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4화
호기심과 기대에 찬 강태백의 눈빛을 배경 삼아, 손잡이에 승천하는 용이 음각된 상자를 열려고 했으나.
애석하게도 우리에겐 두 번째 보상을 느긋하게 감상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투콰아아앙!
보상 상자의 손잡이에 막 손을 가져다 대려던 순간, 어디선가 갑자기 폭음이 터졌다.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폭음이 들려옴과 동시에 화안금정의 권능으로 황금빛으로 물든 시야가 시릴듯한 경고를 보내왔다.
“기습입니다! 충격에 대비하세요!”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내리는 육중하면서도 흉맹한 공격!
의문을 표할 새도,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었다.
금빛으로 물든 시야에 감지된 공격은 그런 사치스러운 여유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를 까득 깨문 나는 외골격을 끌어올리며, 강태백에게 다급히 경고를 보냈다.
-꽈과광!
내 경고를 받은 강태백이 굳은 얼굴로 외골격을 끌어 올림과 동시에.
하늘 저 높이에서부터 거대한 무언가가 나와 강태백 사이로 추락하듯 뚝 떨어져 내렸다.
일순간 세상이 정지되었나. 싶더니, 이내 어마어마한 충격이 대지를 덮쳤다.
-쿠르르릉!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무언가에 직격당한 대지가 폭음과 비명을 토했다.
지진이라도 난 듯, 절규를 토해내는 대지가 거세게 우르릉 흔들렸다.
높게 솟구친 흙먼지와 시커멓게 피어오른 연기가 세상을 어둡게 물들였다.
“드디어 찾았다. 이 쥐새끼같은 놈들!”
시커멓게 피어오른 연기 사이에서 마치 도깨비불과도 같은 두 개의 녹색 귀화가 타올랐다.
그리곤 마치 성난 짐승이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 억눌린 광기가 이글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거대한 덩치가 무너진 지반 아래에서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잠깐만. 어째 목소리랑 실루엣이 과하게 익숙한데?
“이 악독한 놈들아! 우리 잘생긴 싸부님을 돌려줘!”
시야를 어둑하게 물들인 먼지와 연기를 헤치고 덩치 큰 괴인이 모습을 드러내자.
한시도 쉬지 않고 광폭하게 불뚝거리는 근육질 육신 위로 낯익은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놀랍게도 한줄기 유성이 되어, 나와 강태백 사이에 떨어져 내린 이의 정체는 바로….
내 하나뿐인 제자, 김혜옥이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너였냐!
도대체 언니가 왜 여기서 갑자기 튀어나오시는 건데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등장하자, 나는 그만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번에도 인간의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괴물이로군. 기세를 보아하니 쉬운 상대는 아니겠어.”
인간 같지 않은 박력을 온몸으로 뿜어내는 김혜옥의 모습에, 뭔가 괴악한 오해를 한 것일까?
김혜옥의 과하게 늠름한 자태와 마주한 강태백은 낮게 중얼거리며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일백 하고도 일곱 개의 구슬이 그의 등 뒤에서 회전을 시작하자, 강태백의 외골격 위로 시퍼런 불길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요 가증스러운 몬스터 놈이 누구더러 괴물이래!”
강태백에게 엉겁결에 괴물 취급을 당한 김혜옥은 광포한 포효를 내질렀다.
그녀의 허옇게 까뒤집어진 눈에서 이글거리는 녹색 귀화가 더욱 흉악하게 불타올랐다.
주인의 분노에 감응한 근육이 당장이라도 강태백을 찢어발길 것처럼 난폭하게 꿈틀거렸다.
시퍼런 불길에 휘감긴 강태백과 녹색 안광을 뿜어내는 김혜옥.
두 사람 모두, 도저히 인간이라 볼 수 없을 만큼 대단한 박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각자 상대방을 몬스터라고 오해할 정도로 말이지.
“…진정하세요. 길드장님. 눈앞의 그 덩치 큰 친구는 몬스터가 아닙니다. 혜옥이 너도 진정하고.”
강태백과 김혜옥 사이에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 적의가 감돌기 시작하자.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 나는 그 광폭한 기류가 충돌하는 현장에 끼어들었다.
“이 목소리는?”
내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김혜옥의 귓가를 두드리자.
허옇게 까뒤집어진 채, 녹색 광채를 뿜어내던 김혜옥의 살벌한 눈빛이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당장이라도 강태백을 찢어발길 듯 흉악하게 불끈거리던 근육질 육신이 멈칫 움직임을 멈췄다.
“…싸부님? 정말 싸부님이에요?!”
김혜옥은 어째선지 가늘게 떨리는 몸짓으로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친 순간, 왕방울만 한 눈에 조금씩 습기가 차올랐다.
“그래. 나처럼 잘생긴 헌터가 나 말고 또 어디 있겠냐.”
“우와아앙! 싸부니이이임!”
내 입에서 긍정의 대답이 들려온 것을 신호로. 김혜옥은 번개처럼 내게 달려들었다.
곧이어 그녀의 우람한 팔뚝이 마치 먹이를 포획하는 아나콘다처럼, 내 몸을 꽈드득 휘감았다.
거대한 압박감과 함께, 온몸이 바스라질 것 같은 충격이 내 몸에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크, 크헉! 혜, 혜옥아 바, 반가운 건 알겠는데 이것 좀….”
“우어어어억! 싸부님! 싸부니이임!”
온몸을 통째로 쥐어짜는 듯한 충격에 나는 다급히 김혜옥의 굵은 팔뚝을 두드렸지만.
그것만으론 감정이 격해진 사춘기 소녀의 폭풍과도 같은 기세를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내 목소리에 오히려 더욱 설움이 치민 모양인지, 짐승과도 같은 괴성이 터졌다.
내 몸을 조여오는 충격은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더욱 강력해졌다.
그렇게 감정이 격해진 김혜옥의 팔근육에 쇠심줄 같은 힘줄이 불길하게 우두둑 돋아난 순간!
-뿌각!
뭔가 허리 쪽에서 들려서는 안 될 것 같은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곧이어 황금빛으로 물들었던 시야가 서서히 암전되며, 또렷하던 의식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흘러나온 주르륵 게거품이 내 입가를 허옇게 물드는 것이 느껴졌다.
“…세상에.”
그렇게 조금씩 어두워지는 내 시야에 마지막으로 비친 것은, 혼란에 빠진 강태백의 넋과 어처구니를 동시에 잃어버린 얼굴이었다.
멍하니 입을 헤 벌린 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나는 까무룩 의식을 잃어버렸다.
******
“웨이크업 플리즈 펀치!”
-빠각!
김혜옥의 과한 애정표현 덕에 의식을 잃어버린 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두컴컴한 회색빛 무의식 속을 정처 없이 부유하던 내 정신은, 괴상한 괴성과 가슴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충격과 함께 강제로 사바세계로 끌려 나왔다.
“정신이 드세요? 싸부님? 죄송해요. 너무 반가워서 그만….”
내가 의식을 되찾은 것을 확인한 김혜옥은 혀를 쏙 내밀곤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꾸벅 숙였다.
이곳에 나타날 리 없는 이가 갑자기 나타나 내게 사과를 표하는 모습과 움푹 함몰된 가슴팍에 느껴지는 화끈한 충격에, 나는 도저히 정신줄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뭐지. 꿈인가?
“설명해주게. 이 몬스…. 아니 이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그렇게 반쯤 정신줄을 놓은 채, 멍하니 김혜옥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강태백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내게 김혜옥의 정체에 대해 물어왔다.
의문이 가득한 강태백의 시선에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한 나는 쓰게 웃으며, 그의 질문에 답했다.
“저번에 보고드렸던 신입 치유사입니다. 인사드리렴. 혜옥아. 이분이 우리 길드장님이시다.”
“예? 이, 이분이 바로 그…. 세상에! 이를 어째! 죄송합니닷! 길드장님! 몬스터인 줄 알았어요!”
조금 전, 별로 유쾌하지 않았던 첫 만남 때문인지.
경계에 가까운 눈빛으로 강태백을 바라보던 김혜옥은 내 소개에 화들짝 놀라며, 강태백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대지를 향해 고개를 숙인 그녀의 입에선 솔직한 감정을 품은 천둥과도 같은 사과가 우렁우렁 터져 나왔다.
“몬스터인 줄 알았다고…? 피차 비슷한 오해를 했군. 아닐세. 이쪽이야말로 미안하지. 나 역시 자네의 외형만 보고 어리숙한 실수를 범했어.”
김혜옥의 입에서 솔직한 감정이 담긴 사과가 튀어나오자.
그녀의 사과에 피폭당한 강태백은 호탕하게 껄껄 웃으며, 김혜옥의 넓은 등을 두드려주었다.
“이 덩치에 치유사라…. 그래. 자네가 바로 한때 업계를 뒤흔들었던 그 ‘폭풍’이었군. 사악한 마족 놈과의 전투가 내 눈을 어둡게 만들었던 모양이야. 왜 진즉 자네를 알아보지 못했을꼬.”
고개를 숙인 김혜옥을 일으켜 세운 강태백은 새삼스럽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업무에 한해선 꼼꼼한 성격의 그답게, 뒤늦게나마 김혜옥에 관련된 정보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지난번 튜토리얼에서 김혜옥이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보여준 것을 떠올린 탓인지, 아니면 그녀에 대한 신지현의 보고서를 떠올린 탓인지.
김혜옥을 바라보는 강태백의 눈빛은 점점 눈에 띄게 호의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갑자기 여긴 무슨 일이니?”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둘 사이에 있었던 오해의 응어리가 눈 녹듯 사라져가자.
잠시 강태백의 눈치를 보던 나는 김혜옥에게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 이유에 관해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김혜옥이 이곳에 나타난 이유를 지금의 난,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섭섭하게 무슨 일이냐뇨! 당연히! 싸부님의 원수를 갚으러 왔죠!”
“…원수라고?”
…이건 또 뭔 소리야?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김혜옥에게 던졌던 질문은 오히려 더 큰 의문을 불러왔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당당한 답변이 이해가 가지 않아, 나는 맹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싸부님께서 신종 몬스터를 쏟아내는 게이트에 휩쓸려 실종처리 되신지 어언 일주일! 당연히! 제자된 입장에서 어찌 가만히 있겠냐구욧!”
왠지 극도로 흥분한 김혜옥의 입에서 흘러나온 답변은 다시 한번 내 머릿속을 헝클어뜨렸다.
동시에 그녀의 답변은 흐뭇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던 강태백의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이, 일주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오늘, 오늘은 분명….”
“마, 맞네. 게이트 내부에서 흐른 시간은 분명 반나절뿐이었거늘!”
나와 강태백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품속에서 스마트폰을 빼 들었다.
어두컴컴한 어둠에 잠긴 스마트폰에 환하게 전원이 들어온 순간….
얼굴에서 창백하게 핏기가 가셨다. 스마트폰을 틀어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열흘이나 지났어?”
분명, 그동안 왜곡형 게이트에서 체감했던 시간은 기껏해야 반나절에 불과했지만.
스마트폰의 화면엔 우리가 게이트에 휩쓸린 시점으로부터 열흘 뒤의 날짜가 표기되어 있었다.
…시간까지 왜곡되는 타입의 게이트였다니.
잠깐만! 그렇다면 놈들의 노림수는 설마!
“혜, 혜옥아 그동안!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무슨 일이 있었지?!”
머릿속을 불현듯 스친 불안한 예감에 나는 김혜옥의 우람한 팔을 콰악 틀어쥐었다.
그리곤 형형히 빛나는 눈빛과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다급히 물었다.
“…그게요. 실은 우리 사무실 망해버렸어요.”
“…뭐?”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 뭐 높으신 분들이 신 팀장님 징계 조치한다고 그러던데요?”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빗나감이 없는 법이었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변해버린 김혜옥의 입에서 내가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결말이 흘러나왔다.