐다.
“…이만하고. 나중에 다시 오세나. 이들의 목숨값을 받아내기 위해서라도 서둘러야하네.”
고개를 돌린 강태백은 입술을 깨문채,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를 노려 보았다.
분노가 이글거리는 눈가엔, 흘러내린 눈물이 푸르른 화염 속에서 구슬프게 타오르고 있었다.
“놈들의 시신을 처리하고, 다시 움직이세나. CCTV의 사각지대는 저쪽일세.”
“아뇨. 더 이상 은밀히 움직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애써 감정을 수습한 강태백은 다시 ‘은밀하게’ 움직일 것을 지시했으나.
망자들의 ‘업’이 남겨준 기억들을 목격한 나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라고? 자네 지금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이미 들킨지 오래라는 소립니다. …애초부터 이들의 함정이었거든요.”
그랬다.
마족 놈들은 우리가 납치된 신지현과 인사팀을 구출하기 위해, 이곳에 쳐들어 올 것을 처음부터 알고 대비하고 있었다.
3층 보안설비가 유난히 허술했던 것도, 하필 애매한 3층에 『도축장』을 만들어 어리숙한 놈들을 배치해둔 것도, 모두 마족 놈들의 장난이자 함정이었다.
“…그랬던 건가? 처음부터 우리가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이지. 이거 괜히 ‘은밀히’ 잠입한다고 힘을 소모했군 그래. 어울리지도 않게 말일세.”
“놈들의 방식대로라면, 일부러 이런 식으로 화를 돋운 뒤. 다음 층에서 잔뜩 열이 받아 흥분한 상태인 우리를 성대히 환영해 줄겁니다.”
“그래. 자네가 말한대로 놈들이 그런 ‘유희’를 좋아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함정에 빠진 것을 알고 난 뒤로도 우리는 그리 동요하지 않았다.
잠입 계획이 발각되었다는 소리에도 강태백은 오히려 잘 됐다는 듯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놈들이 우리 길드에 오랫동안 잠입하기도 했었으니. 우리의 ‘수준’에 맞춰 적절히 준비를 해뒀겠지…. 하지만 말이야. 세상은 언제나 계획대로만 돌아가는 말랑한 곳이 아니거든.”
주변을 둘러본 강태백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우리에게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더 숨길 필요도 없겠군. 오닉스 길드에서 얻어온 ‘그것’을 착용하게.”
*****
《그분들의 말씀대로 제발로 찾아왔군. 너희 필멸의 족속들은 역시나 어리석단 말이야.》
어둠이 깃든 계단을 내려가, 2층으로 진입한 순간.
머릿속에 웅웅 울려오는 오만한 목소리가 우리를 맞아 주었다.
《몰래 숨어들었다고 생각했겠지? 크흐흐 어리석은 필멸자 놈들. 안타깝게도 이미 너희들의 움직임은 모두 파악해둔 상태였느니라.》
1층과 2층을 통째로 터 놓은 거대한 로비엔 엄청난 병력이 섬뜩한 살기를 피어올리며 우리를 환영해주고 있었다.
영혼을 잃어버린 강마병들과 흉포하게 울부짖는 이름 모를 몬스터들
그리고 오만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해골 형상의 마족까지.
누가봐도 우린 완벽하게 함정에 빠진 쥐새끼와 같은 모양새였다.
《위층에 꾸며둔 도축장은 인상적이었나? 너희 필멸자들이 그런걸 좋아한다해서 제법 신경을 좀 썼지.》
이미 다 잡은 물고기를 보는 듯, 오만함이 깃든 표정이었다.
해골 밖에 남지 않은 얼굴이 인상적인 마족은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연신 히죽거리며 도발하듯 중얼거렸다.
연신 떠벌이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주변을 포위한 마족들의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제법 머리 수가 많다만, 어차피 한놈 빼고는 별것도…. 뭐…?》
바로 그 순간, 냉혹하게 무기를 휘두른 설악 공격대원의 칼날이 주변을 포위한 강마병의 단단한 육신을 반으로 썩둑 갈랐다.
마력으로 강화된 육신이 너무도 허무하게 반으로 갈라졌다. 시커먼 피가 주르륵 바닥을 적셨다.
《…나름대로 숨겨둔 수는 있었던 모양이군. 하지만 그래봐야. 네놈들의 수준은 이미 계산해둔 바! 이것도 계산 범위에 불과하지! 놈들을 붙잡아!》
“그래. 누가 사냥꾼인지 보여줄 시간이다.”
스산한 한기가 박정욱의 몸에서부터 폭사되었다.
그의 주변을 둘러싼 설악 공격대원들의 몸에서도 시린 살기가 폭사되듯 터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