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높으신 분들…?”
김혜옥의 시무룩한 목소리를 들은 강태백은 낮게 으르렁거리며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제 권위를 침범당한 늙은 사자의 서슬 퍼런 분노가 격렬한 불길이 되어 시퍼렇게 타올랐다.
“그래. ‘높으신 분들’의 결정으로 신 팀장에게 징계가 내려졌단 말이지….”
“열흘, 아니 일주일이란 시간은 그들에게 너무도 충분했을 테니까요.”
본디 태백 길드에서 팀장급의 인원에게 징계를 내리는 것은, 반드시 길드장의 동의를 구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강태백이 게이트에서 ‘실종 처리’된 이후로 일주일이란 시간이 지나버린 상태였기에, 놈들은 너무도 손쉽게 신지현에게 징계를 내릴 수 있었다.
“그래…. 일주일이란 시간은 놈들에게 너무도 충분한 시간이었겠지. 길드장 자격심사 재심의도 날치기로 처리되었겠군. 이거 보기좋게 한 방 먹었어.”
이를 부드득 간 강태백은 허탈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보통은 게이트 내에서 실종된 지 일주일이 지날 경우, 사망처리하는 것이 기본인 데다.
뭣보다 그는 실종 처리되기 전까지 태백 길드의 ‘높으신 분’들로부터 『길드장 자격심사 재심의』 대상자로 낙인찍혀있는 몸이었다.
‘실종’ 처리된 강태백이 일주일 동안 자리를 비운 동안, 놈들이 무슨 짓을 했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보나 마나. 강태백을 길드장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새로운 이를 길드장으로 추대했겠지.
신지현에게 징계를 내린 것도 그녀를 본보기로 삼아, 반대세력을 억누르겠다는 의도일 테고.
“하루아침에 백수 신세라니, 이 나이 먹곤 재취업도 힘든데 말이야.”
강태백은 잠깐 사이 10년은 늙어버린 표정으로 허탈하게 웃었다.
시답지 않은 농담을 자조적으로 뇌까리는 그의 목소리에선 공허한 감정이 뚝뚝 묻어나왔다.
습관적으로 주머니를 뒤적인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미간을 꾹꾹 억눌렀다.
“조금 전에 사무실이 망했다고 그랬지? 매니저님 말고 다른 이들도 끌려간 거야?”
중간에 나와 김혜옥 사이에 끼어들었던 강태백이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김혜옥에게 그동안 일어난 일에 관해 물었다.
…신지현이 관리하는 사무실엔 그녀 말고도 좋은 표적들이 많았으니까.
“네…. 청소부 아저씨께 여쭤보니까. 제가 다희 씨랑 설악 공격대 아저씨들이랑 개심 겸 재활 훈련하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본사에서 나왔다는 사람들이 우리 사무실 직원들을 싹 다 끌어갔대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가라앉아선지, 아니면 아픈 추억이 떠오른 모양인지.
김혜옥의 목소리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착 가라앉아 있었고 내용 또한 그리 밝지 않았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태백 길드를 장악한 놈들은 그녀와 설악 공격대가 자리를 비운 사이를 노려서 신지현의 사무실을 완전히 다 털어간 모양이었다.
…그나마, 화를 피한 이들이 있다는 게. 다행이긴 하다만.
신지현 일행이 붙잡혀 간 것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닌데 말이지.
길드 운영부에서 길드원에게 내릴 수 있는 ‘징계’에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놈들이 눈엣가시 그 자체였던 신지현을 그리 인도적으로 대할 것 같지는 않았다.
-까득.
마족 놈들에게 놀아난 탓일까. 아니면 내 휘하로 거둬들였던 이들이 화를 입은 탓일까?
잡혀간 신지현과 그 일행들의 안위를 생각하자, 이가 절로 갈리며 속이 버쩍버쩍 메말라갔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용암처럼 들끓어 올랐다.
“죄송해요. 싸부님. 정욱이 아저씨랑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는데. 오히려 쫓기는 몸이 되어버렸어요. 너무 막막하길래. 아저씨들이랑 싸부님이 실종된 게이트까지 오긴 했는데….”
용암처럼 들끓어 오른 분노가 내 얼굴을 흉악하게 일그러뜨리자.
스승의 분노를 감지한 김혜옥이 변명하듯,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일에 대해 늘어놓았다.
그녀의 입에서 이곳까지 찾아온 일에 대한 경위가 흘러나온 순간.
나와 강태백은 동시에 김혜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혼자 온 게 아니었어?”
“설마 설악 공격대원들과 같이 온 겐가?!”
“네? 네에. 다, 다 같이 왔는데요. 왜, 왜요?”
…정말이지. 불행중 다행이로군.
역시 대놓고 나가 죽으란 법은 없다는 건가.
김혜옥이 전해준 정보에 나와 강태백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광기와 살의가 깃든 사나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아무리 내가 강력한 권능을 손에 넣었다곤 하나, 나와 강태백 단 두 명이서 무턱대고 신지현이 끌려간 태백 본사 건물로 쳐들어가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설악 공격대원들의 전력이 더해진다면?
“미안하지만. 박정욱 산군에게 안내해 줄 수 있겠나? 어쩌면 일이 수월하게 풀릴지도 모르겠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인지, 강태백의 입가에 깃든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김혜옥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시퍼런 귀화가 광기를 품고 이글거리고 있었다.
*****
김혜옥의 안내에 따라, 박정욱이 주둔하고 있는 거점으로 걸어가자.
추레한 몰골의 설악 공격대원들이 불길이 피어오르는 드럼통 주변에 앉아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김혜옥의 말대로 훈련 도중에 그대로 도주한 모양인지, 그들은 하나같이 땀에 젖은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사, 살아있었군. 그럼 그렇지! 자네가 그리 쉽게 목숨을 잃을 리가 없지!”
멀리서부터 강태백의 얼굴을 발견한 박정욱은 한달음에 달려와 그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상황이 급박해서 그런지, 아니면 이중환의 영혼과 자아가 섞인 탓인지.
뜨거운 눈물을 줄줄 흘리는 그의 입에선 오래된 친우를 대하는 말투가 흘러나왔다.
“멋대로 죽은 사람으로 만들지 말게, 내가 어디 그리 쉽게 죽을 놈인가?”
한때 부하였던 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괴이쩍은 말투가 불쾌할 법도 하지만.
놀랍게도 강태백은 히죽 웃더니, 그 역시 마치 오래된 친우를 대하는 듯 친근한 말투로 박정욱과 가벼운 포옹을 나누었다.
“그래! 내 어린 시절부터 태백이 자네를 얼마나…. 크으윽! 죄, 죄송합니다. 길드장님!”
뒤늦게 제정신이 돌아온 모양인지, 자연스레 강태백과 포옹한 박정욱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화들짝 놀란 그는 대단히 당황한 몸짓으로, 후다닥 강태백에게서 떨어졌다.
“새삼스레 왜 그러는가? 어렵게 대하지 말게. 따지고보면 자네와 난 나이도 비슷하지 않나.”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길드장님께 그런 말투를….”
“길드장은 무슨. 이제 난, 늦은 나이에 직장을 잃어버린 백수에 불과하다네. 말 편히 하게.”
박정욱을 대하는 강태백의 태도가 그답지 않게, 장난기가 넘치는 것으로 미뤄보건대.
아무래도 강태백은 박정욱의 말투와 행동에서 잃어버린 벗의 그리운 향취를 느낀 모양이었다.
박정욱이 어쩔줄 몰라하며, 쩔쩔매는 사이 강태백은 그의 모습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도 정말. 정말 다행일세. 자네들이라도 이렇게 무사하니 말이야.”
제대로 된 장비조차 갖추지 못한 채, 잔뜩 지친 모습으로 추레한 운동복만을 걸치고 있는 몰골이 ‘무사하다’는 말과는 제법 거리가 있어 보였지만.
강태백은 진심으로 다행이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싼 설악 공격대원들을 바라보았다.
공격대원 한명 한명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주름진 눈가에 일순간이나마, 약간의 습기가 맺혔다.
“정말 미안하네만….”
“기, 길드장님? 이, 일어서십쇼.”
그렇게 설악 공격대원들의 얼굴을 훑어보던 강태백은 갑자기 털썩 무릎을 꿇었다.
한때 세상을 호령하던 거인이 무릎을 꿇은 모습에, 박정욱과 설악 공격대원의 입에서 경악이 튀어나왔다.
“이제 아무것도 없는 늙은이지만, 한때 자네들을 이끌었던 이로서 한 가지만 부탁하곘네. …부디 이 늙은이에게 힘을 빌려주지 않겠나?”
강태백의 행동은 설악 공격대원들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의 허리가 굽어지며, 머리가 천천히 바닥에 닿자.
어째선지 그것을 지켜보는 설악 공격대원들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어갔다.
“이, 일어나십쇼. 길드장님! 그럼요! 당연히 힘을 빌려드리겠습니다.”
“저희가 누구 덕에 이렇게 강해졌는데요! 걱정 마십쇼! 저희 목숨은 원래부터 길드장님 겁니다!”
길드에 대한 충성도가 남다른 이들이 모인 곳이 바로, 설악 공격대이니 만큼.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강태백의 ‘부탁’은 놀라운 효과를 발휘했다.
말없이 눈물을 줄줄 흘려대는 박정욱을 필두로, 설악 공격대원들 전원은 대단히 감동한 목소리로 강태백에게 자신들의 목숨을 기꺼이 내주겠노라 맹세했다.
“그래…. 고맙군. 자네들 같은 이들이 아직 내게 남아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아닙니다. 저희 역시, 놈들에게 그리 좋은 감정은 없죠. 길드장님 부탁이 아니더라도. 놈들과 싸우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질 준비가 되어있던 차였습니다.”
설악 공격대원들의 맹세를 들은 강태백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킬수록 그의 입가에 깃든 훈훈한 미소가 사나운 광기를 품고 일그러졌다.
그의 사나운 미소와 마주한 설악 공격대원들의 입가에도 광기에 찬 미소가 하나둘 씩 떠올랐다.
“고맙네. 마침 내게 좋은 장비들이 들어왔으니. 어디 한번 멋지게 날뛰어 보세나.”
사나운 웃음을 지은 강태백의 손엔 황태용과의 계약이 적힌 계약서가 나풀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